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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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계간「시와표현」신인상 당선작
공기의 허파는 얼마나 큰가 외 4편 / 신미애
갇힌 공기는
탄력적이지 누르면 물러섰다가 몸을 부풀려 원형으로 되돌아오지 물렁해서 쉽게 상처를 받지만 회복이 빠른 유전자들, 투명날개를 가진 에어air,
1리터의 무게는 1.29g 새끼손가락 끝에 걸 수 있는 체중으로 나른한 하품이나 할 거라 생각했지 그러나 공기는 무척 분주해 틈을 찾아 스미는
공기 내 몸속의 캄캄한 길도 알고 있지 집집마다 끓어 넘쳐 그을린 매캐한 아침저녁을 네모난 창문 밖으로 밀어내면 덥석 받아 안고 제 싱싱한
살점을 뭉텅 떼어주지 비리고 역한 것을 잘게 부수고 푸릇한 입자로 만들곤 하지 세상에서 가장 큰 필터, 공기의 허파는 얼마나 클까 공기는 탁해진
피를 걸러내며 새벽을 기다리지 세상의 문이 모두 닫히면 한밤중 손상된 공기의 장기臟器가 다시 재생되지
그 남자의 꽃밭
/ 신미애
그의 집엔 꽃이 피지 않는다 친구들이 몰려와 사라진 글라디올러스나 장미를 들먹거리면 시큰둥하게 기억이 잘 안 나,
그렇다면 수국이나 목련을 심지 그래, 바빠서 나중에… 그는 말을 흘린다
그의 꽃밭은 정말 사라졌을까 눈부신 꽃의 모가지가
어른거리고 눈살을 찌푸리며 그는 커튼을 친다 언제부턴가 햇살을 자르는 버릇이 생겼다 식탁, 소파, 침대에선 꽃향기가 나지않는다 너무 조용해 그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다 공기가 부딪히는 소리, 맥박소리, 자박자박 어둠이 걸어오는 소리, 거실에 무성한 말만 떠다닌다
얼마
전까지 그는 완벽했다 넘쳐나던 웃음과 나른하게 들뜬 공기를 믿었다 이름을 지우니 웃음도 차가워졌다 안녕! 붉은 입술이 가버렸다 갑자기 길이
끊어진 느낌, 말이 짧아지고 목덜미가 길어졌다 입술에 찍힌 무늬가 희미해졌다 시간이 고인다 술잔을 기울이면 까르르 웃음소리가 쏟아진다 멍하니
텔레비전을 응시하며 소파에 쪼그려 눕는다 벨은 울리지 않는다
등의 용도 / 신미애
신이 사람을 만들 때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걷는 것을 완성하니 너무 피곤했다
잠시 일손을 놓고 보니
사람에게도 쉴 곳을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친
몸을 눕히기 좋은 평평한 바닥을 생각하다가
넓적한 등을 만들게 되었다
그런데 조상들은 편히 쉬라고 만들어준 등 위에
삶의 무게를 얹어두었다
땔감을 지고 볏단을 나르고 우는 아이를 업어 포대기로 동여맸다
평생 지고 있던 등짐을 내려놓은
후
나무 관에 누워 비로소 굽은 등을 폈다
나는 그 등을 노동에 써 본 적이 없다
아이는 유모차에 태워 밀고
다녔고
등은 아이에게 잠깐씩 놀이터로 내주었을 뿐
내 등은 철저하게 게으름을 도와주기 위한 곳
등을 포근히 받아주는 소파에
기대
텔레비전이나 책을 보다가 온몸에 잠을 품기 일쑤다
나는 신의 뜻에 따라 살고 있다고
믿는다
스테이크 결혼식 / 신미애
늘어선 화환의 호위를 받으며 말쑥한 양복을 따라간다 신부와의 거리는
값으로 계산되고 악수를 나누면 일차 임무는 끝낸 것, 은은하게 빛을 쏟아내는 샹들리에와 꽃으로 치장한 무대, 하얀 냅킨, 은빛 포크와 나이프가
정갈한 원탁 정중한 모자와 핸드백이 둘러앉는다 어색한 분위기를 지우려 앞과 옆이 가벼운 목례를 교환한다 교과서 목차 같은 의식엔 복제가 무성하다
