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시인 이화은 본문
적막한 동행 / 이화은
학교 갔다 돌아오니 집에 엄마는 없고
아무도 없고
빨래를 널다 말고 엄마는 급히 어딜 가신 걸까
장독대 위에도 양은 대야 속에도
햇볕만 소복소복 고봉으로 담겨 배는 더 고프고
마루 끝에서 얼핏 잠이 들었던가
한 숨 푹 잤던 것일까
눈을 떠야 하는데
눈을 떠도 엄마가 없으면 어쩌나
홑이불 같은 적막을 덮고
그 희고 가벼운 무게에 눌려 나는
시체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는데
그때 내가 후다닥 일어났으면
엄마를 크게 불러 그 섬뜩한 예감 같은
적막의 중심을 깨뜨려야 했는데
시절은 몇백 리나 흘러가 버린 걸까
엄마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널다 만 빨래는 똬리를 풀지 않는데
적막만 저 혼자 늙어
젖은 솜이불처럼 무거운 몸을 곁에 누이네
톡·톡·톡․
자위하듯 제 몸을 터뜨리던 봉숭아의 붉은 여름 한낮을
도둑처럼 눈 감고 함께 엿들었으니
그 기억 하나로 우리 너무 오래 걸었네
그러나 어쩌랴
매정하게 돌아서기엔 저 적막도 지치고 병들었으니
아픈 손바닥으로 아픈 이마를 짚으며
겨우, 한낮에서 한밤중까지 왔네
이화은
shyihe@unitel.co.kr / 1991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이 시대의 이별법》 《나 없는 내 방에 전화를 건다》 《절정을 복사하다》가 있다. 시와시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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