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박성준 시인 - 애지 작품상 후보 10 본문
박성준(1986년 ~ )
서울시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동대학 대학원에 재학 중.
2009년 제9회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
2013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 수상
시집 《몰아 쓴 일기》(문학과 지성사 2012)
<1>-시커먼 공중아, 눈가를 지나치는 혼돈 같은 교감아/박성준-
창; 꿈의 건조를 위하여
창문을 열고 혀를 내민다
사랑하는 입술이 입술로부터 넘쳐, 입술밖에 없는 얼굴
입술 바깥에만 있던 얼굴
얼굴을 열어야 했다, 사랑도 없이
내 혀는 늘 실망을 대비하기 위해
젖어 있었지만
나에게 실망한 나는, 착해 본 적이 없어
혓바늘을 스치며 바람이 빳빳해진다
햇빛도 없이 자라 온 살갗의 안쪽은
붉고, 하얗고, 마른 혀에 깃든 체중
혀는 돌처럼 중력에 의해 떨어져야만 하지만
그 깊이는
참 부드럽고 무의미한 꿈
전체에서 떨어져 나온 부분의 깊이를
때론, 믿어야 할 때가 있다
돌 속에는 저마다 경험하지 못한 꿈이 있고
물이 있고, 뒤틀린 우주가 있다
내 혀는 말을 배우는 아픔으로 다시 돌아가
무엇 때문에
휘파람을 돕는가
바람이 분다, 거역할 수 없다, 일생이여,
음악의 처음은 울음이었고
울음의 처음은 짐승이었으니
말을 지배하기 위해
내 혀는 음악이 되기 전, 짐승일 필요가 있었다
창; 청춘 온도
아찔하다
빨랫줄에 앉아 있던 검은 새가
부리에서 하얀 토사물을 뱉는다
두 발을 지상에 두기 전에 흐릿했던 그림자가
천천히 짙어지고
검은 새의 몸속에서 두근거렸던 선홍빛 내장들이 하얗게 식어 간다
울면서, 토하던, 몸의 것이
치약을 비틀어 짜놓은 것처럼 툭,
제 그림자마저 하얗게 뒤집어 놓는 꼴이란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하는 짓
새는 팔이 없고, 누나는 말이 없고, 나는
망가진 얼굴에 연고를 발라 주는 누나 옆에 있었다
눈꺼풀을 비비면 따갑게
불빛을 따라 기어다니던 벌레들이 있는 힘껏
몸을 뒤집어 하혈을 하곤 했다
누나의 무명지에 묻은 하얀 햇빛이 내 얼굴에 와 닿아
없어져 번들거릴 때까지
구름은 누나의 옥탑 위로 몰려왔다 몰려가고
꽉 잠가버릴 수 없는 피의 뜨거움이란
대체, 알 수 없는 그리움에 바람이나 털어놓으면서
나는 손가락 때문에 앓고 있었다
단지, 검은 새가 날아간 자리
빨랫줄이 흔들린다
흰 그림자에 남아 있던 공중의 멀미 위로
뜨끈한 김이 올라온다
부어오른 내 얼굴은 구름과 구름 사이에 있었다
창; 검은 방정식
하늘길에 살았다
전봇대는 계단 정중앙에 기울어져 있다
전봇대가 있어야 할 곳에 계단을 만들 필요가 있었기에
계단을 사이에 두고 창문 달린 것들은, 불빛의 필요 있었기에
전봇대가 먼저일까, 계단이 먼저일까
집집마다 전선을 밀어 주느라
넘어질 수도 없는
하늘길에, 전봇대와 계단이 살았다
소년과 소녀는 가위 바위 보를 한다
계단을 한 칸씩 이동한다
비기지 않으면 서로 멀어져야만 하는 관계
이런 규칙을 누가 만들었을까
누가 내다버린 욕조를 내 욕실로 가져오고 싶은
이런 마음은, 내 욕실이 만들었을까, 육신이 만들었을까
지긋지긋한 스무 살은
옛 애인들의 기념일을 외우느라 바쁘고
기념할 일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나는
고백 같은 건 할 줄도 모르는 사람
처음 내 이름을 베껴 그린 날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불을 끄고 방 안에 누워 있으면
내가 이 방에 그늘이 된 느낌
방바닥 밑, 저 깊이 돌아다니는 수맥들과 정들어