비슷비슷한 언어와 무감동의 설교가 흘러내린다 지루한 표정이 떠다닌다
예상대로 주례는 진부하고 신부는 지나치게 화사하다 식순에
맞춰 나비넥타이가 들고 온 스테이크, 이 고기는 어디서 왔을까 질긴 고기를 열심히 씹는다 갈색소스는 시큼하다 혀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식사,
사회자가 건배를 외치자 낯선 잔을 부딪칠 때 어설픈 웃음이 잠시 머문다 웃으며 불편을 삼킨다 하객들은 신랑 신부의 무게를 혓바닥에 올려놓는다
접시를 비우기 전 축하의 장면들, 하객의 웃음소리가 벌써 삭제되었다 포크에 매달린 고기를 마저 밀어 넣고 커피를 마신다 성실하게 의무를
수행했다
피아노와 대화하는 방식 / 신미애
건반은 악기의 성대,
피아노가 목을 풀고 있어요
간질간질 라일락을 만지는 소리가 섞여있어요
옆집 소녀가 손가락으로 말을 걸어요
내 생각은 건반을 따라가며 흑과 백으로
확장되지요
높낮이로 결정되는 악기의 감정이
내 귓속으로 뛰어들면 단단한 아침이 금세 말랑해져요
프라이팬에서 지글지글
계란프라이가 익어가고
늦잠 자는 당신의 볼에 입을 맞출 수도 있어요
나팔꽃덩굴을 한 바퀴 둘러보고
맨드라미 모가지를 스치며
걸어오는 소리
슬픔의 질량이 줄어들어요
창문에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소리들이 잎사귀에 떨어져요
흘러내리는 소리들을
기억의 서랍에 보관해두지요
아침밥상에 젓가락행진곡을 버무려 올려놓으면
장조의 음표들이 아삭아삭 씹혀요
소녀는 악기에게 말을
걸고
소리는 나팔꽃에게 전달되고 꽃은 나와 합쳐져요
이것은 피아노가, 세수를 마친 아침과
재미있게 대화하는 방식이에요
심사평
시적긴장으로서의 심미審美를 기준으로
예술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과 행복이며 수단은 사물과 삶에 대한 심미審美를 통해서 이다. 시도 예술의 한 부분이며 어떤 의미로는 예술의 전체이기에 작품에
대한 판단기준은 심미審美가 일차적인 기준이 된다. 여기에 그 작품이 시적긴장을 통해 인간의 본질과 행복에 대한 문제제기를 얼마나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관점이 작품을 판별하는 기준이 된다. 비유와 알레고리와 상징 같은 수사는 시적긴장을 확보하고자 하는 수단일 뿐 시적긴장으로서의 심미가
총체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제2회「시와 표현」신인상으로 신미애의 「공기의 허파는 얼마나 큰가」의 4편을 결정해서 독자들에게 선
보인다. 응모작품을 무기명으로 분류해서 심사위원 모두가 채점하는 방식으로 심사를 진행한 바 신미애의 하기 작품이 최고점을 받았다.
신미애의 작품에서 가장 참신한 시각을 드러낸 작품은「공기의 허파는 얼마나 큰가」이다. 이 작품은 우리가 일상으로 호흡하는 공기를 소재로 해서
인간의 허파가 아닌 ‘공기의 허파’라는 역발상으로 공기의 자정작용filter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했다. 구체적인 표현으로 상투적인 언어를
넘어서 있다는 점도 좋게 보인다.
신미애의 작품은 이 작품 외에도 「그 남자의 꽃밭」에서는 이야기를 끌어가는 안정적인 솜씨를「등의
용도」에서는 ‘등’이라는 몸의 소재를 통해 만만치 않은 주제의식을 보여준다. 심사위원들의 종합의견으로 제 2회「시와 표현」신인상으로 결정된
신미애 시인의 당선을 축하하며 앞으로의 활발한 시작활동을 기대한다.
