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3월의 좋은 시들 본문
3월 시창작 텍스트
11월 / 신미애
바람의 목소리가 고드름처럼 자라는 중이다
하늘은 몇 겹의 구름을
덮어쓰고
목덜미에 소름이 돋은 새떼는 어디론가 날아간다
앞산에 업혀 날아오는 새소리가 건조하다
종종거리는 거리의 눈빛이
흔들리고
말이 식어간다 자꾸 뒤를 돌아본다
돌멩이에 다친 연못이 둥근 입술을 드러내고
채 가라앉지 않은 꿈이 멀리
흘러간다
그리운 것들이 울컥 쏟아진다
허공의 문이 닫히는 소리,
휴업은 지루하게 이어질 것이다
뒤엉킨 생각들
미처
태우지 못한 엽서를 뒤적이며
어깨에 내려앉는 이름을 털어낸다
곧 어둠이 내릴
저 모퉁이를 돌아가야
한다
<시와미학> 2013년 봄호
저수지 / 송찬호
저 물의 깨진 안경을
보오
저 물의 젖은 손수건도 보오
물속에 4人가족 자동차가 살고 있소
물은 고요하고 깊으오
물의 벽지를 바꿔도
좋소
물의 침대를 새로 들여도 괜찮소
자동차는 바닥의 진흙에 박혀 더 산뜻하오
유서는 없었소,
저들은
지상에서
맨몸으로
수 없이 폭풍과 눈보라를 찍었소
그러니, 저 물에 빠진 도끼를 다시 꺼내지 마오
저들이 어떻게
사나 가끔씩
돌을 던져보아도 좋소
물가까지 쫓아온 빚쟁이들도 안부를 묻고 가오
찢어진 물은 곧 아물 거요
벌써
미끄러운 물위로 바람이 달리고 있소
<문학들> 2012년 가을호
거위털파카 /
박해성
울음이 다 삭제된 거위의 깃털을 산다
적멸의 가벼움은 3개월 무이자할부 ,
온 세상 눈보라에도
보온 방수
끄떡없다는
미궁 속으로 빨려든 비명의 무게하며
기다란 모가지에 꽥 꽥 꽥 고여 있던
욕망의 질량에 따라 시세가
매겨질 뿐
아무도 관심 없다, 얼어터진 그 맨발은
한때는 부리 끝에 꽃물 들어 붉었던가?
단 한 장 남은 달력에
가압류된 동백처럼
나는 몹시 안녕하다,
영하零下의 지상에서
숱한 죽음이 키운 날개 잃은 슬픈 새
지구별
난생卵生의 후예, 뒤뚱뒤뚱 동행이다
시집「비빔밥에 관한 미시적 계보」2012년 리토피아
악, 위대한 약 /
김은정
악은 약인가?
감자 싹을 본다.
온 몸으로 불을 켠 이 투지, 새로운 수립이다.
악을 쓴
결과다.
저 온몸 악을 쓰고 그 속에 독을 품어
컴컴하고 축축한 위협에도 그들 물리치고 몰아세운 새 순,
암,
지켜내며 대를 이르려면 부디 이래야지.
감자 한 알이 머금은 암실 속의 격투,
삭고 썩고 상하고 농하고 문드러진 반죽을
보자기처럼 싸고 있는 껍질 또한 고귀하고 성스럽다.
그러니 기대해보자.
속상해서, 속이 썩어서,
라고
악을 쓰며 우리 살아가는 동안이
헛될 리 있겠느냐?
