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정선(정경희) 시인 - 애지 작품상 후보 9 본문

한국의 시인들

정선(정경희) 시인 - 애지 작품상 후보 9

연안 燕安 2014. 9. 2. 23:59

정선 (정경희) 시인

 

전남 함평에서출생. 전남대 국문학과 졸업.

2006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시집 『랭보는 오줌발이 짧았다』(천년의시작, 2010),

 에세이집 『내 몸 속에는 서랍이 달그락거린다』가 있음 

2012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2006년 『작가세계』로 등단한 정선 시인의 첫 시집

-상처의 치유 혹은 번짐

 

 

등단 4년 만에 펴내는 정선 시인의 첫 시집 『랭보는 오줌발이 짧았다』는, 그녀 속에 웅크리고 있던 오랜 기억과 감각과 충동들이 매우 선명한 물질적 구체성을 가진 채 펼쳐지고 있는 일종의 성장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정선 시인은 “상처가 날개가 되도록/(…)/누가 나를 때려다오”(「타작」) 같은 언명을 통해, 오랜 기억 속에 깃들여 있던 ‘상처’들이 자신의 존재론적 근거를 이루고 있음을 토로하면서, 그 상처들이 은은하게 치유되거나 새록새록 번져가는 이중의 과정을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다.‘시(詩)’가 오랜 기억을 현재형으로 되살리는 상상적 행위라고 한다면, 정선 시편들은 과거의 물리적 경험들을 구체적 감각으로 되살려 ‘충만한 현재형’으로 만드는 일에 골몰하고 또 그것을 성취한 사례로 평가받을 만하다. 그 점에서 그녀 시편들은 시간의 불가역성을 거슬러 감각적 현재를 되살리는 가장 전형적인 세계로, 그리고 이성적 논리를 포섭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훌쩍 넘어서는 근원적이고 원형적인 기억과 감각과 충동을 보여주는 세계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결국 우리는 정선 시인의 첫 시집을 통해, 다시 한 번 물질성과 구체성의 결속이 얼마나 ‘시’를 단단하고 선명한 발화로 만들어내는지를 실감 있게 목도하게 된다. 이 글은 이러한 정선 특유의 발화 과정과 그 결실을 살피면서, 그녀 시편들의 발생론을 이루는 상처들이 아름답게 치유되거나 처연하게 번져가는 과정에 대한 짧은 관견(管見)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추천글]맨 앞자리에서 눈을 깜박이던 그날의 정선은 지금 무섭게 커버린 자신의 존재를 보여 주려는 듯, 내 앞에 자신의 첫 번째 시집으로 묶어낼 내용을 선보였다. 순간 ‘정말 많이도 커버리고 제법 달라진 모습’에 기쁨과 환희가 물줄기처럼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그 몇 해 동안을 정선은 새로운 운명에 부대끼면서 깎이고 쌓여서 얻어낸 단단한 결곡을 아무런 거침없이 표현해 보임으로써, 제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순도 높게 드러내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시는 도린곁에 있다. 그는 어딘가로 떠나려 한다. 뿌리를 낯설어하는 그는 소외와 아픔을, 때로는 떫은 웃음으로, 때로는 건조하게, 때로는 진솔하게 그려낸다. 슬픈 ‘혁명’의 완성을 위해 ‘울림’의 배 한 척을 당당하게 몰고 나가는 그의 몸짓은 치열하다. 여기에 그의 시의 강단이 있다. “무장무장 눈치 없이 나리”는 눈을 보듯이, 앞으로 그의 시세계는 사방팔방으로 크게 뻗어 나갈 것을 나는 믿는다.─ 이수익(시인)

 

 

랭보는 파리에서 보낸 지옥 같은 한철을 뒤로 한 채 아프리카로 갔고, 그의 사랑과 상처와 고통과 광기를 담은 울음은 “하늘 아래 어디에도 손잡을 이” 없는 예술 속으로 은은하게 번져갔다. 모든 것을 시와 맞바꾼 그는 오로지 “등뼈 하나로 곧추선” 모습을 한 채, 그리움을 남기고 사라졌다. 단단하고 선명한 ‘등뼈 하나’로 자신의 고독과 예술을 모두 완성하고 소진한 것이다. 그 랭보의 “저 찬란한 타락” 같은 빛나는 오줌발을 매개로 하여 화자는 예술적 개안(開眼)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이 시편의 화자는 사랑과 상처와 고통과 광기 같은 독성들을 통해 세상을 투시한 랭보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자신도 바람을 고쳐 신은 채 결코 가르쳐지지 않는 길을 걷겠노라는 의지를 토로하게 된다.─ 유성호(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약력]전남 함평 출생. 전남대 국문학과 졸업. 2006년 『작가세계』 등단. 에세이집 『내 몸 속에는 서랍이 달그락거린다』.

