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길상호 시인/ 대표시 본문

한국의 시인들

길상호 시인/ 대표시

연안 燕安 2014. 7. 18. 21:56

길상호


1973년 충남 논산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재학.
청림문학 동인.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오동나무안에 잠들다』『 모르는척』『 눈의 심장을 받았네』

 

 

그 노인이 지은 집
 

그는 황량했던 마음을 다져 그 속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먼저 집 크기에 맞춰 단단한 바탕의 주춧돌 심고
세월에 알맞은 나이테의 소나무 기둥을 세웠다
기둥과 기둥 사이엔 휘파람으로 울던 가지들 엮어 채우고
붉게 잘 익은 황토와 잘게 썬 볏짚을 섞어 벽을 발랐다
벽이 마르면서 갈라진 틈새마다 스스스, 풀벌레 소리
곱게 대패질한 참나무로 마루를 깔고도 그 소리 그치지 않아
잠시 앉아서 쉴 때 바람은 나무의 결을 따라 불어가고
이마에 땀을 닦으며 그는 이제 지붕으로 올라갔다
비 올 때마다 빗소리 듣고자 양철 지붕을 떠올렸다가
늙으면 찾아갈 길 꿈길뿐인데 밤마다 그 길 젖을 것 같아
새가 뜨지 않도록 촘촘히 기왓장을 올렸다
그렇게 지붕이 완성되자 그 집, 집다운 모습이 드러나고
그는 이제 사람과 바람의 출입구마다 준비해둔 문을 달았다
가로 세로의 문살이 슬픔과 기쁨의 지점에서 만나 틀을 이루고
하얀 창호지가 팽팽하게 서로를 당기고 있는,
불 켜질 때마다 다시 피어나라고 봉숭아 마른 꽃잎도 넣어둔,
문까지 달고 그는 집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못 없이 흙과 나무, 세월이 맞물려진 집이었기에
망치를 들고 구석구석 아귀를 맞춰나갔다
토닥토닥 망치 소리가 맥박처럼 온 집에 박혀들었다
소리가 닿는 곳마다 숨소리로 그 집 다시 살아나
하얗게 바랜 노인 그 안으로 편안히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심사평 : 김남조, 김광규, 정호승 

'그 노인이 지은 집'은 군계일학이었다. 한편의 시가 마치 한 권의 책과 같은 질량감과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다. 한 노인이 집에 들어가는 과정, 즉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아무런 무리없이 균등한 밀도를 바탕으로 통일감을 형성한 점이 크게 돋보였다. 특히 서사적 요소에 서정적 요소를 차근차근 잘 어우러지게 한 데서 오는 감동이 컸다.    
이번 심사를 통해 심사위원들은 한국의 서정시가 본 궤도에 오른 느낌을 받았다. 한때 과도한 부담으로 느껴졌던 현실참여라는 짐을 이제 비로소 내려놓은 것 같다는 점을 부기한다.

 

 

 

 

붉은 마침표

  

 

옐로스톤 들판 눈밭엔/발로 쓴 글이 어지럽습니다/쫓기는 새끼 엘크의 문장 뒤로/고요테들의 문장이 달리는데/얼마나 급하게 휘갈겼는지/쉽게 읽어낼 수 없습니다/눈 위에 흘려놓고 간/근육의 경련과 이빨의 독기 같은/아직 신선한 접속어를 주워/끊긴 문맥을 잇곤 합니다/거친 숨 고를 쉼표도 없이/치열하게 사건은 전개되다가/심장의 압박이 극에 달하는 순간/아쉽게 끝이 납니다/아마도 수북히 쌓인 눈이/엘크 발목을 잡았던 모양이지요/더 이상의 반전은 없다는 듯/그 자리 마침표 하나/붉은 피비린내가 선명합니다

 

 

 

 

돌탑을 받치는 것

 

 

반야사 앞 냇가에 돌탑을 세운다
세상 반듯하기만 한 돌은 없어서
쌓이면서 탑은 자주 중심을 잃는다
모난 부분은 움푹한 부분에 맞추고
큰 것과 작은 것 순서를 맞추면서
쓰러지지 않게 틀을 잡아보아도
돌과 돌 사이 어쩔 수 없는 틈이
순간순간 탑신의 불안을 흔든다
이제 인연 하나 더 쌓는 일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 벌어진 틈마다
잔돌 괴는 일이 중요함을 안다
중심은 사소한 마음들이 받칠 때
흔들리지 않는 탑으로 서는 것,
버리고만 싶던 내 몸도 살짝
저 빈 틈에 끼워 넣고 보면
단단한 버팀목이 될 수 있을까
층층이 쌓인 돌탑에 멀리
풍경소리가 날아와서 앉는다

 
 


 
강아지풀

 

                                           

