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시 : 소수점 이하의 일인칭들 : 2007년 시들 / 이광호 본문

좁은 산책로

시 : 소수점 이하의 일인칭들 : 2007년 시들 / 이광호

연안 燕安 2011. 12. 12. 23:56

 

 

시 : 소수점 이하의 일인칭들 : 2007년 시들 / 이광호

 

2007년의 한국시는 이른바 ‘2000년대적’인 시적 움직임이 몇 가지 국면에서 심화되고 정리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런데 ‘2000년대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한국현대시의 역사적 맥락을 하나의 구조와 모형으로 의미화하는 것은 위험스럽지만, 하나의 가설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한국현대시의 ‘현대성’ 혹은 ‘시적 현대성’을 구성하는 구성인자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서정적 주체성’의 확립, 혹은 ‘서정적 자기동일성’의 정립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서정시의 세계인식의 주체로서의 개별적인 일인칭 시적 자아의 구축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현대시는 시적 자아를 개인적․사회적 주체로서 구성하는 미학적 동력을 만들어왔다. 하지만 동시에, 그와 함께, 이 시적 주체화에 대한 회의와 해체의 작업 역시 동시에 진행됐는데, 그것은 ‘모더니즘’ 혹은 ‘모더니티’의 미학적 동력을 중시하는 시인들에게서 시적 자아의 내적 아이러니와 그 차이성을 포착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2000년대 초반의 젊은 시인들이 보여준 흥미로운 분열증적인 활력은 시적 자아의 주체성을 표상하던 ‘일인칭’의 신화가 거의 전면적인 수준에서 도전받는 상황을 보여준다. ‘전면적인 수준’이란? 예를 들면 서정시의 단일한 목소리를 만들어내던 ‘나’ 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그야말로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물론 2000년대적인 공간에서도 전통적인 의미의 서정시는 계속 발표되고 있으며, 그것의 본래적인 생명력은 여전히 강력한 것이다. 문제는 그 서정시적 공간에서 역시 서정적인 의미의 ‘나’는 더 이상 ‘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의 서정적 동일성은 완벽한 자리에 있기 보다는 ‘타자’를 향해 보다 크게 열린다. 그래서 일인칭은 ‘1’이라고 하는 온전한 형태를 갖는 것 대신에 소수점의 존재로 분열된다. 소수점 이하의 일인칭은 정수(定數)가 되지 못하는 소수부의 자리에 속한다. 그곳은 일인칭이 ‘하나’로서의 자기존립의 동일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세계다. 이것은 두 가지 방향에서 이해될 수 있다. 우선 하나는 일인칭의 자기동일성의 권위와 독점성이 무너진 공간에서 일인칭은 무한수로 분열된다. 그 안에서 무한의 소수점의 세계가 다시 열린다. 또 다른 맥락에서 일인칭은 2인칭과 3인칭을 향해 개방된다. 주체와 대상이 명확히 구분되는 세계가 아니라 ‘나’, ‘너’, ‘그’의 세계가 뒤섞인 공간, 그곳에서 ‘나’는 이미 ‘너’와 ‘그’의 일부이거나, ‘너’와 ‘그’는 ‘나’의 일부다. 여기서 일인칭은 안으로 분열되고 밖으로 흩어진다. 바야흐로 치명적인 일인칭의 모험이 시작된 것이다.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김선우, <낙화, 첫사랑> 전문

 

