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이지호 시인 - 애지 작품상 후보 8 본문

한국의 시인들

이지호 시인 - 애지 작품상 후보 8

연안 燕安 2014. 9. 3. 00:00

 


이지호 시인
1970년 충남 부여 출생 
충남대학교 식품영양학과 졸업 
2011년《창작과비평》신인상으로 등단 
<1>-읍소하는 남자/이지호-
한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네 
한 남자는 손을 맞잡고 연신 조아리고 있네 
날개를 접고 지상에 내려앉은 비둘기. 
아이가 먹다 흘린 과자 부스러기를 먹고 있네 
흔들리는 목적이 있어야 접었다 폈다 하는 날개가 있네 
간절함이 가득 묻어 있는 손 
불안한 손바닥끼리 맞잡고 있네 
맞잡는다는 것, 혼자서도 가능한 일이네 
기울어진 중심점은 비굴함 쪽으로 기울어져 있네 
상대의 열려 있는 틈으로
사내의 비굴함이 들어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네 
또르르 떨어지는 나뭇잎에 펴졌던 날개의 기억은 날아가고 
휘휘 젓는 아이 손에 눈치만 보고 있는 날개 
얼음도 녹일 것 같은 뜨거움이 손에 가득하네 
축축한 땀이 배어 나오는 
가랑비같이 속을 알 수 없는 손이네 
저 포개진 손에서 얼마나 많은 좌절이 들었다 갔는지 
세상의 온갖 허전함을 다 맛 본 손 
좁은 틈에 껴 있는 먹이를 낚아채듯 
차가운 비굴이 손을 빠져 나가네 
말과 다르게 미끄럽지 않은 비굴이네 
이 비굴을 아껴야겠다는 듯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사내가 걸어가네 
뒤뚱거리다 종종거리는 비둘기 같네
<2>-허수아비/이지호-
소읍의 외곽으로 더딘 물들이 흘러갔다
하천을 지나 구부러진 산을 지나는 물살
다리 입구에 늘 앉아 있는 사내가 있었고
그가 하는 일이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물소리를 지키는 일이었다
물소리 안쪽이 뒤척일 때마다 손을 들어 물길을 트는 듯했고
그럴 때마다 누더기 같은 바람이 흔들렸다
앉는 곳 어디든 방이 되었다
아버지가 헛간을 제의했을 때
주름진 얼굴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겨울에도 춥고 여름에도 추운 사내의 복장엔
지저분한 추위들이 가득 붙어 있었다
아이들은 새를 쫓는 대신
허수아비 같은 사내에게 돌을 던졌다
가을이 가면 떠날 것이라는 말이 새처럼 날아갔다고
서쪽 어느 마을에 움막이 비어 있고
그 움막으로 가서 햇볕을 장만하겠다고
하얀 귀들이 내려와 사각사각 밟히는 철
가끔 아이들을 불러
물의 안쪽 소리를 들려주려 했을 것이다
소읍의 마지막 어둠이 늘 들렀다 가던 다리 밑
물소리를 지키는 허수아비가 있었다
빈 발,
허수아비가 뽑혀졌다
물소리는 더 이상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리는 머지않아 더 길고 튼튼해졌다
<3>-한계령풀/이지호-
  계절을 출하하는 시간 이때쯤은 윙윙거리는 공장 기계소리가 산에서 들린다 쌀쌀한 바람
연료를 넣고 한해살이 여러해살이식물들이 흔들림으로 종사한다
  목적에 따라 꽃이 되고 풀이 되는 이름 칡덩굴 줄기 사이 이름 모를 풀들과 꽃이 피었다 
직급 같은 나무와 거리를 둔 기록되지 않은 풀의 시간은 계약직 같다
  출근했던 공장의 소리가 들리는 산 얼마 전까지 푸른 교대를 마친 침엽수들이 깊숙한 곳
으로 물러앉을 시간이다
  흔들림으로 모든 꽃과 열매는 만근에 다다른다는데 근근이 버티고 있는 언니는 흔들리지 
않겠단다 오월에 핀다는 한계령풀이 눈 속에서 피었다 단단하고 깊은 뿌리를 한 칡덩굴 옆
이었으니 그 쫄밋거림이야 말 없어도 알겠다
  숲의 세세한 틈마다 한 해 한 해를 견디는 풀들로 가득하다 이 숲의 밀도가 견고한 계절을 
만들고 있다는 것 뿌리도 없이 제 씨앗을 탈탈 털어 허기진 산을 채우는 풀씨들은 가벼운 
비정규직
  백과사전에는 풀에도 꽃이 핀다고 나와 있지만 끝내 꽃을 피우지 못하는 언니 해가 지면서 
한해살이도 여러해살이도 함께 어두워지고 있다
<4>-틈이라는 잎/이지호- 
돋아나는 새잎은
묵은 것을 새어 나가게 하는 틈
오랜 독에는 시름에 꺾인 잎의 무늬처럼
실금으로 새잎으로 돋아나 있다
작은 금 하나가 내부를 텅 비게 할 수도 
염분 밴 시간들
한쪽으로 치워 놓았다
더 이상 발효 없는 생각, 내용 없이 들어 있다   
저 잎 틈으로 드나드는 것
간장 위에 떠 있던 짠 달은 어디로 갔을까
일렁이던 간장독 안의 흰 달
발 없는 것만 잠겼다 가던 곳
나뭇잎 소리, 산새 소리가 장아찌마냥 박혀서 푹 익어가던 날이
다 새어 나간 그믐의 한 낮
발 없이 왔다 간 것
환한 달 건져 그 빛 비추어 흔적도 없이 돌아간 옛일들
쪼개진 허공엔 나뭇잎이 거미줄에 잠겨 있다
이제는 그늘만이 발효되는 빈 독
숱한 금으로 내 쓴맛도 새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