<시와 경계> 2013년 봄호
해바라기가 피어 있는 구석 벽 / 김은정
따글따글한 정오,
해가 해바라기를 바라보고
있다
해만 바라보고 산다는 일, 참으로 허리 아픈 경험이란 것
전생에 뼈저리게 울먹울먹 곪았던 걸까
중천에서
이글거리는 해가 오히려 혼신을 굽혀 자기를 바라보도록
도도하게 핀 해바라기 한 송이의 현재 참으로 기특하다
사람손이 뿌린
씨는 아닌 듯
아무리 살펴도 바람 손이 뿌린 듯만 한
해바라기 몸 한 채의 현재진행형 가없이 튼튼하다
기댈 언덕과
다리 뻗을 곳 보아가며 자리 잡는 일
아직도 가끔 서투르고 둔하여 수수리 수수리
길한 터 흉한 터 풍수지리설에도 가끔 발을
담그는
사람 사람이여, 저 천한 자리의 해바라기 좀 보아라
어느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질척한 자갈 뒹구는 값싼
구석에 제 귀한 뿌리를 내린 후
햇빛과 동급으로 턱 버티고 섰으니
어느 새 해가 해바라기를 귀하게 모신다
<사몽의
숲으로> 110 시인선 (시산맥 시인선)
덮어준다는 것 / 복효근
달팽이 두 마리가 붙어
있다
빈집에서 길게 몸을 빼내어
한 놈이 한 놈을 덮으려 하고 있다
덮어주려 하고 있다
일생이 노숙이었으므로
온몸이
맨살 혹은 속살이었으므로
상처이었으므로 부끄럼이었으므로
덮어준다는 것,
사람으로 말하면 무슨 체위
저 흘레의 자세가
아름다운 것은
덮어준다는 그 동작 때문이 아닐까
맨살로 벽을 더듬는 움막 속의 나날
다시 돌아서면
벽뿐인 생애를 또
기어서 가야 하는 길이므로
내가 너를 네가 나를 덮어줄 수 있는
지금 여기가
지옥이더라도 신혼방이겠다
내 쪽의 이불을
끌어다가 자꾸
네 쪽의 드러난 어깨를 덮으려는 것 같은
몸짓, 저 육두문자를
사람의 언어로 번역할 수는 없겠다
신혼서약을
하듯 유서를 쓰듯
최선을 다하여
아침 한나절을 몇 백 년이 흘러가고 있다
시집「따뜻한 외면」2013년
실천문학사
수련이 지는 법 / 복효근
수련은 질 때
꼿꼿하게 수면 위로 뻗어 올렸던
꽃대에
힘을 빼버린다
수면 아래로 가라 앉혀
오므린 꽃을 제 뿌리 곁에 묻는다
부리에서 꺼낸 빛깔과 향기를
다시 거두어
제 어미에 젖을 물리는 것이다
왔던 길로 되짚어 돌아간다
발자국 마저 지우고
없었던 그 자리
찾아간다
가장 거룩한 신화를 바람 위에 쓴다
가장 아름다운 자화상을 물 위에 그린다
제 주검을 제가 치우고
가는
완전연소 차가운 불꽃의 생
시집「따뜻한 외면」2013년 실천문학사
불가마에서 두 시간 /
권혁웅
누가 이 양떼들을 연옥불에 던져 넣었나
수건을 돌돌 말아 머리에 인 어린 양과
불가마 속에서도 코를 고는 늙은
양들로 여기는 만원이다
올 가을에는 기어코 성지순례를 가겠다고
삼년 째 돈을 붓는 아마곗돈 회원들,
종말을 팥빙수와 바꾸고 나자
어린아이 머리통 같은
구운 계란이 굴러 온다
천국에서도 남녀칠세는 부동석이어서
파란 수건은 왼쪽, 빨간 수건은
오른쪽이다
당신 옆의 빨간 수건이 사라졌다면
그게 휴거다, 그는 당신이 갈 수 없는 곳으로
어쩌면 펄펄 끓는
화마지옥으로
아니라면 게르마늄 천국으로 갔다
아, 두고 온 사람을 돌아보느라
소금기둥이 된 이들로 이루어진 소금동굴도
있다
바짝 마른 양피지들이 바이오세라믹 공정을 거쳐
기신기신 기어나온다
미역국처럼 몸을 푼 이들, 조물조물
몸은 빤 이들,
배를 두드리며 제자리에서 뛰며
냉온을, 말하자면 겨울과 여름을
교대로 겪는 이들로 여기는 만원이다
그들이 벗어둔
양털이
기와로 벗겨낸 피부처럼 땟국물을 이루어 흘러간다
한 세상 떠돌던 꿈처럼
행불자가 되고 싶었던 생시처럼
옆
마을 어딘가에는 무릉이 있을 것이다
금영노래방에서 두 시간 / 권혁웅
너의 박수가 후렴 너머를 향해 있다는
건
진즉에 알았다
나의 18번을 네가 먼저 부를 때
나는 탬버린처럼 소심해져서 바닷바람을 맞는
화면 속 여자나 쳐다보는
것이다
사무실의자가 멈춰 서서 두리번거리는 두발짐승이라면
여기 놓인 소파의 기원은 파충류여서
언제 내 손을 물고 첨벙대는 무대로
끌고 갈지 모른다
그렇다면 부장 앞에서
피처링을 하겠다고 달려드는 저 사원들은
악어새가 아니면 새끼 악어들,
내 예약곡
다음에 우선예약을 누르는 악다구니들,
너는 취해서 잘못 누른
옛 애인의 번호처럼 옆방에 들러 한 곡 부르고 온다
네 이웃의
마이크를 탐하다니
남의 손가락 사이에 타액과 DNA를 묻히고 오다니