이 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대가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이는 상황이 있다고 가정하자. ‘나’는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대를 부르거나 옷깃을 부둥키는 대신에 ‘나’는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생각하면서, 다만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다고 한다. 이를테면 ‘나’는 그대의 추락 혹은 자살의 목격자면서 방관자인 셈이다. ‘나’는 왜 2인칭 ‘그대’의 추락을 그냥 지켜만 보는 그런 존재일 수밖에 없는가?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두 번째 연에서 상황은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내’가 그대보다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아서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른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절벽의 그대를 왜 내가 붙들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절벽에서 그대를 붙잡는 대신에 ‘나’는 먼저 추락해 그대를 절벽의 밑에서 받아 안겠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자. 시의 마지막 행은 이런 해석을 심각한 혼란에 빠트린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라는 문장에서 ‘나’는 ‘그대’가 아니라, ‘나’ 자신을 받는다. 이것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몇 가지 맥락의 해석이 가능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시의 기본적인 담화의 상황을 이루는 1인칭 ‘나’와 2인칭 ‘그대’와의 관계가 일반적인 수준의 ‘나-그대’의 관계와는 다른 상황에 돌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추락하는 너-관찰하는 나’로 구성된 이 시의 상황은, ‘추락하는 너-먼저 추락하는 나’의 관계로 전환된 것처럼 보였지만, 또 한번의 전환을 거쳐 ‘추락하는 나-나를 받는 나’라는 기묘한 관계로 변이된다. 이 마지막 변이는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인칭적인 관계의 변환을 불러온다. 이 마지막 상황 때문에, 이 시의 첫 번째 장면은 다시, ‘내’가 본 것은 과연 ‘그대’인가 혹은 ‘나’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발생시킨다. 그 물음의 연장에서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라는 잠언적인 문장의 비밀이 조금 열린다. 여기서 ‘내’가 ‘그대’가 아닌 ‘나’자신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해도 될까? 물론 그렇게 말할 수는 있지만, 이 시의 울림은 그것보다는 크다.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라는 문장에서 드러나는 ‘모성적인’ 이미지를 보라. 이 모성은 다만 여성성의 일부로서의 제도적인 모성이 아니다. 이 모성은 ‘나’와 ‘그대’라는 인칭의 분별을 지우는 모성, ‘그대’를 포함하는 의미로서의 더 크게 열린 ‘나’를 받아들이는 모성적 존재의 탄생을 암시한다. 그러니까 첫사랑에서의 ‘낙화’ 혹은 ‘추락’의 사건은 ‘그대’의 사건이면서, ‘나’의 사건이고, ‘내’가 ‘나’와 ‘그대’의 추락을 받아 안는 존재로 거듭나는 사랑의 사건이다.

 

 

 

한 남자의 두 손이 한 여자의
양쪽 어깨를 잡더니 앞뒤로
마구 흔들었다 남자의 손이
여자의 살 속으로 쑥쑥 빠졌다
여자가 제 몸 속에 뒤엉켜 있는
철사를 잡아 빼며 울부짖었다
소리소리 질렀다
여자의 몸에서 마르지 않은
시멘트 냄새가 났다
꽃 피고 새가 울었다
―이원, <아파트에서 1> 전문

이 시는 또 어떤가? 아파트라는 일상적 공간에서 아마도 한 남자가 한 여자가 다투고 있는 듯이 보인다. 다투는 이유를 알 수 없음은 물론이고, 그것이 정말 다투는 것인지 판단하는 것도 쉽지 않다. 3인칭을 묘사하는 관찰자적인 시선은 그 장면 자체만 담백하게 제시한다. “한 남자의 두 손이 한 여자의/양쪽 어깨를 잡더니 앞뒤로/마구 흔들었다”와 같은 표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 상황을 지배하는 것은 한 남자의 물리력이며, 한 여자의 육체는 그 폭력의 대상이다. 폭력의 주체와 대상이라는 이분법 속에서 이 상황이 설명된다면, 이 시는 그것이 아무리 사실적으로 묘사됐다고 하더라도 다분히 산문적인 것에 머무를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 이 상황에서 폭력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적 육체가 움직이는 과정, 그 상상적 역동성이다.