심사자 : 김백겸. 이재무. 박찬일
커튼
/ 마경덕
커튼이 접힐 때 속지처럼 끼어있는 허공도 함께 접힌다
커튼을 물고 있는 고리도 함께 접힌다
제 몸에
주름이 잡히는 순간, 커튼은 긴장한다
동시에 안팎이 긴장한다
장막을 걷어내고
일초 만에 거실로 이동하는 앞산
찰나의
마술이다
속도가 없는 마술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동안 빛의 통로가 차단되면
집의 눈꺼풀은 무거워지고 생기를
잃어간다
늘 뒤편이 있어 커튼의 주름은 사라지지만
접혀있을 때가 제 얼굴이다
그는 여러 장의 배경을 가지고 수시로
표정을 바꾼다
그는 안이면서 바깥에 민감하므로
누군가 허리를 잡아 묶을 때 안심한다
커튼의 힘은 주름의
힘
하늘이 검은 휘장을 치는 것도 모두 주름의 힘
한 바퀴를 돌면 저녁이 된다
이처럼 부드러운 관절을 본 적이 없다
함부로 뛰어드는 바깥
커튼이 있어, 나는 대낮에 태어났다
<시와표현> 2012년 겨울호
두부 / 김영미
1.
그러니까 상고시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총인구수를 알고 싶다면 두부를 먹어본 사람의 수를 세면 되리라
2.
여기에 두부가 있다 무색무취에다 자의식이 없는
두부는 돼지비계에 붙고 김치에 붙고 쓸개와도 어울린다 어떤 맛도 주장하지 않는 두부는 모든 맛과 거리를 두고 있어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다
두부는 그냥 두부일 뿐, 아마도 중용이란 낱말에 혀를 대어보면 십중팔구 두부맛이 나리라 네모였다가 네모가 아니다가 형이 으깨져 동그랑땡이 되어도
그대로 무아무상이다 반야심경을 푹 우려낸 물에 간수를 넣어 굳힌다면 아마 두부가 되리라
3.
두부쯤이야 단숨에
짓뭉개버릴 수도, 심장 깊숙이 칼을 꽂을 수도, 나는 두부 앞에서 당당하다 젓가락으로 모서리 한 점을 건드려 본다 기다렸다는 듯 두부는 스스로
제 살점을 뭉툭 떼어 젓가락 쪽으로 옮겨 앉는다 칼로 잘라본다 칼이 닿자마자 두부는 온몸으로 칼을 받아들여 칼의 길이 되어버린다 큰 육모, 작은
육모, 조각이 난 두부 어디에서도 칼의 흔적, 칼의 상처를 느낄 수 없다 어느 칼잡이가 칼을 받아내는 솜씨가 이러할까 고수 중에
상고수다
4.
온두부에다 연두부 연두부에다 순두부 두부는 연하고 순하다 따뜻하고 착하다 그래, 두부야,
그래서 두부야 그러니까 두부여 무엇이라고 이 두부놈아 아이구 두부님 어이구 두부시여 이제, 나의 화두는 두부이다
채석강을 읽다 /
나혜경
차곡차곡 쌓아놓기만 했지 한 권도 빼주지 않는
저 수만 권의 전집
한 권 슬쩍 하려다가 열 손가락 손톱 다
빠져버릴라
천년만년 정박 중인 비릿함과 무르익은 놀빛과 재탕 삼탕 글 읽는 바다의 소리로 엮었다니
그 이력이 참
새까맣다
좀약 한 알 쓰지 않고 멀쩡한
비 맞아 젖어도 못쓰게 된 적 없는
파도 떼의 몰매에도 무너진 적
없는
정정한 틈새 각주인 듯 삐죽, 풀꽃 한 송이 달려 있다
요철(凹凸)이 있어 점자책 같기도 하고,
그럼
마음 끝으로 더듬어 읽기라도 했단 말인가
펴 보지 않고도 저 책더미 앞에서 시구를 받아쓰는 사람
여럿
보았다
채석강 / 서정임
그동안 틈만 나면 떡살을 얹어 온
대를 잇는 떡집이다
비 오는
날 거대한 떡이 익어가는 김이 오른다
먼 백악기부터 공룡들과 따개비와
고속도로를 달려와 거친 숨을 몰아쉬는
갯강구 같은 사람들이
드나들며
시간을 사서 들고가는 저 오래된 떡집
떡이 익어가는 냄새를 맡는다
내 어머니의 어머니를 읽는다
차마 멀리
썰물에 쓸려 보내지 못한 채
한 알 한 알 알갱이로 가슴에 박힌 사연을
켜켜이 쌓아둔
그리하여 끝끝내
변산반도(邊山半島)에서
떡시루에 김 모락모락 피워 올리는
그 뼈아픈 회한을 읽는다
두 팔 걷어 올리고
오늘도
거대한 시루에 떡살을 안치는
누군가의 손길이 바쁘다
시집<도너츠가 구워지는 오후> 2012년 문학. 선
2012년 제23회 인천시민문예대전 시부문 당선작
절벽의 귀 외 4편 / 조경숙
절벽에 귀를
