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산등성이 / 고영민 본문

현대시모음

산등성이 / 고영민

연안 燕安 2013. 1. 15. 08:30
산등성이 / 고영민


팔순의 부모님이 또 부부싸움을 한다. 발단이 어찌됐든 한밤중, 아버지는 장롱에서 가끔 大小事가 있을 때 차려입던 양복을 꺼내 입는다. 내 저 답답한 할망구랑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죄 없는 방문만 걷어차고 나간다. 나는 아버지께 매달려 나가시더라도 날이 밝은 내일 아침에 나가시라 달랜다. 대문을 밀치고 걸어나가는 칠흑의 어둠 속, 버스가 이미 끊긴 시골마을의 한밤, 아버지는 이참에 아예 단단히 갈라서겠노라 큰소리다. 나는 싸늘히 등돌리고 앉아 있는 늙은 어머니를 다독여 좀 잡으시라고 하니, 그냥 둬라, 내가 열일곱에 시집와서 팔십 평생 네 아버지 집 나간다고 큰소리치고는 저기 저 등성이를 넘는 것을 못봤다. 어둠 속 한참을 쫓아 내달린다. 저만치 보이는 구부정한 아버지의 뒷모습, 잰걸음을 따라 나도 가만히 걷는다. 기세가 천 리를 갈 듯 하다. 드디어 산등성, 고요하게 잠든 숲의 정적과 뒤척이는 새들의 혼곤한 잠속, 순간 아버지가 걷던 걸음을 멈추더니 집 쪽을 향해 소리를 치신다. 에이, 이 못된 할망구야, 서방이 나간다면 잡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이 못된 할망구야, 평생을 뜯어먹어도 시원찮을 이 할망구, 뒤돌아 식식거리며 아버지 집으로 천릿길을 내닫는다. 지그시 웃음을 물고 나는 아버지를 몰고 온다. 어머니가 켜놓은 대문 앞 전등불이 환하다. 아버지는 왜, 팔십 평생 저 낮은 산등성이 하나를 채 넘지 못할까.

- 시집「 악어 」2005년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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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노부부의 부부 싸움 아닌 부부싸움을 지켜보노라니 입가에 잔잔하게 번지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을 듯 하다. 한 평생 희노애락을 같이 해 온 부부의 연이란 게 저런 것일까. 마음에 안들면 한량없이 밉고 원망스럽다가도, 없으면 그립고 궁금해지고 걱정되는 것이 또한 어쩔 수 없는 부부의 연이 아니던가. 옛 어르신들은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산등성이 하나 쉬이 넘지 않는 평생의 금도가 있었고, 그 지아비를 환한 전등불로 말없이 기다리는 따뜻한 마음을 가슴 밑바닥에 간직하고 있었으리라. 손바닥 뒤집듯 쉬이 내쳐지는 오늘날의 손쉬운 인연에 대하여, 그리고 가벼운 만남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게 하는 가슴 따뜻한 시이다. 그리고 독자를 ‘산등성이‘로 끌고 가는 시인의 시적인식이 뛰어나고, 참 기발하다 [양현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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