“남자의 손이 여자의 살 속으로 쑥쑥 빠졌다”라는 문장에서, 한 남자의 물리력이 여성적 육체를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제시되더니, “여자가 제 몸 속에 뒤엉켜 있는 철사를 잡아 빼며 울부짖었다”라는 묘사가 등장한다. 여자의 울부짖음은 한 남자의 물리력에 대한 저항 이상의 의미를 가질 것이다. 남자의 물리력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비명’을 넘어서, 여자의 울부짖음은 남자의 물리력의 대상으로서의 자신의 육체라는 한계를 스스로 탈출하는 움직임이다. 그 탈출은 자기 몸속의 뒤엉킨 철사를 잡아 빼는 움직임 같은 것이다. 여자의 몸이 하나의 철골 시멘트 구조물 같은 것이라는 비유가 가능하다면, 철사는 그 구조물의 형태를 잡아주는 뼈대일 것이다. 여자가 철사를 잡아 빼는 것은, 그 구조물의 구조로부터 스스로를 빠져나오게 하는 동작이다. 여자가 그 몸의 구조물로부터 스스로 빠져나올 때, 남자의 물리력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육체는 사라진다. 여자의 몸, 그 시멘트 냄새 속에서의 “꽃피고 새가 우”는 시간은 그러니까 물리력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몸이 다시 낯선 생성의 시간에 진입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모든 움직임과 몸으로부터의 생성이, 1인칭 화자의 의미화 과정 속에서 또렷하게 결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아파트라는 일상적 공간에서의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육체의 접촉, 그 풍경으로부터 시작되어 그 풍경이 묘사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움직임으로 스스로 변이를 일으키는 과정을 보여준다.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면, 3인칭의 대상이 스스로 움직이면서, 다른 몸을 가진 언어를 만들어내는 사건. 그 사건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여자의 몸은 다른 몸이 되는, 다른 시간의 몸이다.

 

 

 

여자가 알을 낳는다
당집 마당으로 알이 떨어지고 쨍그랑, 소리가 난다
여자의 쩍 벌어진 가랑이 사이로 핏방울이 맺힌다
거품을 만들며 수군대는 핏방울들로 빨간 길이 난다

 

빨간 지붕, 빨간 양수, 빨간 흔들림-
엄마, 더러운 엄마, 나를 낳지 마
여긴 나의 알이 아니야
알을 깨고 발 없는 내가 도망치듯 태어난다

꿈처럼 흐느끼던 여자의 가랑이는 어디로 갔을까?
(엄마?)
발 없는 내가 손가락 끝으로 걷는다
비가 내리고
내 이마 위로 술 취한 물고기가 뛰어든다, 영영박힌다
주황색 화석이 되어버린 물고기는
내 이마 위에 살면서 날마다 죄를 짓는다

 

엄마는 한번도, 나를, 낳지 않았고
내가 버린 텅 빈 알 속에서는
밤마다 아홉 마리 뱀들이 서커스를 벌인다

―박연준 , <나의 탄생> 전문

 

젊은 시인 박연준의 첫 시집은 강렬한 몸의 시학을 선보인다. 이 시는 어떤 탄생의 순간을 묘사한다. 제목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그 장면은 ‘나의 탄생’이라고 명명되고 있다. 이 시의 일인칭 화자가 자신의 탄생의 순간을 묘사한다. 그런데 그 탄생의 묘사는 처음부터 기이한 방식으로 시작된다. “여자가 알을 낳는다”라는 문장에서부터 자신을 낳은 엄마는 ‘여자’로 자신은 ‘알’로 변형된다. 그러나 사건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핏빛의 강렬한 이미지들 사이에서 돌발적인 전언들이 튀어나온다. “엄마. 더러운 엄마, 나를 낳지 마/여긴 나의 알이 아니야.” 이 최초의 장면 속에서 ‘나의 탄생’은 하나의 치욕, 하나의 비극으로, 하나의 죄의식으로 채색된다. 그것은 결국 “엄마는 한번도, 나를, 낳지 않았고”라는 극단적인 부정의 말로 마감된다. ‘나’라는 일인칭의 탄생설화를 붉은빛의 기이하고 치욕적인 환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그 탄생의 자리에서 피 흘리는 여성적 몸의 사건을 드러낸다. 여자의 그 몸으로부터 태어났으나 그 몸으로부터 도망치는 또 하나의 몸, 그 새로운 몸은 자기가 태어난 몸을 부정하는 다른 몸이다. 그 도망치듯 태어나는 몸은 ‘나’의 탄생설화를 “술취한 물고기”와 “아홉 마리 뱀들의 서커스”가 있는 기이한 몽상을 만들어, 그것을 ‘도주’의 설화로 만든다. 그래서 도망치듯 태어난 ‘나’의 탄생은, ‘나를 낳지마’라는 핏빛 비명으로 얼룩져서, 탄생이 도주이자 비명이 되는, 강렬한 여성적 몸의 사건 하나를 각인시킨다. 자신의 탄생 설화를 도주의 사건, 부재의 사건으로 만드는 일인칭의 목소리는 일인칭의 자기근거를 그 기원에서 무너뜨린다.

