벌레의 숨결
주하림 시인 - 애지 작품상 후보 6 본문
주하림 시인
- 1986년 7월 10일 (만 28세), 전북 군산시 | 호랑이띠, 게자리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대학원 졸업
2009년 창비가 주관하는 제9회 창비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2013년 3월 첫 시집 《비버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을 출간했다.
레드 아이
무릎에 생긴 멍이 어느 날 눈동자가 되었습니다
저녁식사 도중 엄마의 남자와 작은 목소리로 다툰 날이었고
결혼을 앞둔 남자가 폭염을 만들어 낸 날이었습니다
어둠이 원치 않은 곳에서 서서히 눈 뜨는 동안
싸움을 말리던 아버지가 멜빵차림 어린애로 변하고
친구가 나의 미래를 헐뜯다 떠났죠 마을 뒤 작은 언덕을
끝없이 달리고서야 눈의 통증이 시작됐습니다
동네안과에 찾아가 피가 뚝뚝 흐르는 무릎을 올려놓습니다
입이 세 개인 것보다 낫지 않나요 당신은 치료를 원합니까
눈이 영영 사라지길 비나요 아니면 눈과 무릎이 조화롭게
공생하길 바라나요 이제 막 꿈틀거리는 눈을 붕대로 칭칭 감고
간호사는 그 위에 입술을 그려넣었습니다 세 개의 입을 달고,
나는 계절이 지날 때까지 비난 속에 살 것임을 예감했죠
눈이 처음 건넨 말은 불을 꺼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곧
돌멩이와 불길 속에서 살아남은 자신의 일대기를 꺼내놨죠
왜 나의 눈이 세상의 정물을 칭찬하며 우물쭈물 입을 엽니까
한 몸이 되려고 울퉁불퉁 시간 위를 견디었다 말하지 못합니까
서로 같은 방향을 보기 위해 멍자국이 새카맣게 쏠린 것이라고
왜 그 결심은 나를 흔들며 무섭게 설득시키지 못합니까
바다 일몰을 보고 싶다는 마지막 청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입술 주변에 삐뚤빼뚤 다리를 그려주었죠
얘야, 이십 년 넘게 떨어져있던 한 쪽 눈을 찾아가도 되겠니
내 가슴을 벌려달라는 말이었습니다
자궁을 헤치다 천천히 침몰하는 해파리떼, 퉁퉁 붓는 눈꺼풀들
-------------계간 『창작과 비평』 2009년 겨울호
원나잇
1
당신을 부를 때 나는 슬픈 호흡을 한다
와줘서 고마워요 기다렸죠 다신 오지 마요
걷는다 걷는다 밤의 무너진 테라스를 뛰어넘고
너는 되고 나는 안 되는 것
킬링 인 더 네임Killing in the Name을 부르며
너라는 추상성, 너라는 통증으로부터 기억은 출발한다
새벽 술병을 세다 귓속을 피투성이로 만든 몇 통의 불발
아직 춥고 먼 이름들에게 단지 장난은 아니었다고
막 용기를 갖게 된 어린사자처럼
누군가의 밤길을 힘주어 걸은 적이 있다
어떤 자리라도 빌어 꼭 한번 보고 싶었어요라고 고백했을 때
수첩에 적었다 찢어버린 번호들이
너의 손바닥으로 항해를 끝마친 배처럼 돌아오고
대낮으로 나온 동공이 처음 이물질을 느끼기 시작할 때
반복되던 꿈, 짙은 안개 속을 헤매다 만났던 그리운 향이라 생각했어
언젠가 당신이 머물다 떠난 방의 불길처럼 무섭게 번져가는
너라는 추상성, 너라는 통증으로부터 미래는 역주행 하는데
2
자다 깨서 재채기를 하고 헤어진 여자들을 떠올려
손바닥에서 지저분하게 밀려나간 글자와 숫자
이렇게 외로울 줄 알았다면 차라리 그 때!
화가 날 땐 바지를 내리고 그곳을 세게 쥔다
멋있는 습관인 줄 알고
누군가와 살을 맞댄 날을 흐린 문신으로 새긴 후
물구나무를 선다, 흘러가는 고통을 거꾸로 읽어내며
살 안쪽을 자꾸 입으로 빠는 버릇
안개 속을 헤치다 만난 향들이 몸속에서 서서히 흩어져
우리 비껴간 날들이 빙하가 되어 녹고 있어
눈꺼풀을 떠돌던 마지막 한 조각이 네 목덜미를 겨눌 때
나는 너의 향을 또 지나쳐야하는 걸까
정말 저번 생에서 도망치듯 나온 반지하방이 아직 우릴 기다릴까
축축한 기분을 걸어두고 당신의 둥근 뼈에서의 하룻밤, 잠들 수 있다면
----------------2010년 시와시 여름호
타노시이 선술집
소설가는 진실만을 씁니다
경험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요새 많이 야위었어요
오래된 애인이 옆에서 웁니다
술과 담배를 너무 많이 하는 여자는 싫습니다
소설가는 한 때 일본식 선술집 주방장이였죠
고갸루 화장을 한 어린여자들이 빙글빙글 모여듭니다
하라주쿠 막 켜진 불빛을 닮았어요
어린 여자들 젖은 배에서 분냄새가 나고
천천히 깨지는 웃음소리 끝에
우리는 고운 분냄새를 나누어 갖습니다
나눠 가져도 벅찬 양입니다
화장실 갈 때 한 번 부엌에서 두 번 식탁에서 열 번
여자들 눈빛은 차츰 하라주쿠 꺼진 불빛을 닮아갑니다
어른이 될 거에요 제일 조용했던 여자 하나가
회칼을 뺏어들었어요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좋은 작품만 쓰면 되니까 그동안의 말과 경험과 진실을 이용해
여자를 눕힙니다 다정하고 현명하게 사랑받는단 느낌만 빼고
얇게 저민 회, 학모양 장식만 마치면 거친 숨소리도 잦아듭니다
화장실 부엌 식탁에서 실컷 분냄새를 코로 빨아들인 소설가는
자신이 고운 여자를 만나 늙어갈 것임을 믿습니다 천장은 높고
세계 각지에서 사들인 조리기구들이 물기에 반짝입니다
보름 만에 선술집은 문을 닫고 어린여자들이
우왕좌앙 어른이 되었다 짐승이 되었다 정작 여자가 못 되도
소설가에겐 신들린 작품뿐이지요
가끔 오래된 애인이 사준 시계줄이 뚝 끊어져도
그것은 로망이라 새겨지겠죠 한 문장 두 문장 건너뛸 때
젖은 분냄새가 밀가루 반죽처럼 엉킵니다
무심코 건드리기만 해도, 새로운 여자쯤 금세 탄생하지요
'한국의 시인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이체 시인 - 애지 작품상 후보 4 (0) | 2014.09.03 |
---|---|
김지녀 시인 - 애지 작품상 후보 5 (0) | 2014.09.03 |
박연준 시인 - 애지 작품상 후보 7 (0) | 2014.09.03 |
이지호 시인 - 애지 작품상 후보 8 (0) | 2014.09.03 |
정선(정경희) 시인 - 애지 작품상 후보 9 (0) | 2014.09.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