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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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개간)

[스크랩] 세 시인의 내면에 맺힌 하나의 세상 풍경 읽기/차민기

연안 燕安 2014. 4. 28. 08:30

세 시인의 내면에 맺힌 하나의 세상 풍경 읽기
―김려, 김재기, 이세진의 시편들

                                                                                     차민기

 


   #. 시인의 내면에 빚어지는 세계
   언어는 인간의 내부생활을 창조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대상화하여 인식하게 한다. 이는 인간이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 ‘자아’를 인식하고 그를 바탕으로 ‘세상’과 관계 맺어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세계의 자아화’로 규정되는 시 갈래의 경우, 한 시인이 쓰는 시어들의 조합을 통해 그 시인의 됨됨이를 헤아려보는 일은, 이런 점에서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다만, 무수한 세계들을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창작 주체가 겪었을 다양한 삶의 맥락들은 읽는 이의 그것과 사뭇 다를 것이기에, 몇 편의 작품들만으로 그 시인의 됨됨이를 풀어내는 일은 언제나 조심스럽고 또 그래야만 한다.
   이번에 건네받은 세 사람의 각 시편들은 그 내면을 엿보기엔 작품 수에서 턱없이 부족한 감이 있고, 또 문단 안팎의 수소문으로도 시인의 이야기를 듣기 힘든 일이어서 생각을 풀어내는 일이 더디고 또 그만큼 조심스러웠다. 이 글이 시인의 면면을 먼저 드러내지 못하고, 시어와 시어, 시행과 시행들이 만나고 떨어지는 자리에만 머물러 씌어진 것은 그런 까닭이다.

 

   #. 외로운 목숨들끼리―김 려, 「등대로 간 아이」 외 4편
   김려의 작품들은 「등대로 간 아이」부터 「섬에 서서」, 「아무개」, 「초록에 흔들리다」, 「이응은 즐거워」까지 모두 다섯 편이다. 이들 가운데 「이응은 즐거워」를 되뇌는 일은 모처럼 시를 읊조리는 즐거움을 전해주었다. ‘ㅇ’이라는 하나의 음운만으로 일구어낸 시인의 운율감각은 이런 류의 다른 작품을 더 청해 읊어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모든 말에 ‘ㅇ’을 붙여봐요
   낱말들이 둥근 바퀴를 달고 달려나와요
   비눗방울 같은 이응이 콧속을 간질이고
   머릿속 물방울을 터뜨려요
   웃음을 만들어요
   붕 붕 붕
   떠다니는 이응은 사다리가 없어도
   얼마든지 하늘에 별이 되어요
   앙앙거리던 아이들
   용용 놀려대던 꼬마들 모두
               ―「이응은 즐거워」 부분

 