나는 미러볼처럼 어리둥절해져서
세 번째 10분추가 안내문을
멀뚱히 쳐다본다
그제 부른 노래를 또 부르는 너
와우, 어디서 좀 놀았군요, 감상문이 가리키는 곳이
바로 여기였음을 너는
모른다
나는 WHITE를 마시던 손가락으로
간주점프를 눌러 몰래 복수나 하는 것이다
냇물 전화기 /
박지웅
냇물에 던진 전화기, 한번 몸을 뒤집더니 물고기처럼 달아난다
지느러미를 가진 언어들이여, 잘
가라
한동안 잊고 살았다
그날 이후, 귀로 들어온 말이 입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었다
나는 그지없이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고
흘러오고 흘러가는 것에 무심했다
가끔 발신처를 알 수 없는 문자를 받았다
물로 오랫동안 다듬은
문장이었다
생의 상류에서 하류에 이르기까지 모은 이야기는 아름다웠으며
그 문장을 손바닥에 받아 마시는 일이
즐거움이었다
다시 한동안 잊고 살았다
남쪽 섬 언덕에 앉아 봄꽃이 마을 담벼락에 들어가 앉는 것을 보았고
금빛은빛
물결에서 나비들이 태어나고 또 꽃까지 당도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울고 싶었지만 잊었다
머나먼 아카시아 숲속을 걷다가 비늘 같은
것들이 사르르 머리 위로 내려앉을 때
나뭇잎 위로 흘러가는 푸른 냇물을 언뜻 본 듯도 하다
시집『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2012년 문학동네
상업의 내력 / 박지웅
목련 하나에 장정 여섯이 붙었다
한번 긴 실랑이가
끝나고
목련도 담장에 기대 쉬고 있다
삽날이 뿌리 탁탁, 끊어 들어올 때도
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의연함은 때때로 구타로
이어진다
그를 묶고 몇몇은 억센 힘으로 줄 당기고
한둘은 돌아가며 발길질한다
후두둑 후두둑, 생니 쏟으며 앞으로 기우는
저
목련은 봄날의 약사기도 했다
해마다 그가 내민 흰 약봉지 받아가던
봄을 앓는 자들은 새로운 북카페에 앉아
유리창 갈듯 쉽게
풍경을 갈아치우는
상업의 내력에 붉은 밑줄을 그을 것이다
풍경은 대부분 환경에 먹히고
먹이사슬의 최고 단계에는 이윤이
있다
장정들이 더러운 기분으로 목련을 밟는다
봄날에 때 아닌 눈사태 푹푹, 길이
끊어지고 있다
가축의 정신
/ 박지웅
소 팔아 상경한 아비가 소처럼 일하고 돌아온 저녁
그림자가 뒤로 천천히 길어지더니 무거운 쟁기처럼 땅에
박히었다
앞장선 아비를 따라 우리는 여물통 같은 한강에 입을 처박았다
그곳에 모인 소 무리를 둘러보며 아비는 말했다
공부 열심히
하거라 너는 커서 소가 되면 안 된다
그 한 마디에 마음이 모였다가
돌멩이 맞은 듯 퍼져 나가곤 했다
쓸쓸한 마음이 몸을 부비면
가슴이 시리다는 것을 알았다
한 입 뜯으면 강은 또 묵묵히 우리 입 앞에 여물을 채워놓았다
시린 네 개의 무릎을 가슴 안에 끌어넣어
데우던 아비의 밤
아비는 가축의 정신으로 우리 가족을 먹여살렸으니
한강의 기적을 일군 소들과 함께 이제쯤 인간의 국경으로
들어갔으리라
코뚜레를 벗고 어느 전생의 저녁에 대하여 쓰는 밤
아비가 죽을 때까지 나는 정체를 들키지 않았다
시집
<너의 반은 꽃이다> 2007. 문학동네
나비를 읽는 법 / 박지웅
나비는 꽃이 쓴
글씨
꽃이 꽃에게 보내는 쪽지
나풀나풀 떨어지는 듯 떠오르는
아슬한 탈선의 필적
저 활자는 단 한 줄인데
나는 번번이
놓쳐버려
처음부터 읽고 다시 읽고
나비를 정독하다, 문득
문법 밖에서 율동하는 필체
나비가 아름다운 비문임을
깨닫는다
울퉁불퉁하게 때로는 결 없이
다듬다가 공중에서 지워지는 글씨
나비를 천천히 펴서 읽고 접을 때
수줍게 돋는 푸른
동사(動詞)들
나비는 꽃이 읽는 글씨
육필의 경치를 기웃거릴 때
바람이 훔쳐가는 글씨
<詩로 여는
세상> 2011년 가을호
<미학이 추대하는 시>100 선정작
어느 절의 법회 / 이동재
동지 팥죽은 뭐 흙 파서 만들었는 줄 알아
팥죽 한 그릇에 오천원씩 내놔
이제 우리 절도 지금 저 앞에 종루를 새로
지었듯이
일주문도 지어야하고 할 공사가 많아
기껏 일 년에 한두 번 와서
천 원짜리 한 장 놓고 쪼르르 내려가니 복이
와?
