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박소란 시인 - 애지 작품상 후보 1 본문

한국의 시인들

박소란 시인 - 애지 작품상 후보 1

연안 燕安 2014. 9. 3. 00:19

 

   

 

아이를 죽이는 ‘그늘의 정부’

    
   
‘그늘의 정부(情婦)’인 박소란을 추천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발성과 화법이 나와 다르다는 것. 어딘지 모르게 활달한 진술을 따라가는 재미를 음미하다가 의미를 잃어버리고, 다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 그래도 의미는 도망가고 그냥 어두운 감각으로만 남아 있다는 것 때문이다.

이것이 박소란의 개성이라면 개성이겠다. 길가의 우체통을 들여다보다가 짐승의 아가리처럼 깊고 어두운 곳을 상상하는 것. 이런 우체통이 주소가 없는 주거부정의 내 삶을 개관하고 있다는 것을 개관한다는 것. 우체통 같은 사물들이 나를 개관하는 방식이 어둡다는 것이. 
 
집이 없고, 울음이 없고, 컹컹 짓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 자아는 물컹한 슬픔이 솟아나는 베개, 우울의 밤이 사생한 유령처럼 흐느끼는 베개를 베고 뺨이 촉촉이 젖어서 잔다. 곁에서 등을 돌리고 자는 세계와 자아가 만나 낯빛이 아득한 새끼를 낳고, 그 아이를 다시 죽이는 슬픈 시인이기 때문이다.
                                                                                           (박소란 신작특집-본문 64~71페이지)

 

공광규(시인, 본지 편집위원)

 

 

오늘 밤 곤히 잠든 형제의 귓가에 나는 간신히 속삭일 것이다. 내가 어떤 수사나 기교를 부를 때 그것은 오직 아픔을 아픔으로 단단히 덧칠하기 위한 것임을. 그런 하찮은 수작에 지나지 않음을. 이런 건 시가 아닐 것이다. 시의 본령과는 멀리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다, 시여, 내가 믿는 유일한 형제여. 반성을 모르는 나는 이만 할 말이 없다. 미안하다는 말밖에.

 

박소란 시인은……

● 1981년 서울 출생.
●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 2009년 《문학수첩》으로 등단.

 

 

| 신작특집 |

 

 

 

없다

 

우체통을 들여다본다 
길들여지지 못한 짐승의 아가리처럼 깊고 어둔 곳
어떻게 알았을까 당신은
이곳에 주소가 없다는 것을

집이 없다는 것을
상기된 표정으로 커튼을 열어젖히는 얼굴이
발갛게 피어나는 식탁이 풋잠을 머금은 나릿한 하품이
없다는 것을 벌써 오래 전
아침은 이곳으로 오는 길을 잃었다는 것을

밤의 우체통을 들여다본다
주린 속 깊숙이 손을 찔러 본다
짐승은 파르르 떠는
또 다른 짐승의 야윈 손을 물고 놓아주지 않는다
짓궂은 장난 같은 차가운
피, 피가 흐르고

당신은 어떻게 알았을까
울음이 없다는 것을
컹컹 짖는 법을 나는 배운 적이 없다는 것을

오랜 침묵의 우체부인 당신은 어떻게
어떻게 알았을까

 

 

 

 

베개


물컹한 슬픔이 솟아난다 언제부턴가 
우울의 밤이 사생한 유령처럼 흐느끼는 베개
그 차가운 몸에 슬며시 가져다 댄 뺨마저 축축이 젖어든다

도대체 왜,  
물어도 베개는 말이 없고
다그칠수록 구겨진 입술만 앙다문다

무성한 어둠은 베개를 더욱 짓누르고

불을 켜고 싶은데
베개 너머 손을 뻗어 스탠드의 버튼을 누르고만 싶은데
그만 둬, 낮은 음성으로 베개는 말한다 오래 흐느낀 베개는
알고 있는 것이다  
너라는 빈난한 빛이 얼마나 무섭게 어둠을 살찌울 것인지

연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이 솟아난다
말간 얼굴로
곁에 잠든 이는 아무렇지 않게 등을 돌리고

베개를 베다, 라는 말이 베이다, 라는 말처럼
저미는 것임을 
베개가 가르쳐 준다.

 

 

 

 

애드리브


괜찮다를 연기했다
어느 것 하나 괜찮지 않았는데

너는 늘 너무 빠른 걸음으로 무대를 빠져나갔지

혼자 남아 덩그러니 핀라이트를 받고 선
괜찮다, 오오
 
이건 극(劇)이 아닌데
내가 나라는 이름의 배우가 아니듯이

그러면서 한참을 연기했다
괜찮다를
괜찮다의 굳센 의붓딸인 나를

그 누구도 돌보지 않은 사소한 독백

괜찮다, 괜찮다, 하면
정말 다 괜찮아질 줄 알았다.

 

 

 

 

내연


나는 저 그늘의 정부(情婦)
낯빛이 아득한 한 마리 새끼를 낳고 싶었지 

세상의 지붕 위로 둥글게 일렁이는 빛들 노래들
시시때때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게울 때
훈풍으로 몸이 부푼 새들 저마다 모여 다정을 탕진할 때
 
아가야 아가야 내 귀여운 아가야
어서 빨리 오너라
네 차가운 피로 내 달뜬 눈을 멀게 해 다오

배는 돌산처럼 뾰족이 솟아오르고
꾸역꾸역 나는 입덧을 하지 도대체 왜 
깨진 돌을 씹는 기분이야
꼬리를 뜯어먹고 허기를 달래는 자세야 아랑곳없이

세상 가득 일렁이는 빛들 노래들
저마다 모여 다정을 탕진할 때
다정 아닌 것들 다정을 기웃거리며 몇 가닥 식은 웃음을 집어삼킬 때, 아아 나는 
 
늙고 병든 애인을 배반하고서 마침내
타락한 여인네처럼
새끼를 죽인 슬픈 어미처럼.