달고
영월 다래산 가파른 바위에 붙어있던 석이石耳
수년을 눈 비바람을 견디며
이끼처럼 적막을 먹고 살았다
석이를
물에 담가놓고 보니,
천수를 다 산 것처럼 야들야들 순해져
담아 둔 소리를 꺼내 놓는다
산 꿩의 울음소리, 도토리 구르는
소리
달빛이 걷는 소리 흘러나온다
저 귀에 저장된 하늘은 얼마일까
쫑긋 세운 배곯은 귀
명절이 되어도 연락이
닿지 않는 오라버니가 생각난다
평생 절벽에 붙어 마른 목을 축이며
기다림에 검게 타버린 시간들
허약한 오라버니가 줄을
타고 따던 석이
줄을 잡던 손이 떨리기도 했었다
마른 귀를 물에 담그니
반백이 된 오라버니 목소리가 들려온다
주전자 꽃 / 조경숙
대동반점 짜장면을 먹고 놓고 간 꽃다발
버릴까 말까 망설이다 주전자에
꽂았다
주인을 잃은 풀죽은 모습, 그러나
삼 년을 무사히 마쳤다고 환하게 웃는다
누군가의 가슴에 안겼던
졸업꽃다발
줄기 끝에서 축하의 말이 피어난다
환하게 피어난 열 개의 웃음
보리차만 끓이던 주전자가 호사를
누린다
오가는 사람들 입맛을 독차지한
단무지 보다 노란 장미꽃
은은한 향기가 배어나온다
어서 배달이나
다녀오라고 코를 박는 김군의 등을 떠민다
꽃향기 한 그릇 철가방에 담겨
203호로 배달되었다
주전자가 흘리는
보리차 향처럼
그 아래 흩어진 꽃향기 한 움큼
잠시 머물다갈 주전자 속 안개꽃,
수증기 같은 하얀 웃음이 온종일 끓고
있다
드럼 치는 남자 / 조경숙
음악이 밥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중국집 요리사가 된
그는
드럼 치는 남자였다
오늘도 하얀 밀가루 포대를 악보처럼 펼쳐놓고
부드러운 저음으로 반죽을 시작한다
길고 짧게 후려치는
손목의 힘, 점점 옥타브가 길어지고
높고 낮은 음표들이 태어나 오선지에 앉을 시간
가닥가닥 갈라지는 반죽들
그는
붉은 닭 벼슬 위생모를 쓰고 경쾌한 연주에 몰입한다
어떤 요리를 할 것인가
때맞춰 절정을 찾아야한다
드럼 속으로 들어간 그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
사라진 먼 꿈을 바라보며 가슴을 치던 남자,
입에서 뱉어지던 맵고 아린 소금기,
세상이
바닥으로 그를 후려칠 때
그가 미끄러지는 것을 수 없이 보았다
사분음표 국자를 들고
드럼을 두드리듯 요리를 하는 남자
웅장하고 장엄한 바다 심해의 삼매경 삼선짬뽕,
쫄깃한 음정과 음표를 넣어 짜장을 볶는다
이제 손님들은 그의 작품을
먹고 즐겁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드럼을 치는 그는,
저녁 마다 드럼을 지고 집으로 간다
백도라지 /
조경숙
지리산에서 별들의 웃음을 보았다
소중하고 비밀스러운 것들은 계곡 어디쯤 두는 걸까
힘들게 오르는 산행
길
흩어진 몸 매무새를 여미고
나는 세상의 모든 웃음은 흰색임을 알았다
저 꽃을 보석이라고 부를까
별이
꽃으로 내려와
한낮에도 저물지 않고 오각 꽃이 피었다
어머니는 저 별을 다려먹고 기침이 멎었다
나도 이제 어느덧
쉰,
이제 뿌리에 쓴맛을 알고 있다
나뭇잎 유서 / 조경숙
나뭇잎 한 장이 떨어진다
저것은
가을의 유서
나뭇잎 마다 바람을 찍어 쓴 글씨가 들어있다
바람에 흔들렸던 시간
초록을 달았던 찰나의 환희
열매의
시간은 삭제되고
가을은 빈손이다
이제는 눈가의 물기를 말리는 시간
시력이 흔들리는 꽃들에게
나누지 못한 말
한마디 허공에 걸어둔 채
계절은 멀리 떠날 채비를 서두른다
다시 날이 가고, 바람이 불고, 밤이 온다
그 밤 위에
이슬이 온다
나뭇잎 유서를 받아 읽은
텅 빈 하늘
어느 방향이든 한 줄만 긋고 지나가는 새의 발자국처럼,
그 역시 알
수 없는 저쪽 길을
그에게 묻는 마지막 일이다
운문부 심사평
의미부여의 상상력으로 새로움의 세계를
먼저 인천시민문예대전에 응모한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시 부분에 응모한 작품은 250여명이 넘어 예선과 본선으로 나누어 심사를
하였다 전체적으로 수준 있는 작품이 보였다.