 

 

[시인의 말]잘못했습니다.무릎을 꿇고엎디어 히말라야 설산을 품는다.나지막한 바닥의 말들,내게 등 돌리지 않을 그 무엇들.홀로 나부낄 타르초를 가슴에 꽂는다.디아스포라 바람을 신고.─ 내 안에서 죽은 kk에게

 

 

[차 례]I타작 ──── 13카프카들 ──── 14랭보는 오줌발이 짧았다 ──── 16마지막 남길 말에 대해 생각함 ──── 19통뼈 ──── 20그대에게 가는 배 한 척을 세우기 위해 ──── 22석계역 ──── 25태양과 입술의 부적절한 관계 ──── 26붉은 시간 ──── 28병으로서의 디아스포라 ──── 30타인들 ──── 32놈을 업고 달린다 ──── 36국밥을 사랑하는 법 ──── 40마른 몸을 열어 ──── 42날것 그대로 ──── 44완전한 비상구 ──── 46바벨 0시 ──── 48ㄲ에 대한 형이하학적 자가 진단 ──── 50변기는 변기가 아니다 ──── 52소셜 코요테 클럽 ──── 54

 

 

II밥 말리 풍으로 이별하기 ──── 59잠 속의 잠 ──── 61사랑을 완성하는 뒤처리 방식 ──── 62달콤한 정원 ──── 64살바도르 달리식 풍경 ──── 66놈에 관한 ──── 68폐업 신고 ──── 71이스탄불 이스탄불 ──── 72몸에서는 짓무른 꽃냄새가 났다 ──── 74밤마다 그의 서랍을 훔친다 ──── 76저 폐닭 위로 내리는 ──── 78레우코클로리디움 파라독섬 ──── 80사마귀 왕국 ──── 82아지 ──── 84나는 벌거숭이다 ──── 86혹은 변신 ──── 88우는 것들은 ──── 90보헤미안 레시피 ──── 92즐거운 소망원 ──── 94

 

 

III키쓰는 무장무장 나리고 ──── 97아카시아 ──── 99엄마에게선 갯내음이 났다 ──── 100증오를 위한 변명 ──── 102짱짱한 가계 ──── 104지하철 1호선 ──── 106닫힌꽃 ──── 107변소와 칙간 사이 ──── 108싸게싸게 귀는 길을 내고 ──── 110붕어가 돋보이는 정물 ──── 112헐렁헐렁한, ──── 113오 징한 것들 ──── 114노을에 투신하다 ──── 115판야나무 ──── 116도린곁 ──── 118몸은 고통을 분담하는 지혜를 가졌다 ──── 119부활 칸타타 ──── 120

 

해설:상처의 치유 혹은 번짐 | 유성호 ──── 123

 

 

 

 

 

 

 

 

 

카프카들 (외 3편)

 

 

 

 

   정 선

 

 

사내가 이쯤에서 발걸음을 꺾을 것이다

골목이 끝나는 곳에 광장이 있다

사내는 주머니를 몇 번 뒤적거리다 왔던 길을 더듬어 간다

구부정한 그림자가 힐끗, 광장을 들었다 놓는다

모퉁이에서 길게 휘어지는 사내

뒷골목은 불안이 숨기에 알맞은 곳이지

사내가 중얼거리자 마른기침이 터져나온다

사내의 집은 성당 뒤에 있었다

해질녘 종소리는 골목마다 구불텅구불텅 기어다녔다

그는 세계를 찢고 싶어했다

소녀의 하초 같은 그의 세계

작은 날갯짓으로 날마다 두려움에 파닥거렸다

아가리를 벌려 그를 삼킬 것 같은 광장

욕심 많은 아버지의 고함 소리를 피해

담장 밖 나무 위에서 어둠의 묘혈을 파던

그의 등에서는 수많은 까마귀 떼가 소리 없이 울었다

이내 등은 딱정벌레마냥 굳어갔다

어제 나는 나무를 심었으나 오늘 나는 흔들리고 있다

사내의 일기장 속엔 수레국화가 눌려 있었다

밤이 이슥해서야 사내는

이끼 낀 석조 난간에 기대 골목을 돌아나온 오수를 바라본다

사내는 눈이 검푸르고 귓바퀴가 크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바람에 펄럭거렸을 귓바퀴

사내의 귓바퀴를 만지자 내게도 바람이 만져진다

바람의 등허리는 딱딱하다

나는 귀가 컸지만 바람을 모으지는 못했지

바다로 갈 테야

사내가 강물 속으로 걸어가 오수를 삼킨다

내 그림자가 오수를 뒤집어쓰고

가로등 아래 빗방울이 금빛으로 소용돌이친다

또 하나의 세계가 검게 부풀고 있다

 

 

 

 

 

랭보는 오줌발이 짧았다

 

 