그 다 달아나는 복이야 천만 원씩 내고 빌어 봐
소원이 안 이루어지나 관상이 달라져
왕비도 되고 뭣도 되지
아줌마
어디 백만 원 내고 빈 적 있어
시주는 천 원 하고 복은 백만 원어치 빌고, 에이!
'산 속에 성철 스님 계시면 암자로
내려오시기
바랍니다. 아아 마이크 시험 중'
민원인 홍길동 / 이동재
운전면허 갱신 기간이 지난
아내를 따라
범칙금을 납부하러 파주경찰서에 간 날
거기서 다시 그를 만났다
고소고발인 홍길동
민원인 홍길동
분실신고자
홍길동
사백 년째 민원인으로 혹은 그 대리인으로
그는 서류에 이름을 남기고 있었다
대출을 받으러 농협에 간 날은
거기서도
그를 만났다
원래 근본이 없는 인간이라 그런가
그는 수백 년째 그렇게 민원인으로
대출자로 고소고발자로온갖 민형사 사건의
주인공으로
부동산 금융 기관의 단골 대출 고객으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었다
아직도 호부호형이 문제인지
빽 없고 돈 없고 힘 없는
사람들의 대명사로
그는 여전히 이름을 팔고 있었다
민원인 이름에 그를 지우고 잠시 여경의 눈치를 보다가
진시황, 이건희,
오바마, 전두환의 이름을 써본다, 써봤다.
상대가 놀란다. 그렇게 겁박해봤다. 마음 속으로.
열무밭 퇴고하기/
김만년
세 평 밭에 쪼그리고 앉아 열무를 솎는다
빽빽하게 돋아난 과욕의 흔적들
뿌리를 다치지 않게
조심조심
웃자란 자모들을 솎아내고
행간을 팽팽히 당겨 띄어쓰기를 한다
자칫 문맥을 놓칠까
이랑을 그어 행갈이를 다시
하고
북을 돋아 음절간의 경계를 뚜렷이 한다
차근이 드러난 자리에
바람과 햇빛을 살짝 끌어다 앉힌다
멀찌감치
서서
고친 문장들을 찬찬히 읽어 본다
한층 널찍해진 어근
그제서야
파릇한 문장들이 양모음으로 찰랑거린다
오늘 내가
퇴고한 것은 열무밭 한 장이다
열무 구멍 / 이기와
여러 날 뒤
텃밭에 나가 열무를
들여다보니
파란 잎사귀마다 별자리만큼 구멍이 박혔다
농약을 치지 않아
구멍은 탐스럽고도 싱싱하게 자랐다
구멍이 더 자라
허공이 되기 전
남은 구멍을 뜯어 물에 씻고 다듬는다
식탁 위 융숭하게 차려진 구멍들
무지렁이 벌레가 제 힘
다해
한세상 깊이
둥글게 통찰했다는 흔적
처음도 끝도 일원(一圓)이라는 벌레의 우주관
간다 간다 해도 이
자리이며
도달했다 도달했다 해도 이 자리라는
텅 빈
숨통의
벌레가 남긴 구멍의 성찬식, 혀가 일어나 춤을
춘다
시집 <그녀들 비탈에 서다> 2007년 서정시학
립스틱발달사 / 서안나
고대 메소포타미아 인들은
보석을 갈아 눈과 입에 발랐다
립스틱의 기원이 되었다
고대인들은 빛나는 눈과 입술로
별에 닿고 싶어 했다,
라고 나는 단정한다그러므로 날개는 별에서 태어난다
그러므로 내 눈과 입술에
별이 뜨고 날개가 돋는다,
란 논법엔 오류가 없다클레오파트라는 딱정벌레와
개미 몸을 짓이겨 입술을 칠했다
굶주린 곤충들이 날아들었다
여인의 입술을
위해 쉽게 목숨을 버렸다
그러므로 죽음 속에서 립스틱은 빛난다,
는 문장도 용서될 수 있다별을 바라볼 때
당신이 캄캄해지는 건
욕망의 얼굴과
잠시 마주쳤기 때문이다
당신은 욕망을 천천히 날아올라
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아침마다
당신의 입술에 날개를 그려 넣는 것이다
입술을 칠하며 별을 건너는 것이다
당신,
반짝인다
시집<립스틱
발달사> 2013. 천년의시작
먼, 분홍 / 서안나
윤이월 매화는 혼자 보기 아까워 없는