잠도 이룰 수 없는, 하늘길에 살았다
남몰래 어른 되고 싶었다
나는 대체로 비기고 싶었다
창; 매혹의 시대
고개를 난간에 내민다
무엇으로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면
그 무엇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감각의 식민지 속으로 두서없이
바람만 피운다
담배나 분다
나는 말을 배우기 싫은, 모르는 혀로 돌아가서
노래를 모르는 새처럼 운다
공중의 뼈 속으로 금이 들고 있다
<2>-후련한 수련/박성준-
항상 얼굴의 북쪽에서만 키스를 하겠소
한 무리의 싱거움을 조롱하고 가는 입김
수련의 속내가 태양의 뿌리를 흔들며 연못을 개봉하고
가라앉은 얼굴을 꺼내 봉인해온 말을 터뜨리면
자꾸 모르는 이름만 가시를 쥐고서 여름을 방문하고 있소
아침이 될 때까지 몸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
헤매는 춤의 하소연이란
애인의 소란스러운 울음을 감싸 안을 때처럼
반짝이는 빈틈으로 여기에 거울을 깨고 있소
모르는 말이 건너오는 동안
바늘을 쥐고 삼베처럼 웃으며 깊은 혀를 꾹 다문 수련
저기 후련하게 수련이 물을 쥐고 솟아 있소
물속을 듣던 바위의 귀는 오래오래 초록을 껴안고
시시때때 하얀 발톱들은 잇몸 근처에서 자라나오
어쩌자고 물속에는 찡그린 미간들이 그리도 많아
물의 어깨를 비튼단 말이오, 비바람과 수련이 키스를 나누는 동안
저 부력은 감은 눈꺼풀에서 풀려 나오는 힘
눈을 감고 응결하는 입술과 입술들의 향연
빗줄기의 청력이 허공과 연못을 꿰매고 있소
서로가 서로에게 눈이 없어 몰라도 좋을 얼굴, 그저 묻고 있소
향기로 취미를 가진 우울한 표정들이여, 꺼져가는 물속의 핏빛을 보오
뚝 터진 엄지에서 연못을 향해 배어 나오는
개봉된 허공의 저 피를 보시오
<3>-몸에 占을 갖고 싶은 새들/박성준-
새는 알을 깨고 나오기 전까지
그림자를 갖지 못한다
척추에는 공터가 가득하고 내장에 든 바람에게는 발목이 없다 날아가면서 말을 가진다는 것은
허공에서 만들어진 근육으로 의사를 교환하는 일
날갯죽지에 쌓아둔 말은 늘 건강하고
새는 이동함으로써 함구한다
새는 그 선천성부터가 감각뿐이라, 알을 낳고 배설하는 사건만으로도 살아 있다
(간혹 어떤 새는 말 대신 토하고 싶은 속성도 있다)
새는 나는 동안에만 그림자를 갖지만
새의 그림자는 날아가지 못한다
<4>-내일/박성준-
감염된 사람들은 결정을 서둘렀다 왼쪽으로 울렁거리는 혀와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입술에서 뜻하지 않게 뜻이 흘러나왔다 이것이 당신의 뜻입니까 당신의 의지입니까 누군가 질문을 했지만 질문은 묵살되었고 곧 이어 노래가 시작되었다 찬양할 신이 없었고 허락된 예감이 없었다
감염된 사람들은 모래보다 얼굴이 더 많았고 나무보다 신성했으며 바람보다 더 많은 돌들을 감추고 있었다
이제 불이 필요했다 불은 뜻이었고 불은 질문이자 대답이었다 뜻밖에도 우리는 우리가 필요했다고, 우리는 우리에게 말을 서둘러 저질렀다 감염된 청중들은 귀가 녹았고 함성 속에서 머리가 없는 아이들이 파랗게 기어나왔다 다 병균들이었다
말이, 말이 없는 자살을 시작하자 아무도 누가 죽은 것에 대해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뜻을 보지 않으려고 일제히 눈을 감았고 이제 뜻이 없는 곳에서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저 없이 우리는 그곳을 꿈이나 혁명 따위로 바꿔 부르며 감염 속에서 달려 나갔다 변종이었고 변화였고 다시 또 감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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