랭보는 탁상에 올라가 오줌을 갈겼다

지팡이를 목에 두르고 깃털을 머리에 꽂고

입술에 장미를 붙인 부르주아 예술가들

모두가 애송이라 코웃음쳤것다

랭보의 오줌발에는 가시가 돋아 있었다

가시는 입술에 머리에 목에 박혔다

그가 웃어제낄 때마다 지린내가 진동했다

열일곱 나이에 랭보는 예술을 알아버렸단 말이냐

그 속 빈 환상을

내가 랭보에게 반한 건 순전한 그의 오줌발

랭보의 오줌발이 삼 센티미터만 길었어도

파리는 살아 퍼덕거렸을까

랭보가 아프리카로 간 까닭을 알 것도 같았다

파리에서 보낸 한철, 그가 핥았던

베를렌의 탱탱한 엉덩이에서도 예술은 피어오르지 않았다

꽃이 피지 않는 엉덩이

울었다 랭보는

하늘 아래 어디에도 손잡을 이 없고

예술은 기우뚱 갸우뚱

찢어진 웃음에 감춰진 삐에로의 눈물을

단호하게 외면하는 거리

그의 몸은 바람의 식민지가 되었다

어쩌자고 파리를 버리고 지중해 태양과 뒹굴었을까

시와 맞바꾼 커피와 무기 그리고 썩어가는 무릎

구멍 난 바람을 신고 사라진 랭보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그리워했고

랭보의 오줌발이 버거울 즈음

놀리는 입술에 눌려 내 안의 랭보들이 퍼렇게 질려갔다

점차 희미하게 사라지기보다 한순간에 타 버리는 것이 낫지*

어둠 속 누군가가 광장 가운데에 섰다

바람에게 피와 살을 내어준 채

등뼈 하나로 곧추선 랭보

내 무릎 위에 그가 다시 앉았다

썩어가는 내 무릎에서 젖이 흘렀다

이 하얀 지옥불!

나는 도끼로 왼다리를 잘랐다

그때 일제히 핏기가 내 아랫도리에 몰렸다

오줌이 치솟았다

저 빛나는 오줌발

저 찬란한 타락

순간 내 눈이 밝아졌다

 

 

 

 

나는 바람을 고쳐 신는다

구두여

부디 내게 길을 가르치지 말아다오

 

* 커트 코베인의 유서 중에서 따옴

 

 

 

 

 

레우코클로리디움 파라독섬*

 

 

나도 몰랐지 내가 그렇게 재수 없는 놈이라는 걸

세상에 태어난 게 네 뜻이 아니듯

나 또한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

나는 몸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라고 말할게

이 세상에 당신 것이 어디 있냐고

물건을 훔치고도 당당하게 따지는 인도의 사두들처럼

네 속에 있는 나의 길은

새똥 묻은 풀밭 위의 식사로부터 시작됐지

살은 카스테라보다도 부드럽더군

할 수만 있다면 오랫동안 동거하고 싶었어

네 몸이 다하는 날 나도 기꺼이 눈을 감겠다고

또 하나 뛰어넘어야 할 산이 가로막혀 있어

새 내장에 들어가 알을 낳아야만 하다니, 젠장

가끔씩 제비나비가 되는 꿈을 꾸곤 해

하얀 나비 사이를 나풀거리는 우아한 날갯짓을

알다시피 가진 거라곤 주름진 몸과 새를 속이는 기술 한 가지

네 더듬이를 키 삼아 하늘과 땅 사이를 오르내릴게

힘껏 배밀이를 하려무나

새들은 널 쪼아 먹을 거야

자, 나비처럼 더듬이를 팔랑거려 봐

마음을 네 몸에 서서히 맡기렴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이 새로운 죽음을 슬고

관계는 또 관계를 낳고

 

* 달팽이의 흡충. 새의 먹이가 되도록 달팽이의 뇌를 조종한다고 함

 

 

 

 

 

증오를 위한 변명

 

 

내 내력의 무게는 48.9킬로그램

연민 29킬로그램과 눈물 11킬로그램, 희생 5.2킬로그램과 인내 3킬로그램

그리고 증오 0.7킬로그램으로 만들어진 거푸집이다

복숭아뼈 속에 연민이 웅크리고 늑골마다 슬픔이 가로눕고

광대뼈는 희생으로 볼록하고 엉치뼈에는 인내를 달고 다녔다

뼈들은 얼기설기 집을 만들었다

감기몸살로 누운 지 사흘째

요즘 들어 때 없이 웃었고

마음 없는 말들을 지껄였다

햇귤에도 군침이 돌지 않는다 실은

몸을 지탱하고 있던 거푸집은 증오의 등뼈들

아버지는 서랍 속 집문서를 챙겨 능소화 여인과 여행을 떠났다

친구는 서랍 속 파레트와 물감을 훔쳐갔다

열네 살 때 난 만화를 그리고 싶었다

아버지 서랍은 남겨두세요 왜 매달리지 못했을까

내 꿈을 돌려줘 왜 말하지 못했을까

0.7킬로그램의 증오를 밀치고

29킬로그램의 연민이 들어앉을 때 나는 껍데기

몸은 아직 포용하기에는 무리다

더러운 놈, 등 돌린 친구에게 욕설을 퍼붓는다

아버지라뇨? 어림없어요

애면글면 제 종족을 퍼뜨리겠다는 듯

방가지똥은 찬서리에도 씨앗 달고 블록 틈새 붙박았다

일어나야겠다

나를 먹여주고 길렀던 이 환장할 증오

번식하라 나의 착한 씨앗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