 

 

 

배가 고파서 문득 잠에서 깨었을 때
꿈속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미안했다 나하나 때문에
무지개 언덕을 찾아가는 여행이 어색해졌다

나비야 나비야 누군가 창 밖에서 나비를 애타게 부른다
나는 야옹 야아옹, 여기 있다고, 이불 속에 숨어
나도 모르게 울었다
그러는 내가 금세 한심해져서 나비는 나비가 무슨 고양이람, 괜한 창문만 소리 나게 닫았지

압정에, 작고 녹슨 압정에 찔려 파상풍에 걸리고
팔을 절단하게 되면, 기분이 나쁠까

느린 음악에 찌들어 사는 날들
머리빗, 단추 한 알, 오래된 엽서
손길을 기다리는 것들이 괜스레 미워져서
뒷마당에 꾹꾹 묻었다 눈 내리고 바람 불면
언젠가 그 작은 무덤에서 꼬챙이 같은 원망들이 이리저리 자라
내 두 눈알을 후벼주었으면.

해질녘, 어디든 퍼질러 앉는 저 구름들도 싫어
오늘은 달고 맛좋은 호두파이를 샀다
입 안 가득 미끄러지는 달고 맛좋은 호두파이,
뱃속 저 밑바닥으로 툭 떨어질 때

어두운 부엌 한편에서 누군가, 억지로,
사랑해…… 하고 말했다.

―황병승, <멜랑콜리호두파이> 전문

 

시의 시작은 일상적 공간이지만, 잠에서 깨어난 그 시간으로부터 다시 새로운 몽환적인 이미지들이 시작된다. 그 시간들을 지배하는 것은 이 시의 제목처럼 ‘멜랑콜리’한 정서다. 멜랑콜리란 우울증, 혹은 조울증으로 명명되는 어떤 감정의 장애를 의미한다. 이 정서의 상태를 설명하기는 위해서는 어떤 이미지와 캐릭터를 동원해야 할 것이다. 근대 이후의 문학에서 이 멜랑콜리한 정서 혹은 인물은 어떤 열정과 감동으로부터도 자신을 분리시키는 정신적 귀족주의 혹은 댄디적 감성과 연결된다. 이 초연함과 무심함의 정서야말로 보들레르 이후 도시적 삶의 권태와 대결하는 미적 포즈의 표상이다. 이 시에서도 어떤 흥분과 열정으로부도 자신을 격리시키는 시적 자아가 등장한다. 창밖에서 고양이를 찾는 소리를 듣고 이불 속에서 ‘야옹’이라고 울어보지만 “금세 한심해지”고, “팔을 절단하게 되면, 기분이 나쁠까”라는 끔찍한 상상이 아주 가볍게 스쳐지나가고, “손길을 기다리는 것들”을 뒷마당에 묻어버린다. 그리고 이 모든 권태와 무심과 환멸을 견디는 방식으로 “달고 맛좋은 호두파이”를 산다. 호두파이의 달콤함과 멜랑콜리의 어둠은 이상한 방식으로 결합되지만, 그것이 멜랑콜리의 극복은 아니다. “어두운 부엌에서 누군가, 억지로,/사랑해.…하고 말했다”라고 쓸 때, ‘누군가, 억지로’에서 발견되는 그 정서적 익명성과 탈낭만성은, 이 시가 또 다른 하나의 멜랑콜리를 발명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근대적 멜랑콜리의 계승이 아니라, 그것의 다른 발명을 통해 이 멜랑콜리한 일인칭은 그 내면성을 스스로 소거한다.