시의 참맛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대체로 네 가지로 생각해 본다. 그것은 상상력과 더불어
참신성이 있느냐 하는 요건과 언어적 형식화로서의 재미성이 있거나, 아니면 심금을 울리는 무슨 감동을 준거나, 흑은 통찰의 깊이를 보여 줘야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작가로 성장하는 가능성이나 현대시로서 품격을 갖추고 있는지 등 여러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독자들은
시를 접할 때, 크게 무슨 새로운 것이 있나, 혹은 무슨 즐거움을 주나, 하는 이런 것들을 충족하지 않는다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만큼
독자들의 시를 보는 눈은 고단수급의 능력 있는 독자들로 바뀌었다. 옛날의 치기어린 감성의 표백이거나 관념적 일상을 막연하게 풀어내는 값싼
서정시는 식상한 지 이미 오래다. 말하자면 현대 서정시로서의 작품성이 어느 정도 확보되어야만 한다는 얘기다.
좋은 작품은 행간에서
독자의 상상을 끌어들여 충만한 사유를 체험케 한다. 그래서 독자는 시인이 드러낸 정서에 관여하면서 삼라만상과 인생만사에 새로운 관계를 맺어간다.
어쩌면 스님이 참선 할 때의 깊은 생각이나 자연의 비밀을 새롭게 해석하는 철학자의 시선으로 유도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신을 사물로
연결하고, 사물을 다른 사물로 연결하여 인식을 확장해가는 능력이 시인의 사명이고 시인이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시 부분
당선작으로 선정된 조경숙의 <절벽의 귀>는 상상의 힘이나 통찰력에서 타 작품을 능가하는 문학성이 보인다. 이 작품은 바위에 붙어있는
석이(石耳)를 소재로 쓴 시인데, 석이라는 사물 존재의 숨은 의미를 드러내면서도 회억적 연상의 에피소드로 전개되는 형상화의 완성도가 탁월하다.
특히 마지막연의 “ 마른 귀를 물에 담그니/ 반백이 된 오라버니 목소리가 들린다.” 라는 결구처리에 있어서는 애상적 감동으로 다가왔다. 남다른
상상의 힘을 보여준 <주전자 꽃>에서도 의미부여와 함께 감각적 시어가 구사되어 시적 재미를 읽을 수 있었고 감동으로 다가왔다.
<드럼치는 남자>는 긴장감이 좀은 떨어지나, 드럼 치는 남자가 중국요리사로 전업하여 요리를 만들어가는 에피소드를 담아내고 있는데,
요리과정에서 드럼 리듬을 재치 있게 용해시킨 착상이 신선했다. 하지만 <나뭇잎 유서>,<백도라지>는 형상화의 치밀성과
초점의 선명성, 역동성이 요구되었다.
당선작에 들지는 못했지만 전 규의 <마릴린 먼로>, <인간환풍기>,
<장님 물고기 식사법>, <첫사랑>이란 시제의 시편은 퍽 재미있고, 언어구사력, 형상화에서 호흡이 길어 눌을 끌었고 , 또
제재를 펼쳐가는 힘이 좋앗다. 하지만 시에는 텐션의 미, 압축성이라는 점, 너무 언어를 늘어놓지 말고 절제하는 묘미도 있어야 한다. 좀 더
숙련미를 보인다면 대성할 시인으로 평가된다.