   ‘ㅇ’의 형태적 상상력이 모든 활자들에 운동성을 부여해준다. 그것들은 “바퀴를 달고” 수평으로 달리는가 하면, “비눗방울”처럼 부풀어 수직으로 “붕 붕 붕” 떠오르기도 한다. “붕 붕 붕”, “앙앙”, “용용”, “퐁당퐁당”, “응/응/응”들과 같이 ‘ㅇ’을 매단 음절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무한한 상상력으로 확장된다. 그 확장된 상상의 공간 안에서 떠올리는 유년의 한때는 마냥 즐겁다. ‘ㅇ’이 만들어주는 힘이다.
   운율은 이처럼 아주 경제적으로 시적 미학을 성취해낸다. 예로부터 ‘운율’은 우리 전통시가의 핵심이었다. 한문학을 바탕으로 형성된 고전시가, 특히 한시의 경우엔 중국의 한문이 지닌 성조(사성법: 평성, 상성, 거성, 입성)의 율격에 기대는 바가 크다. 성조가 드러내는 고저 율격은 시조에 이르러 음절과 음절의 장단 율격과 결합하여 입체적인 운율감을 형성해내는데, 그 좋은 본보기가 시조창이라 할 수 있다. 훈민정음이 처음 만들어져 보급되기 시작했을 때는 한글 자체에 중국의 성조법과 똑같은 사성법이 적용되었다. 따라서 한글로 씌어지고 불려진 시조의 경우엔 그 자체에 수직적 운율(성조법)과 수평적 운율(음수율, 음보율)이 한데 어우러져, 읽히기보다는 읊조리기에 적합한 갈래였다.
   서구문학의 영향을 크게 받은 바 있는 근대기의 한국문학이, 운율을 버리고 기교로만 치달은 탓에 오늘날 우리 시가의 고유한 전통이라 할 수 있는 운율은 낡고 촌스러운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서구 영미시의 경우 음운 자체에 운율(억양)이 있고 시행에 각운을 배치하고 있기 때문에, 운율은 서양시와 우리의 전통시가가 지닌 공통된 속성이었다. 그럼에도 우리 근대시는 서구 영미시의 형식 일부만을 모방해 형식의 제약을 벗어나는 데 주력했고, 그로 인해 수백 년 동안 이 땅에서 자연발생적으로 길러진 선조들의 고유한 운율감각을 스스로 지워버리고 만 셈이다. 시 쓰는 이들이 바로 알아야 할 일이고, 그리하여 스스로 운율을 다듬어야 할 일이다.
   ‘ㅇ’으로 즐거웠던 시적 감흥은 김려의 또 다른 시 「아무개」를 읽는 동안 다소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아무개’로 익명화된 ‘나’의 시선은 내 몸 밖에 존재하며 무수한 아무개들을 시 안으로 불러오고 있다. 대량복제된 판박이들처럼 여기저기 아무 데서나 목격되는 사람들. 그것은 ‘나’이기도 하고 ‘너’이기도 하다. 실존의 이름으로 불리는 일이 오히려 더 피곤해져버린 세상.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아무개’라는 이름의 보통명사로 존재하고 싶을 따름이다.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김춘수, 「꽃」)주더라도 절대 나서지 않는 익명의 섬처럼 ‘아무개’로 둥둥 떠다니고 싶을 뿐.
   그러나 인간은 무리동물의 본성이 여전한 개체여서 근원적 외로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길을 가다 “신호등 앞에서 갑자기 섬처럼 외로워”지는 것도 이 몹쓸 근원적 외로움 때문이다.

 

   교통섬이라니
   신호등 앞에서 갑자기 섬처럼 외로워졌어
   …중략…
   난 갇혀버렸어 언제나
   그 너머가 무서워

 

   가끔씩 섬이 되는 때가 있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은 이국의 말이 아니라
   저희끼리만 하는 말
   …중략…
   아무도 손 내밀지 않아
   지도에 없는 섬, 등대조차 없는 그래도
   어두운 하늘을 자주 바라보는 것은
   오래된 습관이야
                        ―「섬에 서서」 부분

 

   이 몹쓸 외로움의 풍경은 「이응은 즐거워」를 뺀 나머지 네 작품들의 공통분모로 놓을 수도 있다. “20일째 전기가 끊어진 섬”은 “뱃길”도 지워져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유폐 공간이다. “별빛과 파도소리만” “철썩거리는” 섬의 밤 풍경은 “텅 빈 운동장처럼 크고 깊었고”, “할머니의 숨소리만 갈매기처럼 떠다니”던 밤에 “아이는 자주 잠을” 깬다. 그리고 “커다랗게 엄마의 얼굴을 그려 붙”인 벽에서 “날마다 바람이” 우는 소리를 듣는다(이상 「등대로 간 아이」). 그 울음조차도 밤바다를 건너지 못하는 저 너머 뭍에서, 일곱 살 아이의 엄마 일상이 어떠할지는 쉽게 짐작할 만한 일이다. 그래서 “다시 바닷길이” 열리기를 바라며 “푸른 물에 발목을 적시며/바다 깊이 들어갈”(「섬에 서서」) 다짐을 하는 이는 이 아이의 엄마로 치환될 수도 있다.
   「초록에 흔들리다」는 육신의 한쪽이 무너진 노인에게 초점을 두었다. “낯선 이들과 부르는 노래 같은 바람,/대화는 전달되지 않”고, “낱낱이 흩어지는 밥풀처럼 발아래 쌓여”가는 “초록”의 빛무더기들. 그리고 그것들은 “흰 꽃무덤”으로 형상화되어 이어진다.
그러나 이들 작품들이 그러한 외로움의 문제를 포착하고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인 나름의 해결책을 모색하고 그것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려 했다는 점에서 이 시인의 만만치 않은 시력(詩力)을 가늠해볼 수 있다. 「등대로 간 아이」에서는, 아이 스스로 불을 붙여 “별빛보다 밝은 불을 켜고” “등대”가 되어버린다는 극적 제시를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적극적인 몸부림을 보이고 있는가 하면, 「초록에 흔들리다」에서는 허물어진 몸을 이끌고도 “아이들이 흘리고 간 비린 땀 냄새”를 따라 “작은 신발자국 위로 한 걸음씩 옮기”는 노인의 모습을 통해 세대와 세대의 단절을 극복하려는 의미망들을 펼쳐내고 있다. 더구나 “세 끼 밥 챙겨 먹듯/매일 누군가를 걱정하는 노인의 눈”을 통해, 타인을 향하는 눈빛이 어떤 빛깔로 채색되어야 하는지를 반성하게 된다.

