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반경환의 명시감상 5 본문
반경환의 명시감상 5
----이인원의 「여우비」에 대하여
벌건 대낮
꼭지까지 취해버린 칸나 꽃대가
돌아서서 울컥
속엣것을 토해내는 순간
차가운 도마뱀 꼬리가
휘익,
발등을 스쳐 지나
갔다
----이인원, 「여우비」(?애지?, 2006년 겨울호) 전문
나는 시인은 ‘언어의 사제’(‘언어의 마술사’)로서 잠언적이고 경구적인 문체를 자유 자재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잠언箴言이란 선악의 시비를 분간할 수 있는 짧은 말을 뜻하고, 경구警句란 도덕이나 예술의 진리를 간결하게 표현한 句를 뜻한다. 이해하는 자는 날개가 있다는 말도 있고, 지혜는 가장 빠른 새라는 말도 있다. “오 계절이여 오 성곽이여!/ 이 세상에 험 없는 영혼이 어디 있겠는가”의 랭보, “바람이 분다/ 그러나 이제는 살려고 애써야 한다”의 발레리,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의 김수영, “모두들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의 이성복, “정적이여, 바위를 뚫고 스며드는 매미소리”의 마쯔오 바쇼오, “오월 장맛비, 큰강을 앞에 두고 집이 두어 채”의 요사 부손 등을 생각해볼 때, 아니, 그보다도 더욱 더 많은 수많은 대시인들을 생각해볼 때, 나는 나의 그 신념이 더욱 더 타당성을 띠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시인들은 사물의 이치를 깨달으며 날개를 얻게 되고, 그리고 그 새로운 지혜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그의 이상적인 천국으로 날아가게 된다.
시인은 언어의 사제이며, 그는 침묵함으로써 이 세상의 진리를 드러낸다.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언어, 아니, 잠언적이고 경구적인 언어는 말이 아니고 침묵이며, 이 침묵은 어느 수사학자의 말보다도 더 많은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침묵은 언어의 정점이고 언어는 침묵의 토대이다. 하이꾸(俳句)는 일본의 대표적인 시의 양식이며, 그것은 5-7-5의 기본구조, 즉, 불과 17자의 음절로 이루어진 이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정적이여, 바위를 뚫고 스며드는 매미소리”의 마쯔오 바쇼오의 시가 그렇고, “오월 장맛비, 큰강을 앞에 두고 집이 두어 채”의 요사 부손의 시가 그렇다. 하이꾸란 “감동적인 침묵을 만들어내는 언어장치”(?순간 속에 영원을 담는다?, 창비)이며, 그 짧은 시행 속에, 아니 그 여백 속에, 우리 인간들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시의 양식인 것이다. 하이꾸는 어느 누구라도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대중성과 서민성이 그 장점이며, 따라서 일본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하이꾸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하이꾸 전문 월간지가 8개, 그 동인지가 800개에 이르며, 그리고 하이꾸 애호가들은 1,0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이미 오래 전부터 전 세계로 퍼져 나아가, 라이나 마리아 릴케, 에즈라 파운드, 엘리어트와도 같은 시인들을 탄생(매료)시켰으며, 오늘날 국제하이꾸 교류협회의 회원국수는 50여 개국에 이른다고 한다. 하이꾸의 장점은 이 단시의 형태와 그 잠언적이고 경구적인 침묵의 언어라고 할 수가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짧고 간결한 시구 속에다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진리를 표현해낸다는 것----. 바로 이것이 전 세계인들을 매료시켰던 것이고, 따라서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자기 자신들의 모국어로 하이꾸를 짓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하이꾸의 또다른 특징은 ‘의외성’과 ‘당연성’이다. ‘의외성’이란 친숙한 것,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새롭게 표현해내는 것을 말하고, ‘당연성’이란 관념 속의 현실이 아닌, 구체적인 삶 속의 현실을 표현해내는 것을 말한다. 