 

 

작아지기 시작할 때까지만 작아지려고 해요. 나는 작은 사람, 더 작은 사람, 개, 고양이, 한 개의 손가락, 성냥개비,

나는 한 방울을 고집스럽게 바라봤어요. 찡그린 표정은 내 모든 주름에 스며 있어요. 인상적인 것, 빛, 고통,

처음으로 숨을 쉰 이후로 계속해서 숨을 쉬게 됐어요. 오오 시작은 그런 것이죠. 시작은 시작을 잊어버리고 마지막은 마지막을 모르고 엄마, 하고 첫 발음으로 불러봤댔자 소용없어요. 아버지라면 오 마이 갓!

작아지기 시작하면 시작된 거죠. 나는 더 작은 사람, 더 작은 개, 더 작은 도마뱀, 작은 목소리, 파동의 간섭, 만져지지 않은 하늘,

그리고 파동의 굴절, 만져지는 빗방울, 빗방울, 더 굵은 빗방울, 나는 돌풍과 함께 지나가는 소나기예요. 세계처럼 우산이 뒤집어진 작은 사람들, 유리창에 잠시 달라붙어서 나는 더 작은 동그라미들,

유리창 안쪽에서는 세 명의 아이들이 가위, 바위, 보, 가위, 바위,‥‥‥ 규칙과 역할을 정하고 있어요. 한 아이는 손바닥을 쫙 펼치고 사라진 동전에 대해 신비로운 거짓말을 늘어놓고

나는 끝까지 다 듣지 못했
― 김행숙, <더 작은 사람> 전문

 

이제 일인칭은 무한대로 작아지는 존재다. 더없이 작아지는 일인칭 존재의 끝은 어디인가? 작아지는 존재로서의 일인칭은 “개, 고양이, 한 개의 손가락, 성냥개비”와 같은 사소한 존재와 마찬가지며, “더 작은 개, 더 작은 도마뱀, 작은 목소리, 파동의 간섭, 만져지지 않은 하늘”과 같다. 그러나 이것은 일인칭에 대한 은유가 아니라, 더없이 작아지는 일인칭의 세계에 대한 환유다. 그래서 “시작은 시작을 잊어버리고 마지막은 마지막을 모르고 엄마, 하고 첫 발음으로 불러봤댔자 소용없어요. 아버지라면 오 마이 갓!”과 같은 진술 속에서 어떤 명료한 메시지를 발견해야 할 이유는 없다. 일인칭 주체의 서사 속에서 ‘시작과 끝’, ‘엄마와 아버지’의 세계는 주체의 근거가 되어주지 않는다. ‘시작과 끝’이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세계, 엄마와 아버지의 세계가 무너지는 공간에서 일인칭은 더 작은, 더 미미한, 존재가 된다. 그리하여 이 시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장면과 그 ‘신비로운 거짓말’이 더없이 작아진 일인칭이 발견한 마지막 이미지라고 해도, 그 장면은 결국 완성되지 않는다. 시의 마지막 문장이 끝내 완결되지 못하는 것처럼, 더없이 작아진 일인칭의 시 쓰기는 이 세계의 문장을 완성하지 못한다. 자기 안에서 무한의 소수점의 세계로 분열된 1인칭, 혹은 2인칭과 3인칭을 향해 개방된 1인칭의 시 쓰기는 완결되지 않는다. 그 완결될 수 없음으로 1인칭은 자기분열의 모험을 지속한다

◈ 筆者 이 광 호/문학평론가, 서울예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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