 

   #. ‘낡은 풍경화’속에서 걸어 나오기―김재기, 「고목에 꽃피다」 외 4편
   김재기의 작품들은 「아버지의 기차역」, 「고양이와 고양이」, 「저울에 오르다」, 「아내」, 「고목에 꽃피다」 이상 다섯 편이다. 이 다섯 편의 시들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을 동일인으로 설정하면 한 인간의 생을 재구성해볼 수 있다.
「아버지의 기차역」은 시간상 맨 앞자리에 놓을 만하다.

 

   오일장이 서면
   보따리장수들 수다와 담배 연기로 출렁이는
   시끌벅적한 시골 역
   낡은 풍경화 한 장을 펼쳐놓고
   산을 휘감고 달려온 철로를 바라본다

 

   …중략…

 

   이십 년의 추억을 열차에 싣고 떠나던 날
   붙잡는 목소리도
   흔들어주는 손도 없었다
   쓸쓸했던 유년의 추억, 사춘기의 방황을 내려놓은
   기차역은 점점 멀어져갔다
                     ―「아버지의 기차역」 부분

 

   “오일장이 서면/보따리장수들 수다와 담배 연기로 출렁이는/시끌벅적한 시골 역” 풍경이 “낡은 풍경화”처럼 눈에 선하다. 그 풍경들 속에 “오랜 지병에 조용히 눈을 감은 아버지”가 계신다. 아버지는 “창백한 얼굴 골 깊던 주름도 모두 사라”진 얼굴로 “훌쩍이는 나를 다독거리다/새벽이 오기 전 떠나가셨다.” ‘낡은 풍경화’ 저 너머로 아버지를 떠나보내듯 “쓸쓸했던 유년의 추억, 사춘기의 방황을 내려놓은”(「아버지의 기차역」) ‘나’는 퇴색한 도시의 밤거리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 “어미를 잃고” “낡은 자동차 그늘에 움츠린 새끼 고양이”가 밤이면 “가르릉 카악 카악” 날카롭게 송곳니를 드러내는 도시의 밤. ‘어미를 잃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움츠린 새끼 고양이’는 아비를 잃고 방황했던 ‘낡은 풍경화’ 속의 ‘나’를 투사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나’는 이 삭막한 도시 속에서 “집 없는 고양이들”처럼 “캄캄한 밤거리를 떠”돌지 않기 위해 “여린 사람의 얼굴에 슬며시/발톱을 내”밀며 살아왔는지도 모를 일이다(「고양이와 고양이」).
   그러나 그렇게 발톱을 세우며 살아오는 동안, 그 발톱의 뿌리가 내 안 깊숙이 자라고 있었음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 발톱의 뿌리에 찔린 ‘나’의 “불룩하던 배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나’는 그제야 “몸속의 공간이 작아진다는 것은/그만큼 희망이 줄어든다는 것”임을 깨닫는다. “식탐을” 위해, “포만감을” 위해, 나보다 여린 사람의 얼굴에 슬며시 드리우던 ‘나’의 발톱들을 그제야 거두어들인다. 그리하여 ‘체중계에 오르는 일’은 밖으로 향하던 나의 욕심들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가늠하는 엄정한 자기반성의 시간으로 체화(體化)된다. 쉼 없이 “오르락내리락,” “거센 파도처럼 출렁거”리던 ‘나’의 욕심들은 “잔잔한 밤바다”처럼 고요해지고, 비로소 ‘나’는 “뱃전에 일렁거리는 아침 햇살을 꿈”꿀 수 있는 포구로 향한다. 그러고 나서야 “더 이상 몸무게가 줄지 않으리라는” 확신에 이른다(「저울에 오르다」).
