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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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최서림

연안 燕安 2014. 9. 23. 06:48

최서림 시인

1956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및 같은 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으며, 1993년 『현대시』를 통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이서국으로 들어가다』 『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 『세상의 가시를 더듬다』 『구멍』 『물금』 등이 있고, 시론집으로 『말의 혀』가 있다.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시인의 탄생

 -서울 풍경 44

 

 

내 아내가 초등 1학년 때 광안리서

톰 소여랑 놀 때

청도서 나는 글자도 몰랐다.

내 아내가 마크 트웨인, 빅터 위고랑 여름을 피할 때

나는 붕어, 피라미, 물새알과 더불어

개천에서 방학을 홀라당 까먹었다.

 

서울 올라와 내 아내는 밤샘하는 카피라이터가 되고

나 역시 먼 길을 돌고 돌아 밤을 지새우는 시인이 되었다.

 

나를 시인으로 만든 것은 눈 내리는 겨울밤이 아니다.

아마릴리스 같은 여자와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키스가 아니다.

그녀의 머리칼에 떨어지던 윤중로의 벚꽃도 아니다.

공룡 같은 대학도 고라타분한 시론 강의도 아니다.

국민소득 2만 불도 아니다. OECD도 아니다.

 

나를 시인으로 키운 건

초등학교도 못 나온 내 아버지와 어머니다.

나를 들판의 망아지처럼 풀어놓은 아버지와 어머니다.

나를 찔레 같은 시인으로 단련시킨 건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청춘의 분노와 좌절, 패배주의

긴장되고 졸아있던 방위병 생활, 5.18

서울의 봄, 최루탄, 마르크스, 성경, 촛불

중이염, 페니실린 쇼크, 짝사랑과 반복된 이별

불면증, 노숙, 지하방이다.

 

나를 무늬만 시인으로 만들지 않는 것은

아내의 끊이지 않는 잔소리와 걱정이다.

이 땅에서 먹고 살아남기의 문제이다.

미친 전세 값, 학원비, 큰 아이 대입, 노후 걱정이다.

 

 

 

- 2014년 <애지> 여름호

 

 

 

 

 

 

시인

                 

 

詩는 가시 같은 것

세상의 가시를 더듬다

스스로 가시가 되는 사람

목구멍으로 가시를 토해내다 막혀

눈알이 불거지도록

온몸으로 가시가 삐죽삐죽 비집고 나온다

 

시는 밥통 속에 식은 음식물 같은 것

복통 때문에

게워낸 토사물 같은 것

애써 빙 둘러서 피해 가고픈 것

불편한 진실 같은 것

 

때론 오물을 씻어내고 삭여주는 비와 바람

때론 가시를 밟고 가게 하는 부드러운 힘

말랑말랑한 말의 혀

순한 피를 가진 것

 

무수히 찔리며

구멍을 키워온 말

말의 푸른 이파리를 뜯어먹으며

둥근 구멍의 힘으로

가시를 뭉그러뜨리는 사람이 있다

 

 

 

 

 

잠들지 못하는 말  

 


모든 말에는 피가 흐른다
말(馬)같이 펄펄 날뛰는 말
시체 같이 굳어 있는 말
말에는 근육이 있고
206개의 뼈가 있다모든 말에는 소금이 녹아 흐른다
살아온 밀도만큼 흐른다
사랑한 농도만큼 흐른다
젓갈 같이 썩지 않는 말
스스로 부패해서 버려져 밟히는 말
말에는 염통이 있고
10미터 길이의 소장이 있다능금아, 부르면 능금에 살이 차오르는 말
능금아, 부르면 능금이 떨어지고 마는 말독 오른 말에 찔려 죽어가는 자들,
소뿔 속같이 비좁은 꿈에 절어 모두가 잠든 새벽
아직 돌아갈 구멍을 찾지 못한 겨울 귀뚜라미처럼
우, 우, 잠들지 못하고 우리의 뼈를 흔들어 깨우는
하늘 끝에다 사무치는 말도 있다
때로는 제 혼을 불살라
하늘 밖으로까지 올라가 새로이
붉은 별자리를 만들어 앉는 말도 있다
핏방울이 되어 떨어지는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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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과 감상> 

   이 말의 힘이란 죽은 혼도 다시 깨운다고 하지 않던가. 이 시로 하여 각성해야 하리라. 생각없이 툭툭 던지는 모든 말들의 살아있는 에너지, 그것으로 하여 구업(口業)이 되기도 하고 선업(善業)이 되기도 하는 것, 동물인 말(馬)와 언어의 말은 동음이의어이지만 살아있는 파워다. 또한 말이란 세상에 대한 주문이 된다고 이시는 말한다. 무심코 던진 말의 칼날에 의해 낙망한 자는 또 몇이 되겠는가. 그러니 어떻게 함부로 무책임한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되도록 천천히 생각하고 천천히 타인을 살펴 자신의 인격을 정성껏 담아내야 할 말부림이야말로 삶의 大道에 다름 아님을 새겨보아야 할 것이리. 
   최서림 시인은 경북 청도 출생.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수여. 1993년《현대시》로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이서국으로 들어가다』,『구멍』등. 시론집으로『말의 혀』, 저서로『한국현대사와 동양적 생명사상』,『서정시와 미메시스』및 다수가 있으며, 서울산업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


                                                                                                           <신지혜 시인>

 

 

입동(立冬) 지나 

 

 
 
 

호지 같은 햇살이 노루꼬리보다 짧다

마음에 혈관이 막혀 비쩍 마른 미루나무 꼭대기

겨울 까치 한 쌍, 삭정이 물고 들어온다

질경이가 도랑물에 아린 발가락 길게 뻗치고 있다

내 안의 디룩디룩 살찐 말들, 기름기 빠지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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