일본의 하이꾸가 하이까이(혹은 렌꾸 連歌)에서 그 홋꾸(發句)만을 따로 떼어내 양식화시킨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일본의 하이꾸만이 잠언적이고 경구적인 언어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제일급의 시인들은 침묵의 언어의 대가이며, 또, 그리고, 잠언적이고 경구적인 언어의 대가이다. 랭보, 발레리, 김수영, 이성복 등의 시인이 마쯔오 바쇼오와 요사 부손 등에 뒤떨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거꾸로, 그들을 능가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한국인들은 어떻게 일본의 하이꾸처럼, 우리 한국인들만의 시의 양식을 안출해낼 수 있을까라는 話頭일 것이다. 이 절대절명의 話頭를 해결해내지 못한다면, 우리 한국인들은 영원히 일본인들보다도 더욱 더 더럽고 추한 ‘왜놈들’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내가 사물을 소유했다고 믿었지만, 내가 사물(돈, 보석)의 노예가 되어 있음을 깨닫고 사르트르의 ‘로캉탱’(?구토?의 주인공)은 구토를 한다. 햄릿은 그의 아버지와 숙부를 통해서 인간 사회의 권력의 더러움을 깨닫고 구토를 하며, 프로이트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동침하려는 우리 인간들의 성적 욕망을 바라보면서 구토를 한다. 설사가 배탈이 났을 때, 즉 소화불량증의 객관적 상관물이라면, 구토는 위 속의 음식물을 토해내는 생리적인 현상을 말한다. 구토는 이미 상한 음식물에 대한 거부현상일 수도 있고, 체했을 때처럼 소화불량증의 현상일 수도 있고, 그리고 더러운 것을 보았거나 그토록 잔인하고 불쾌한 사건들을 마주했을 때처럼, 그때까지 먹은 것을 모조리, 다 토해내는 현상일 수도 있다. 사르트르의 ?구토?의 주인공인 로캉탱이나 햄릿, 그리고 프로이트의 ‘구토’는 더러운 것을 보았거나 불쾌한 사건들을 마주했을 때의 그것일 수밖에 없지만, 이인원 시인의 “벌건 대낮/ 꼭지까지 취해버린 칸나 꽃대가/ 돌아서서 울컥/ 속엣것을 토해내는 순간”의 구토는 그 구토의 원인과 그 의미가 너무나도 불분명하다. 시의 문맥상으로는 “벌건 대낮/ 꼭지까지 취해버린 칸나 꽃대가/ 돌아서서 울컥/ 속엣것을 토해내는 순간”에서처럼, 술 취한 여인의 구토로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현상일 뿐인 것이다. 상징과 은유를 모르고, 또 그리고 잠언과 경구를 모르는 독자들은 겉으로 드러난 문맥만을 보지만, 철학예술가는 심리학의 대가답게 그 문맥의 이면을 구성하는 다양한 조건들과 그 이유를 따져보게 된다.
칸나(canna)는 칸나과의 다년초이며, 근경(根莖)이 있고, 줄기는 넙죽하며, 그 키는 2미터까지 자라난다. 그리고 잎은 파초잎과 비슷하며 여름과 가을에는 매우 아름답고 빨간 꽃을 피운다. 만일, 그렇다면, 벌건 대낮, 왜 칸나 꽃대는 꼭지까지 취해버리고 속엣것을 모조리 다 토해내게 되었던 것일까? 벌건 대낮은 사회적인 관습상, 일을 하는 시간이지 술을 마시는 시간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녀는 실연을 당한 것일까? 칸나는 여름과 가을철에 빨간 꽃을 피우는 화초이며, 그 계절은 푸르디 푸른 청춘에서 노년의 삶으로의 퇴화를 뜻한다. 줄리에트는 사랑하는 로미오를 따라서 죽음을 선택했고, 성 춘향이는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했다. 하지만 칸나 꽃대는 그처럼 사랑할 수 있는 남자가 있기는 커녕, 자기 자신의 순결과 사랑을 유린당한 메디아처럼, 원한 맺힌 저주감정과 무서운 복수감정으로 벌건 대낮부터 이처럼 술을 마신 것인지도 모른다. 파리스 백작도 더러운 놈이고, 변사또도 더러운 놈이고, 그리고 황금양털의 주인공인 이아손도 더러운 놈이다. 그 더러운 놈들이 벌건 대낮부터 술에 취하게 만들고, 그리고 그 더러운 놈들이 이제까지의 모든 것들을 다 토해내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처럼 실연을 당한 것이 아니라면, 그녀는 이미 한물이 간 창녀이며, 밑빠진 독에 물붓기식으로 빚더미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녀의 고향에는 다 허물어진 움막집 한 채와 이미 노동력을 상실한 아버지와 그리고 나이 어린 두 동생들이 자나깨나 그녀의 구원의 손길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한물이 간 몸을 팔고 또 팔아도 악덕 포주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가망성이 없건만, 그러나 이제는 그 어느 건달놈들도 그녀의 존재 따위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이른 아침부터 머리끝까지 부아는 치밀어 오르고, 한 잔, 두 잔, 빈 속에 걸친 술이 이 세상의 그 모든 것을 다 토해내게 만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그녀가 한물이 간 창녀가 아니라면, 그녀는 ‘미인박복’이라는 비극의 주인공이 아닐까? 