   ‘낡은 풍경화’속에서 걸어나와, ‘발톱을 세우며 살아야 했던 젊은 날의 한때’를 지나 “위벽 깊숙이/독버섯처럼 절망이 돋아”(「고양이와 고양이」)났던 그 순간에도 ‘나’의 곁에는 언제나 “세월에 기죽지 않고/꿈을 품고 사는” ‘아내’가 있다. “저녁노을에 황금빛 비늘 번뜩이며/강물 위에 뛰어오르는 잉어” 같은 여자다(「아내」). “흘러간 시간”을 ‘낡은 풍경화’로 추억하는 ‘나’(「아버지의 기차역」)와 달리, ‘아내’는 “흘러간 시간마저 잊고/히말라야에 가겠다고 춤추는 여자”다. 그런 ‘아내’ 곁에서 ‘나’도 가끔은 “세월을 숨”기고 싶었던지 “울긋불긋한 셔츠에” “스키니 팬츠”를 입고 “노란 줄무늬 헬멧과 검푸른 고글로” “눈부신 은빛 페달을 밟”아보는 도발적인 생을 경험해본다. 지금은 ‘낡은 풍경화’로 퇴색해버린 “젊은 한때의 꿈”들이 그 안에서 “알록달록 꽃 무더기”로 스쳐 지난다. “나이를 거슬러 힘차게 구르는 발”이 비록 마음을 따르지 못하고 “우당탕 꽝!”으로 끝나지만, 팔다리에 맺힌 핏방울마저도 “고목에 꽃”핀 것마냥 “멋져부”리기만한 생이다. 그래서 “갈대가 서걱거리는 길목에/쓰러진” 채 “빙글빙글 돌”아가는 “자전거의 뒷바퀴”마저도 허허롭기보다는 여유롭다. 날카롭게 발톱을 세웠던 젊은 생의 한때가 바퀴처럼 둥글게 모서리를 가라앉히고 “더위를 강바람에 식히”며 “빙글빙글 돌고 있다”(「고목에 꽃피다」). “지긋한 나이가” 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일일 것이다. 내 몸 안팎에 무수히 돋아난 모서리들을 꾹, 꾹, 눌러 앉히는 일. 그리하여 자전거 바퀴처럼 둥글어지는 일일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김재기 시인의 시편들은 한 사람의 생을 파편적으로 그려내 보이고 있다. 그 생의 파편들을 한데 이어붙이면, 유년기에서부터 노년기에 이르는 우리 생의 질곡을 목격할 수 있다. 그것은 과거를 살았던 우리 아비들의 모습이며, 또 그 아비의 나이만큼 세월을 겪고 있는 현재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할 터이다. 사람이 한 생을 살면서, 나보다 “여린 사람의 얼굴에 슬며시/발톱을 내미는” 일이 얼마나 몹쓸 짓이며 또 부질없는 짓인가를, 우리는 이 몇 편의 시들을 통해 다시금 확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소리로 어우러진 세상―이세진, 「귀향」 외 4편
   이세진의 작품은 「이명」, 「귀향」, 「항아리」, 「홍시」, 「슬픔 짐승의 꼬리」로 모두 다섯 편이다. 이 가운데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은 작품은 「홍시」였다.

 

   어느 절 뒷간에서 볼일 보고
   바닥에 떨어진 똥 닿는 소리 듣지 못했네
   삼 년이 지난 뒤
   이런저런 일로
   하룻밤 신세 진 시골 좁은 방
   선명하게 들리는 바닥 치는 소리
   어느 절 뒷간에서
   내가 눈 똥인 줄 알고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어보니
   환한 뒤란
   감나무 아래
   퍼질러 앉은 보름달 하나
                    ―「홍시」 전문

 