지난 세월 잘도 견뎌냈구나

말복 지나 처서 되어 털갈이 시작하던

강아지풀 , 제대로 짖어 보지도 못하고

벙어리마냥 혼자 흔들리며 잘도 버텨냈구나

외딴 폐가 들러 주는 사람도 없고

한 웅큼 빠져 그나마 먼지 푸석한 털

누가 한 번 보듬어 주랴, 눈길이나 주랴

슬픔은 슬픔대로 혼자 짊어지고

기쁨은 기쁨대로 혼자 웃어 넘길 일

무리 지어 휘몰려 가는 바람 속에

그저 단단히 뿌리 박을 뿐, 너에게는

꽃다운 꽃도 없구나

끌어올릴 꿈도 이제 없구나

지금은 지붕마다 하얗게 눈이 내리고

처마 끝 줄줄이 고드름 자라는 계절

빈집에는 세월도 잠깐 쉬고 있는 듯

아무런 기척 없는데 너희만 서로

얼굴 비비며 마음 다독이고 있구나

언 날이 있으면 풀릴 날도 있다고

말없이 눈짓으로 이야기하고 있구나

어느새 눈은 꽃잎으로 떨어져

강아지풀, 모두 눈꽃이 된다 

 

 


봄비에 젖은

  
 

약이다

어여 받아먹어라

봄은

한 방울씩

눈물을 떠먹였지

차갑기도 한 것이

뜨겁기까지 해서

동백꽃 입술은

쉽게 부르텄지

꽃이 흘린 한 모금

덥석 입에 물고

방울새도

삐! 르르르르르

목젖만 굴려댔지

틈새마다

얼음이 풀린 담장처럼

나는 기우뚱

너에게

기대고 싶어졌지

 

 

 

 

 

목욕

 

  

옷을 다 벗었는데

박박 문지르니 다시

먼지의 옷이 벗겨진다

살비듬 옷이 벗겨진다

주름투성이 구겨진

헐렁한 옷만 남는다

이 옷을 벗기는 데

또 얼마나 걸릴까

여기저기 상처로 덧대

살아온 바느질 자국

수련처럼 물을 맞대고 살면

스르르 풀릴 실밥인데

마무리해둔 실 끝을 찾아

오늘도 배꼽만 긁는다

물기 젖은 창 뒤에 숨어

나를 훔쳐보던 감나무

눈이 마주치자 후다닥

어둠 속에 숨는다

벗어둔 낙엽이 한 장

유리창에 걸려 있다

 

 

 

겨울, 거울

 


  그는 빈 골목 담장에 어깨를 기대고 있었다. 얼굴 가득 피어난 성에를

닦아주자 입을 열었다. 거긴 바람이 많지? 그의 옷자락도 분명 흔들리고

있었는데, 바람은 아닌 듯했다. 깨진 모서리 어디에서도 펄럭이는 소리

가 들리지 않았다. 퍼런 입술을 움직여 만들어내는 그의 말들도 사실 맺

혔다가 흐르는 물방울이었다. 얼어버리기 전에 읽지 못하면 영영 놓치고

말 목소리에 대고 입김을 불어대며 서 있을 때, 가까이— 더 가까이 와봐!

나의 목에 낚싯바늘을 꿴 그의 시선이 줄을 잡아당겼다. 시간의 뒷면에 발

라놓은 수은 때문에 결코 들어설 수 없는 곳에 그는 있었지만, 유리의 간격

을 두고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순간 우리는 쩍, 달라붙고 말았다. 서늘한 온

도의 접착력에 놀라 뒷걸음을 쳤지만 입속의 혀까지 이미 얼어버린 뒤였다.

그가 유리에 찍힌 핏자국을 핥으며 처음으로 웃었다. 미소 짓는 얼굴에 검은

띠를 둘러주자 허름한 영정사진이 만들어졌다.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골목에

눈발이 하얗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바람의 무늬

 


산길 숨차게 내려와
제 발자국마다 단풍잎 붉게 물들이는,
잎들뿐 아니라 오래도록 위태롭던
내 마음의 끝가지도 툭툭 부러뜨리는
바람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향천사香川寺 깊은 좌선坐禪 속에서
풍경은 맑은 소리로 바람을 따르고
나의 생각들도 쫓아갔다가 이내
지쳐 돌아오고 마네

이 골짜기 전설傳說만큼이나 아득하여서
마음을 접고 서 있네 그랬더니
아주 떠난 줄 알았던 바람 다시 돌아와
이제는 은행나무를 붙잡고 흔들며
노란 쪽지들을 나에게 보내네

그 쪽지들을 펴 읽으며 나는
바람과 나무가 나누는
사랑을 알게 되었네, 가을마다
잎을 버리고 바람을 맞이하는 나무의
흔적,
나무는 깊은 살 속에
바람의 무늬 새겨 넣고 있었네
그 무늬로 제 몸 동여매고서
추운 겨울 단단히 버틴 것이네

풍경 소리가 내 마음의 골짜기에서
다시 한 번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