그대 불러 같이 보는 꽃
생쌀 같은 그대 얼굴에 매화 한 송이 서툰 무늬로 올려놓고 싶었다 손가락 두 마디쯤 자르고 사흘만 같이
살고 싶었다
혼자 앓아누운 아침 어떻게 살아야 매화에 닿는가 꽃이라는 깊이 꽃이라는 질문 기름진 음식을 먹어도 배가
고팠다
매화는 분홍에서 핀다 분홍은 한낮의 소란스러움을 물리친 색 점자처럼 더듬거리다 멈춰 서는 색
새벽의
짐승처럼 네 발로 당신을 몇 번이나 옮겨 적었다 분홍이 멀다
먼, 분홍
시집<립스틱
발달사> 2013. 천년의시작
등 / 서안나
등이 가려울 때가 있다
시원하게 긁고 싶지만 손이 닿지 않는 곳
그곳은 내 몸에서 가장 반대편에 있는 곳
신은 내
몸에 내가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을 만드셨다
삶은 종종 그런 것이다, 지척에 두고서도 닿지 못한다
나의 처음과 끝을 한눈으로 보지
못한다
앞모습만 볼 수 있는 두 개의 어두운 눈으로
나의 세상은 재단되었다
손바닥 하나로는 다 쓸어주지 못하는
우주처럼 넓은 내 몸 뒤편엔
입도 없고 팔과 다리도 없는
눈먼 내가 살고 있다
나의 배후에는
나의 정면과 한
번도 마주보지 못하는
내가 살고 있다
시집<립스틱 발달사> 2013.
천년의시작
꽃사과를 보러 갔다 / 이인원
꽃을 사칭해 열매를 맺으며
열매를 차용해 꽃을
피우며
꽃과 사과 사이를
사과꽃과 꽃사과 사이를
죽어라 오가는 나무
무서워라,
괜한 꽃멀미를 핑계로
그대를 보러
가서 아직
꽃도 아니고 열매도 아닌
사랑도 아니고 미움도 아닌
어정쩡한 나만 쓸쓸히 만나고 왔네, 아니
자칫 잘못 사람을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쓸쓸함
그 어정쩡한 함정을 아슬아슬 피해서 돌아 왔네
누명 같은 꽃을 훨훨 벗어던지고
오명 같은 열매를
툭툭 떨구면서
오직 이름값에만 충실한
한 알 한 알 붉은 저 애와 증의 관계를
한 치도 어김없는 공전과 자전이라 읽고
왔네
애먼 꽃가루 알러지 증상이나
더듬더듬 사칭하다 왔네
그대 몰래
죄 없는 그대를
또 한 번 차용하고 왔네,
아니
그대 목울대 안에서 분주하게 피고 지며
달과 지구 사이의 거리를 조용히 암산하고 있는
작은 꽃사과 하나를 똑똑하게 목격하고
왔네
웹진「시인광장」2012년 12월호
[2013 평화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은빛
보행차 / 오정순
앉고 싶을 때 앉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만은
저 노인은 서고 싶을 때 설 수 있는 날들이 많지
않다
풀썩, 직립의 보행을 주저앉히는 것은 아득한 역진화의 기억이다
노인의 외출과 동행하는 은빛 보행차,
생의 마지막 공궤를
받들 듯
의자가 달린 보행기를 모시고 간다
비어있는 의자에 경적과 깜빡거리는 푸른 보행시간이 앉아 있다
걸음의 거리가
지리멸렬할수록
보행기가 굴리는 바퀴의 공회전이 많아진다
의자는 다리를 받치는 부속물
수시로 찾아오는 퇴행의 증세들이다
그럴
때마다 휘청거리는 걸음과 날카로운 통증을 모셔 들인다
가까운 거리를 몇 겹 덧대면 보이는 먼 곳
언제부터인가 가야 할 길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골목 어느 한 귀퉁이가 한 생처럼 휘어져 있고
처마 밑 그늘에 햇살 걸음도 잠시 쉬어
간다
앉을 수 있는 날들은 다 서서 걸어왔거나 걸어간 후에 있다