   그리 길지 않은 시행들 안에 팽팽한 시적 긴장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어느 절 뒷간”과 “하룻밤 신세 진 시골 좁은 방” 사이의 공간적 간격에, “삼 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이 보태져 한 체험과 한 체험을 입체적으로 떨어뜨려 놓았다. 그 아득한 시·공간의 간격 속에 포착되는 “바닥 치는 소리”가 읽는 이로 하여금 ‘아!’하는 탄성을 자아낸다. 이런 입체적 긴장은 시를 쓰는 이와 읽는 이 모두에게 시의 제 맛을 느끼게 해주는 요소이다. 더구나 “바닥 치는 소리”로 구체화된 또렷한 청각적 이미지가 “환한 뒤란”에 “퍼질러 앉은 보름달”의 시각적 이미지와 어우러짐으로써 시적 긴장을 한층 팽팽하게 끌어당기고 있다.
   청각적 이미지를 시상으로 펼친 또 하나의 시는 「이명」이다. 이명은 특정 주파수를 감지하는 대뇌 부위가 퇴화되거나 변성되어, 그 특정 주파수의 소리가 강조되거나 혹은 불필요한 소리를 감지하게 되는 질병이다. 「이명」의 시적 화자는 그 이명의 근원지를 “어느 비밀단체”로 설정한 뒤, 그곳으로부터 “파상으로 날아드는 그들만의 비밀 은어”라는 상상력을 펼친다. 시적 화자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는 그 비밀음파를, 시적 화자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수신하기 위해/두 귀를 곧추세워 주파수를 맞춘다”. 그리하여 화자는 자신의 “생은 언제나 알 수 없는 소리의 연속이었”음을 떠올리고, 그것으로 생이 즐겁기도 했고 괴롭기도 했음을 회고한다. 이 시의 화자가 지닌 ‘이명’의 체험이 만약 시인의 직접 체험이라고 한다면, 「이명」은 ‘온갖 소리들이 뒤엉킨 세상’에 대해 시인이 느끼는 환멸의 상상력이라 할 것이다.

 

   달도 없는 밤하늘
   길게 꼬리 늘이는 비행물체 하나
   허공을 가르며 우주로 사라지는데,
   나의 생은 언제나 알 수 없는 소리의 연속이었다
                  ―「이명」 부분

 

   “달도 없는 밤하늘”에 “허공을 가르며 우주로 사라지는” 비행물체처럼, 시인 또한 그 이명의 나날들로부터 사라지고 싶은 마음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나머지 시편들이 더듬고 있는 공간이 마치 음소거 된 정지화면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살펴볼 만하다.

 

   무명치마
   까만 물들여 입고
   엉덩이 푸지게
   이수근 화백의 그림처럼
   돌아앉은 내 어머니 같다

 

   줄줄이 가슴팍 파고드는 자식 위해
   마음속의 있는 것 없는 것
   퍼내고 비웠을 어머니 같은 빈 항아리

 

   기울어진 두 개의 귀
   소식 뜸한 자식 위해 열고 계신 것일까

  

   오늘은 처마 밑 양지쪽
   속 깊은 빈 항아리 하나
   먼지가 수북하다
                    ―「항아리」 전문

 

   앞서, 쉼 없는 울림으로 소란스럽던 「이명」에서의 풍경과는 대조적이다. 단색의 풍경 속에 이수근 화백의 그림이 겹쳐지면서 고향의 푸근한 감흥이 되새김되는 장면이다. 그 풍경 속 어머니의 모습은 비록 “기울어진 귀”일망정 “소식 뜸한 자식”을 향해 열려있다. 연로한 어미의 귀에도 어쩌면 오래전부터 이명이 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 소란스러운 이명들 속에서도 이 땅의 어머니들은 자식의 주파수를 가려듣는 무한 능력을 지닌 존재들이다. 비록 두 귀가 기울어지고 허물어져도, 자식을 위해 “마음속의 있는 것 없는 것”을 모두 “퍼내고 비웠”기에, 이 땅의 어머니들은 그렇게 텅 빈 온몸으로 자식의 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것이리라.
   이 시는 발상이나 혹은 표현적 차원에서 미학적 성취도가 그리 높은 작품이라 할 수는 없다. 전체 4연에 펼쳐진 대상에 대한 묘사 또한 ‘어머니’라는 대상으로 응집되는 밀도는 치밀하지 못하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이명」이나 또 다른 시들(「귀향」, 「슬픈 짐승의 꼬리」)과 나란히 엮어 읽으면, 시인의 정신세계가 어디를 향하는지 가늠해볼 만하다. 그곳은 “오염된 밤하늘 피해 떠나는 별들”이 “하나 둘 찾아가는 산골마을”(「귀향」)이기도 하고, “순해서 슬픈 짐승 황소”가 느릿느릿 “뱃속의 여물/되새김하는”(「슬픈 짐승의 꼬리」)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공간들은 시인의 지향점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도시의 온갖 소음들을 이명처럼 견뎌야 하는 우리 모두의 지향점일 수도 있다. 일찍이, 신라 최고의 문장가로 꼽혔던 최치원은 그의 시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에서 “늘 시비하는 소리 들릴까봐/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버”리고 그 안에서 생의 평온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우리 생은 그 시비하는 소리와 온전히 단절된 공간으로 찾아들 수 없다. 먹고 사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은 세상 어느 곳에나 ‘이명’과도 같은 소음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다만, 그 이명을 생의 한 몫으로 껴안고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하는 수밖에.