그 다음에 눈에 띄는 작품으로는 유하림의 <곰팡이꽃> 등의 시편들인데, 사물을
파고 드는 힘은 좋으나,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통찰의 심안(心眼)이 부가되었으면 했다. 시적 전개의 역동성과 더불어 하나의 날카로운 시점의
결구 처리도 감안하길 바란다. 심은식의 시편 가운데 <파꽃>, <누룩뱀>이란 시도 비교적 참신했으나 날카로운 비약과 발전의
상상력이 요구되었고, 여타의 작품에서는 형상화로서의 구체성, 초점의 선명도가 아쉬웠다. <송편 빚기>, <고추 말리기>를
쓴 이창섭의 시편들도 동심적 상상력으로는 재미있으나 시상을 발전시켜 나가는 발효의 힘이 부족했다. 그리고 이정숙의 <연>은 의미부여의
육화가 첨가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시와 산문은 분명 다르다. 시는 IMF시대의 예술이다. 말하자면 적은 언어를 써서
최대의 효과를 보는 언어예술이 시인 것이다. 그러니까 독자의 참여에 의해 행간(行間)에서 벌어지는 상상력까지 감안하여 밀도감 있게 형상화하는
고등정신 능력을 발휘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번 인천시민문예대전에 응모해주신 분들게 가시 한 번 감사드리고 비록 입상하지 못했더라도
계속 정진하여 모든 분들이 작가로 대성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문광영, 정승열, 조영숙
우주인 2 / 김기택
몸무게 없는 몸으로 그는 검푸른 창공에 홀로 떠있습니다. 깊디깊은 허공에 익사하여 온통 부력만 남은 무중력 하늘에 둥둥
떠다니고 있습니다. 벌어진 입과 귓구멍 콧구멍에 무한을 가득 채운 채 끝없이 투명한 공기에 매장되어 있습니다. 막힘없이 펼쳐진 하늘에게 목
졸리고 숨구멍 막히고 팔다리 결박되어 우주 쓰레기들과 함께 떠돌고 있습니다. 놀란 입을 벌리고 눈을 허옇게 뒤집고 있는 공포는 아직도 우주선에서
조난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영혼과 천연 방부제가 배합된 우주 공기는 오래 묵은 미라를 칭칭 감아 하늘 높이 별처럼 띄워놓고
있습니다
시집 <갈라진다 갈라진다> 2012년 문학과지성사
아침 / 문태준
새떼가
우르르 내려앉았다
키가 작은 나무였다
열매를 쪼고 똥을 누기도 하였디
새떼가 몇 발짝 떨어진 나무에게
옮겨가자
나무상자로 밖에 여겨지지 않던 나무가
누군가 들고 가는 양동이의 물처럼
한번 또 한번 출렁했다
서있던
나도 네 모서리가 한번 출렁했다
출렁출렁하는 한 양동이의 물
아직은 이 좋은 징조를 갖고 있다
눈먼 사람 / 김기택
똑똑 눈이 땅바닥을 두드린다
팔에서 길게 뻗어 나온 눈이 땅을 두드린다
땅속에 누가 있느냐고 묻는 듯이
곧
문을 활짝 열고 누가 뛰어나올 것만 같다는 듯이
눈은 공손하게 기다린다
땅이 열어준 길에서 한 걸음이 생겨날 때까지
팔과 손가락과 지팡이에서 돋아난 눈이 걷는다
한 걸음 나아가기 전까지는
거대한 어둠덩어리이고 높은 벽이고 아득한
낭떠러지다가
눈이 닿는 순간
단 한 발자국만 열리는 길을 걷는다
더듬이처럼 돋아난 눈은 멀리 바라보지 않는다
하늘을 허공을 올려다보지 않는다
나아갈 방향 말고는 어느 곳도 곁눈질하지 않는다
눈에 닿은 자리, 오직 눈이 만진 자리만을
본다
어쩌다 지나가는 다리를 건드리거나
벽이나 전봇대와 닿으면
가늘고 말랑말랑한 더듬이 눈은 급히 움츠려든다
눈이 두드린 길이 몸속으로 들어온다
온몸이 눈이 되고 길이 된다
허리가 잔뜩 줄어들었다가 쭉 펴지며 늘어난다
몸 안으로 들어온 길만큼
한 평생의 체중이 실린 또 한 걸음이 나아간다
조문의 방식 / 이해원
여자의
울음이 나비리본으로 꽂혔습니다
남자의 슬픔은 두건으로 얹혔습니다