이제 마지막 의자에 통증과 나란히 앉아 있다
두 다리
위에 아이를 올려놓듯
의자를 묘지로 삼고 싶다는 듯 잔뜩 웅크리고 있다
노인이 다시 일어서고
남아 있는 길의 거리를
경배하듯 저 굽어진 몸으로 휘어진 골목을 돈다
네 개의 바퀴와 굽은 허리 하나
더 이상 수리할 곳 없는 오후의 한때가
은빛
바퀴를 굴리며 가고 있다
칸나 / 손순미
찬물에 밥을 말아먹었다 더운 바람이 불어오고 마당에
칸나가 피었다 소스라치게 피었다 체한 것이 아닐까 아닐까 했을 때 붉은 꽃의 성대에서 칸나가 피었다 터져 나오는 자궁의 홍등紅燈을 어쩌지 못한
나는 주근깨가 많은 소녀였다 달은 아예 뜨지도 않은 밤에 수돗가에서 몰래 팬티를 빨았다 공포와 수치심이 온몸에 스멀거리는 꽃의 향기는 어두웠다
야광의 안구를 갈아 낀 고양이가 뒤꼍으로 돌아나가고 나는 자궁이 쏘아대는 꽃폭탄에 배를 싸쥐고 누웠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식구들은 밥을 먹고
있었다
칸나가 피었다 배가 아프다 칸나만 보아도 배가 아프다 뜨거운 태양의 여름이 칸나를 지진다 칸나의 음순이 붉어졌다 십만
볼트의 전류가 내 자궁을 지지는 고통을 지나 나는 새끼를 낳은 어미가 되었다 칸나가 어둡다 새끼를 낳은 공포의 추억이
몰려온다
낡은 자동차를 생각함 / 장옥관
하지만 내 자동차는이제 너무 낡았다
에어컨을
끄고도낮은 오르막에서 금방 해수가 끓어오르고
느닷없이 네거리에서깊은 생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하긴 늙으면 그렇게 잡념이 많아지는 것
아닌가
넘치는 힘을 감추기 위해 고요히 끓어오르던
심장과 생철의 탄탄한 조임
치약 거품처럼 반짝이던 시간이 또한
있었다
하지만 습관이란 얼마나 단호한가
굴러가는 바퀴처럼 해바라기는
다물어지지 않은 입으로 하품을 견디고
저녁의 임산부는
박꽃처럼 시들어
다시 누추한 삶을 견디는 것, 침침한 헤드라이트와
옆구리에서 새어나오는 낡은 시트의 중얼거림
그렇다, 길 밖으로
밀려나 속도를 잃어버린
내 자동차는 그토록 늙어버린 것이다
퇴직금도 없이 플라타너스는
아직 귀때기 시퍼런 잎을 떨구고
낡은
형광등 끔벅이는 몸 속으로
불 끈 자동차 하나 쏜살같이 달려나간다
복숭아나무 아래 / 이정훈
젊어
힘 좋을 땐 밖에 나가 다 떨어먹고
어머니는 복숭아껍질을 까며 줄창 푸념
아버지야 어머니 입매에다 허물쩍 웃지
젊어 힘 좋을
때와
떨어먹는다는 말의 주객主客을 곰곰 흔들면
어디서 복숭아 향 솔솔 날아오나
한때는 다 꽃 피던 복숭아나무
가지를 함부로
당기다 먼 데로 떠나던 나그네
어디까지 갔다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복숭아 언덕에서 멀지 않았던 노정이
꼭 무슨
탓일라고
난 바람의 행적은 있어도
든 바람의 내력까지야 누가 기억하겠나, 한들
나도 한번 떨어먹었으면
복사뼈 깊이 가둬 둔
바람을 훔쳐 타고
세상의 언덕마다 싸돌며
내 안의 꽃가루를 옮겨주었으면
나무는 혼자 꽃 피고 열매 맺으며
귀먹고 눈 어두워
돌아올 나그네를 기다릴 테지
그때 알 복숭아 주렁주렁 매달린 거친 가지가
또 날 뭐라 불러줄까
늙으니 할멈밖에
없지?
어머니는 말끝에 혼자 웃고
아버지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복숭아만 우물거리고
그럼 나도 한 쪽 거들며 속으로
한마디
노형老兄, 어디까지 가시오?