 

   #. 시작(詩作)의 몸가짐에 대하여
   가려 뽑은 작품의 수가 적을수록 그 작품들 간 시적 완성도의 간격은 크게 벌어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낱낱의 작품들이 각기 다른 세계를 담아내고 다른 주제들을 말하고자 한다 해도 그것들은 모두 시인이 포착한 세계를 시인의 내면으로 옮겨와 체화하는 것이기에 동일인의 시라고 한다면 그 질적 간격은 촘촘할 수밖에 없다. 그 촘촘한 간격을 위해 시인은 시구를 다듬고 시상을 정돈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자다. 그리하여 시인의 정신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요 우주 그 자체가 되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의 정신세계를 무딘 안목으로 헤집고 서툰 문장으로 감히 떼어 옮기는 일은 언제나 송구스럽다. 그럼에도 그 작업을 청하여 오는 시편들을 물리지 못할 때가 허다하다. 하물며 건네받은 시편들에서 ‘생(生)의 각(覺)’을 빈번히 경험하게 된다면 문장을 짓는 일은 한결 조심스러워진다. 그러나 그러한 긴장에도 불구하고 그런 시편들을 만나는 일은 즐겁고 설레는 일이다. 그럴 때면 모자란 문장을 지어 올리는 송구스러운 마음을 밀쳐둔 채, 며칠을 그 시행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즐거움에 빠져든다.
   언젠가, 시를 쓰는 이가 농담처럼 던진 말이 있다. ‘왜 시를 쓰게 되었는가?’는 물음에 ‘짧으니까! 소설은 길게 써야 하니까 힘들어서.’ 당시의 상황 맥락으로 보면, 지금 생각해도 그 말은 농담이 아니라 여겨진다. 그이의 말처럼 시는 짧은 형식을 생명으로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곧 창작의 손쉬움으로 이해되어선 안될 일이다. 그 짧은 시행 안에는 한 편의 장편소설로 풀어놓을 수 있으리만치의 장황한 서사가 들앉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 장황한 서사를 짧은 시행으로 압축시키는 일은 가히 고통 그 자체일 것이다. 시 짓기에 있어 고통의 시간이 엄정할수록 시의 완성도는 높아지고, 시어들 간의 간격은 촘촘해진다. 시인의 상상력이 한 폭의 비단이라면 그 비단을 감치고, 시치고, 공그르기를 한 다음 수를 놓고 테를 둘리는 일은 시어를 다듬고 시행을 잇는 작업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은 산고에 버금갈 만큼의 가치를 지닌 것이기에 이 땅의 많은 시인들이 스스로 시 짓는 일을 업으로 삼았을 것이다. 이 땅의 시인들이 ‘시인’이라는 이름만으로 남다른 시선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 글에 함부로 따 옮긴 세 시인의 시편들 끝에 이규보의 시를 매달아 올린다. 시인의 몸가짐으로 세울 만한 글이라 여기는 까닭이다.

 

   日日剝心肝  날이면 날마다 심간(心肝)을 깎아내
   汁出幾篇詩  몇 편의 시를 쥐어짜내니
   滋膏與脂液  기름기와 진액은 다 빠지고
   不復留膚肌  살도 또한 남아있지 않다오.
   骨立苦吟??  뼈만 남아 괴롭게 읊조리니
   此狀息可嗤  이 모양 참으로 우습건만
   亦無驚人語  깜짝 놀랄 만한 시를 지어서
   足爲千載貽  천년 뒤에 남길 것도 없다네.
   撫掌自大笑  손바닥 부비며 혼자 크게 웃다가
   笑罷復吟之  웃음 그치고는 다시 읊조려본다.
   生死必由是  살고 죽는 것이 여기에 달렸으니
   此病醫難醫  이 병은 의원도 고치기 어려워라.
                 ―이규보, 「시벽(詩癖)」 부분

                 ─반년간지 『시에티카』 2013년 · 하반기 제9호

 

 

차민기

부산 출생. 2011년 『시에』로 등단.

출처 : 시에/시에문학회
글쓴이 : 황구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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