조문객은 그가 뿌린 씨앗, 항아리에 담긴 한 아름의 조문이
세상에서 맺은 인연을 기다립니다
의례적인 위로가 켜켜이 쌓입니다
슬픔의 양과 관계없이
꽃 한 송이와 봉투 하나로 조문은
완료됩니다
울음이 묻지 않은 국화 위에
습관처럼 나도 꽃 한 송이 얹었습니다
가벼운 조문들이 육개장 한 그릇으로 허기를
달래고
빛이 환한 문으로 빠져 나갑니다
화환을 들고 온 사람은 젖지 않았습니다
휘발성인 슬픔은 곧 시들겠지요
지금은 괄호의
시간
묶인 나비는 꽃을 보고도 날지 못합니다
이 방식은 사나흘간 이어집니다
<문장웹진> 2012년 11월호
가위 / 최태랑
두 개의 쇠붙이 엇눕혀 한 쌍인 가위
갈라놓는 본성에 두 쪽이 난다
늘 무엇인가 자르려고
입을 벌리는 가위
상반된 두 날이 서로 등을 비비는 순간
양편으로 나뉜 빛과 어둠,
양변의 길이만큼 상처를
남긴다
자르지 못해 녹이 슨 습관
도박과 담배를 가위로 잘라볼까
숱한 맹세와 다짐만
예리한 가윗날에 잘려나갔다
가위가 선택한 어느 수반에는
푸른 피를 토하고 죽은 꽃들이 서있고
가위가 다녀간 사과나무는 상처위에 꽃을 피웠다
남겨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에
길들여진 차갑고 냉정한 가위
때로는태반을 잘라 새로운 생명을 얻기도 한다
스며드는 것 /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등판에는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쪽으로 웅크렸으리라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어찌할 수 없어서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한 때의 어스름을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불 끄고 잘 시간이야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2008년 창비
인스턴트 구름 / 마경덕
그는 비의 씨를 뿌리는 사람, 비행기를 타고 구름나라로
올라갔어요
더는 기다리지 못해
직접 하늘과 담판을 지으려고,
구름이 말라 건조한 하늘에는
인스턴트 구름을 띄워야
해요
지금쯤 날씨를 조작하려고
말라버린 구름의 심장에 드라이아이스를 뿌리고 있을 거예요
구름을 냉각시키면
즉석에서 검은 구름이 태어날지도 몰라요
부력은 위험해요
오랫동안 미숙아인 구름방울만 태어났어요
체중미달인
구름의 아이들
얼음의 씨앗*을 먹여 무거운 빗방울로 키워야 해요
폭발적으로 불어난 구름입자가 중력에 걸려
추락하도록,
빗방울이 양떼처럼 와글와글 몰려들게
모든 교회의 종소리를 모아 일시에 흔들어 볼까요
주먹만 한 구름을
키운 선지자 엘리야를 불러 올까요
구름을 찾아 씨를 뿌려야한다고 그는 아직도 하늘에 떠있어요
누구라도 인스턴트 구름을
발명해주세요
오늘밤 기형의 하늘을 캡처해서
물통에 넣어둘게요
*빙정핵, 대기 중의 미립자로서 빙정을
형성하기 위한 핵. 고체의 작은 입자.
압화壓花 / 마경덕
매몰된 가을이 발견되었다
책을
끼고 그곳을 지나갔을 때
유난히 뺨이 붉은 꽃이 틈으로 뛰어들고
45쪽과 46쪽은 닫혔다
붉은 물을 토하며
서서히 종이처럼 얇아지는 동안
책은 책 밑에서 피를 말리고 있었다
계절이 계절을 덮치듯이
시간의 두께와
어둠에 내 기억은 갇혀 있었다
방치된 것들은 대부분 변형을 일으킨다
책갈피 사이
책의 생각과 엉겨있는 꽃의 얼굴
꽃들이 선호하는 죽음은 태어난 자리에서 치르는 풍장이다
압사壓死를 두려워하는 꽃들
한 권의 책으로도
죽일 수 있는 게 많다
<시와미학> 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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