다 떨어먹고 온 나그네와 떨어먹을 나그네가
나무 밑동에 기대어 복숭아를 나눠
먹는다
가지 끝에 단물 뚝뚝 흘러내린다
2013 <신춘문예
당선시집>에서
궁금함의 정량 / 이인원
호두알처럼 동글동글한 여유를 손안에 굴려보는
모처럼의 호사, 문득 반질반질 길든 호두알 속이 궁금해지는 딱 그만큼이 오늘 내 궁금함의 정량 그렇다고 정말 망치를 찾아 깨어본다면 바보 입이
궁금하다고 라면에 밥까지 말아먹지 않듯이 아름다운 소식을 위해서는 그저 앞에 놓인 튀밥이나 집어먹으며 호두알만 계속 굴리면 된다 바싹 바싹
귓전을 간질이는 뻥튀기소리를 즐기면서 호두알 표면이 얼마나 더 반들거리나 잠시 살펴보면 된다 그러다가 보면 세상 궁금해진 어린 싹이 스스로 빼꼼
고개를 내밀듯 어느 날 불쑥 저 문을 밀치고 반가운 얼굴 들이닥칠 것이므로 그때까지, 한 티스푼 정도의 느긋함만 보태면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심도 너하고 나하고의 그리움의 정량도 딱 이만큼이라면 견딜 만하겠다
시집『궁금함의 정량』에서
무서운
속도 / 장만호
다큐멘터리 속에서 흰수염고래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죽어가는 고래는 2톤이나 되는 혀와
자동차만한
심장을 가지고 있다고 내레이터는 말한다
자동차만한 심장, 사람이 들어가 앉을 수도 있는 심장.
나는 잠시 쓸쓸해진다.
수심
4,812미터의 심연 속으로 고래가 가라앉으면서
이제 저 차 속으로는 물이 스며들고
엔진은 조금씩 멎어갈 것이다.
그때까지
마음은 어느 좌석에 앉아있을 것인가.
서서히 죽어가는 고래가
저 심연의 밑바닥으로 미끄러지듯이 가닿는 시간과
한
번의 호흡으로도 30분을 견딜 수 있는 한 호흡의 길이
사이에서, 저 한없이 느린 속도는
무서운 속도다. 새벽의 택시가 70여 미터의
빗길을 미끄러져
고속도로의 중앙분리대를 무서운 속도로 들이받던 그 순간
조수석에서 바라보던 그 깜깜한 심연을,
네 얼굴이 조금씩
일렁이며 멀어져가고
모든 빛이 한 점으로 좁혀져 내가 어둠의 주머니에
갇혀가는 것 같던 그 순간을,
링거의 수액이 한없이 느리게
떨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지금 가물거리는 의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마음아, 너는 그때 어디에 있었니
고래야, 고래야 너는
언제 바닥에 가 닿을 거니
시집<무서운 속도> 2008. 랜덤하우스
아름다운 테러리스트
/ 김성태
나는 킬러다
하얀 구두를 신은 푸른 수염의 고독한 사냥꾼이다
그리운 敵이 없다
늠름한 敵이
없다
결단하듯 넥타이를 맨 패배뿐이다
이십 오년 전 밤 그때도 검은 눈이 내렸단다 태양의 중심부를 향해 새들이 부리를
박았지만 빛은 쏟아지지 않았단다
지하로 흐르는 물길을 부정하자고 별들과 합의했지만
차가운 발등 위로 내장처럼 먼지가
쌓였고 그때 나는 경찰과 학교와 부모의 그림자를 피해가지 못했단다
주저앉는다
마치 제 스스로 제 뿔을 꺾은
짐승처럼
극장으로 향하는 네거리의 사람들
일렬로 앉아 액션 멜로 판타지로 감금된 사이
총성이 울리고
발을 내밀자
보폭만큼 비가 쌓인다
아니다 각오를 품고
과녁을 노리고 싶은 날들이 있다
나는 킬러이기에
우상을 거부하며
총을 쏜
자보다 총을 쏜 자의 배후를 의심한다
촛불의 원리로
혁명이라는 한 점을 향하여 한 점을 저격한다
교묘하게 흘러가는 잿빛
구름들
번개를 의심하라 구름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그림자 위로 내리꽂히는 햇빛
침묵을 깬 통증이
빛난다
희다
총잡이 / 이동호
며칠째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권총만
종일 만지작거린다
내 몸속에 총알이 가득 찰 때 마다
몸이 근질거리는 것은
내가 타고난 총잡이이기 때문이다.
난사亂射는
하수나 하는 짓이다.
나는 화장실 변기통을 향해 권총을 정조준한다.
총알에 맞은 물들이 튀어 올랐다가 축 늘어진다.
죽은 물은
관을 타고 정화조에 가 묻힌다.
정화조는 죽은 물들의 공동묘지이다.
며칠째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 속상했다.
은행에 강도가
침입했으면 좋겠다.
나는 종일 TV를 켜놓고 강도를 응원하며,
그가 영원히 잡히지 않기를 신에게 빌 것이다.