그녀가 잠시 잠깐 동안 외간 남자와 바람을 피운 사이, 그녀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또 사랑했기 때문에,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이 그의 어린 두 남매를 데리고 분신자살을 결행해버린 것이 아닐까? 미인은 축복받은 존재가 아니고 저주받은 존재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미모는 만인들의 욕망과 질투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인은 박복한 존재이며, 저주받은 존재이다. 그녀는 그녀를 미인으로 태어나게 한 하나님을 저주하고, 또, 그리고 잠시 잠깐 동안 외간 남자와의 ‘에로스의 향연’을 버린 것을 가지고, 그처럼 ‘막가파식’의 분신자살을 결행한 남편이 밉고 또 미운 것이다. 칸나 꽃대는 실연을 당한 여인이며, 창녀이고, 그리고 천하일색의 미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우리 인간들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말대로, ‘욕망하는 기계들’인지도 모른다. 욕망이 욕망을 부르고, 그리고 그 욕망이 또다른 욕망을 부르고, 그리고 끝끝내는 욕망의 대상과 자기 자신마저도 파멸시켜버린다. 자연의 파괴는 삶의 터전의 파괴이며, 삶의 터전의 파괴는 우리 인간들의 삶의 종말을 뜻한다. 미인은 욕망하는 존재(기계)이고, 미인은 자기 자신을 저주한다. 그러니까 그녀는 벌건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그 모든 것들을 개처럼 씹어대다가, 그리고 끝끝내는 모든 속엣것들을 다 토해내게 된다. 미인이 바라보는 세상은 아름답고 풍요롭지도 않고, 더없이 추하고 살벌한 풍경들 뿐이다. 어쨌든 그녀는 박복한 미인이지만, 그러나 그녀의 인생을 탕진한 죄는 도저히 그 무엇으로도 변제가 가능하지가 않다. 실연을 당했어도 곧바로 그 아픔을 털고 일어나지 못한 죄, 만인들의 귀감이 되는 사회인이 되지 못하고 함부로 몸을 팔아버린 죄, 또 그리고 주색잡기에 빠져서 그토록 착한 남편과 어린 아이들을 버리고 외간 남자와 놀아난 죄, 그 죄의 댓가는 그녀의 원한 맺힌 저주감정과 무서운 복수감정을 넘어서서, 인생무상이라는 허무감과 함께, 이처럼 그녀를 ‘구토’의 주인공이 되어가게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인은 후회하는 존재이며, 저주하는 존재이고, 그리고 구토하는 존재이다.따라서 “벌건 대낮/ 꼭지까지 취해버린 칸나 꽃대가/ 돌아서서 울컥/ 속엣것을 토해내는 순간/ 차가운 도마뱀의 꼬리가/ 휘익/ 발등을 스쳐 지나”가게 된 것이다. ‘여우비’는 볕이 좋은 날, 잠시 잠깐 동안 뿌리는 비를 말하며, 이 시의 문맥상, ‘칸나 꽃대’에 대한 영향 만점의 채찍(각성제)으로 작용을 하고 있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여우비는 도마뱀이 되고, 그 도마뱀은 냉혈동물의속상상, 술에 취한 그녀와 잘못 살아온 그녀를 ‘죽비’로 내려치듯, 그처럼 꾸짖고 있는 것이다. “이 망할 계집년아, 이제부터라도 제발 정신 좀 차리거라!” 바로 이 말이 「여우비」의 제일급의 전언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인원 시인의 「여우비」는 그 짧은 단시의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마쯔오 바쇼오와 요사 부손의 대표작보다도 더 뛰어난 시이며, 더 깊은 울림을 지닌 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벌건 대낮/ 꼭지까지 취해버린 칸나 꽃대가/ 돌아서서 울컥/ 속엣것을 토해내는 순간”의 의외성과 “차가운 도마뱀의 꼬리가/ 휘익/ 발등을 스쳐 지나/ 갔다”의 경구성이 그것이며, 따라서 이인원 시인의 「여우비」는 끊임없는 침묵의 언어로 잠언적이고 경구적인 시어들을 탄생시켰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새로운 사상, 새로운 지혜는 끊임없이 침묵의 언어를 지향하고, 그것은 잠언적이고 경구적인 시어들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반전과 급전이 교차하는 극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너무나도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미학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이 「여우비」는 분명히 한국현대시의 또다른 진수라고도 할 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