 

 

 

 

크리스마스
                                                

초인종이 울린다 먼 나라의 캐럴처럼
낯선 포즈로, 나는
이 문을 열지 않을 것이다

볕이 들지 않는 방
손목이 시큰거릴 때까지 휘갈긴 편지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서
겨울은 참을성 있게 늙고 나날은 고요히 검다, 고
썼다 지웠다 또
쓰는 동안
심장은 얼음처럼 단단해진다 아주 우연히
녹기 전까지

초인종이 울린다
누구인가 당신은
물어도 말없이 한 마디 더듬대는 슬픔도 없이
나는 당신을 모른다
그리움을 모르듯이

이 문을 열지 않을 것이다

문 앞에 귀를 대고 잠시 휘청일 뿐 캐럴이
울려 퍼진다
급기야 고꾸라지듯
꽉 쥔 주먹 살눈이 녹듯 아주 우연히
문이, 문이 열리면

썰매를 끌고 황급히 달아나는
어느 붉은 뒷모습

 

 

 

 

| 시인의 시론 |

 

고장 난 손


찌개가 끓고 있었다. 너무 오래 끓여 시커멓게 눌은 냄비가 있었다. 어떤 연유로 찌개는 그토록 쉼 없이 끓고 또 끓었어야 했는지 모른다. 다만 나는 엉망으로 취했고, 마주 앉은 당신 앞에 국물을 뜬 숟가락만 들이밀고 있었다는 것. 숟가락 위에서 멋대로 찰박거리던 국물은 반듯한 테이블 위에 흉한 얼룩을 만들었다는 것. 당신 그 점잖은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하고 무안해진 나는 애꿎은 숟가락만, 뜨거운 국물만 후후 불어대느라 정신을 다 쏟고 말았다. 고단했을 당신에게 따뜻한 국 한 그릇 먹이고 싶었던 건데. 바깥바람이 차서 나도 조금 외로웠다고, 잠시 온기를 나누려 했을 뿐인데. 기어이 외면하던 그 밤의 당신을 나는 두고두고 원망했다. 

시는 이따금 나를 그때 그 자리로 데리고 간다. 벌써 식당은 어둡고, 사람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당신이 앉았던 곳 빈 테이블 앞에서 나는 뒤늦게 눈물을 쏟는다. 늘 웃는 얼굴만을 연습하곤 했는데. 여기에서는 잠시 울어도 좋다고, 엄살을 좀 부려도 괜찮다고, 곁에서 다독이는 연년생 형제 같다, 시는. 안쓰러운 표정을 짓기도, 말없이 등을 어루만져주기도 해서 나는 곧장 어린 짐승처럼 순해진다. 그렇게 울다 고개를 들면 텅 빈 세상이 괜스레 따뜻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커튼을 젖혀 바깥 풍경을 내다보고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이대로 영영 울음을 그칠 수 없다면. 당신을 향한 이 지난한 울음을.  

어쩌면 그 밤 내가 당신 면전에 내민 것은 숟가락이 아닌 칼이었을까. 결국 그 칼로 당신을 찔렀고, 그래서 당신은 견딜 수 없었을까. 나 역시 이토록 아픈 것일까. 그냥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 처음부터 나는 아파서 혹은 더 아프기 위해 당신을 찾았다고. 아무도 원치 않는 찌개를 끓이고, 고개를 돌리는 당신을 향해 준비된 칼을 들었다고. 나와 당신, 우리에게 영영 아물지 않는 상처를 주고 싶었다고. 이 불온한 자백 앞에 내 다정한 형제는 여전히 곁에서 나를 보듬어 줄 것인가. 아니다, 아마도 아닐 것이다. 간절함이라는 이유로 세상의 모든 울음이 시의 품에 들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당신을 향한 내 아찔한 마음이 기어코 사랑은 아니듯이. 그렇다면 무엇인가, 나의 울음은. 생각을 거듭해도 알 수가 없다. 알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오늘 밤 곤히 잠든 형제의 귓가에 나는 간신히 속삭일 것이다. 내가 어떤 수사나 기교를 부를 때 그것은 오직 아픔을 아픔으로 단단히 덧칠하기 위한 것임을. 그런 하찮은 수작에 지나지 않음을. 이런 건 시가 아닐 것이다. 시의 본령과는 멀리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다, 시여, 내가 믿는 유일한 형제여. 반성을 모르는 나는 이만 할 말이 없다. 미안하다는 말밖에. 내게는 이제 너를 실망시키는 일만 남았구나. 

찌개가 끓는다. 해로운 건더기가 붉은 물속을 흐느적거린다. 눈이 맵다. 당신은 알고 있나. 국물을 휘젓는 이 고장 난 손을 나는 지금 멈출 수가 없다.

 

'한국의 시인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성해  (0) 2014.09.13
최금진  (0) 2014.09.09
김은주 시인 - 애지 작품상 후보 2  (0) 2014.09.03
박강 시인 - 애지 작품상 후보 3  (0) 2014.09.03
이이체 시인 - 애지 작품상 후보 4  (0) 2014.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