나나 당신이나
시건장치를 풀 용기가 없는 자이다.
사타구니에 총을 차고 수시로 은행문을 드나들겠지만,
총을 한번 폼나게 제대로 빼어든 적
있는가.
텅 빈 통장의 잔고를 확인하며
총알이 박힌 듯 아프게 은행문을 돌아서 나왔던
불쌍한 당신이나 나나,
축 늘어진
총구를 세워 달마다 여자 몸 속의
둥근 표적을 향해 무수히 연습 사격을 한들
총알낭비 아니겠는가
총잡이들의 세계사
/ 안현미
세상은 흙먼지 날리는 무법천지의 서부와도 같다고 아이가 말했을 때 나는 지붕 위에 올라 앉아 있는 마네킹을 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건 아이의 염색한 머리 색깔과 마네킹의 머리 색깔이 같아서였는지도 모른다 피나 콜라빛 머리 색깔, 이방인처럼 낯선 아이의
말풍선 속에서는 욜라 짱나 담탱이 같은 해체된 모국어가 쉴 새 없이 튀어나오고 구겨진 교복엔 기름때가 얼룩져 있다 지구의 반대편에선 검은 오일
때문에 유혈 전쟁이 한창이지만 검은 오일이 장전된 총을 들고 짙은 선탠이 된 자동차 뒤꽁무니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아이의 총에선
불꽃이 일지 않는다 선탠이 된 차창이 스르르 열리고 가발 쓴 대머리 아저씨가 골드카드에 사인을 할 때 아이는 서부의 총잡이 존 웨인이 되어
조수석 짙은 화장을 하고 마네킹처럼 앉아 있는 제 또래의 여자아이를 구출하는 상상을 한다 다행히 그건 이 도시에서 무시로 일어나는 일이어서
아이는 제 총을 가발 쓴 대머리 아저씨의 머리통에 들이밀지 않고 만국기가 펄럭이는 주유소 앞 바보 같은 허풍선이 거인 풍선 인형만 펄럭펄럭
춤을 추고 있다
오발탄 / 신정민
203호에 이사 온 그는 총잡이다
그가 쓰는 권총의
방아쇠는
손가락이 아닌 구둣발로 잡아당긴다
문 열어! 탕, 탕, 탕열리지 않는 문을 향해 쏜 총성은
그의 마누라 귀에만 날아가
박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출입구를 같이 쓰는 열 세대의 모든 귀에 날아가 박힌다
귀를 관통한 총알은
벽에 부딪혀 어지럽게
튕겨나와
아이들의 인형을 쓰러뜨리고
거울을 깨부수고
담뱃재 수북한 재떨이를 날려버릴 것이다
왜 안 열어, 빨리 열란
말이야! 탕, 탕, 탕
이불을 뒤집어쓰고
벽을 향해 돌아눕고
꾸던 꿈을 마저 꾸기 위해 눈을 감는 밤
시끄럽다고, 잠 좀
자자고
방아쇠가 입에 달린 105호 남자, 한 소리 지를 법도 한데
어째 조용하기만 한 밤
총성과 총성사이
그 짧은
시간이 얼마나 깊고 고요한지
드나드는 사람 빤한 비둘기 맨션
한 번도 본적 없는 203호 사람들
제발 열어, 열란 말이야! 탕,
탕, 탕
들리지 않는 새벽의 총성에
끝내 문은 열리지 않는다
병산서원에서 보내는 늦은 전언 /
서안나
지상에서 남은 일이란 한여름 팔작지붕 홑처마 그늘 따라 옮겨 앉는 일
게으르게 손톱 발톱 깎아
목백일홍 아래 묻어주고 헛담배 피워 먼 산을 조금 어지럽히는 일 햇살에 다친 무량한 풍경 불러들여 입교당 찬 대청마루에 풋잠으로 함께 깃드는 일
담벼락에 어린 흙내 나는 당신을 자주 지우곤 했다
하나와 둘 혹은 다시 하나가 되는 하회의 이치에 닿으면 나는 돌 틈을 맴돌고
당신은 당신으로 흐른다
삼천 권 고서를 쌓아두고 만대루에서 강학(講學)하는 밤 내 몸은 차고 슬픈 뇌옥 나는 나를 달려나갈
수 없다
늙은 정인의 이마가 물빛으로 차고 넘칠 즈음 흰 뼈 몇 개로 나는 절연의 문장 속에서 서늘해질 것이다 목백일홍 꽃잎
강물에 풀어쓰는 새벽의 늦은 전언 당신을 내려놓는 하심(下心)의 문장들이 다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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