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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 본문

좁은 산책로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

연안 燕安 2011. 12. 13. 17:59

20세기 후반에 나타난 서양철학 사조.

 

철학사조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폭 넓은 회의주의·주관주의·상대주의적 특징을 보이며, 이성에 대한 총체적 의심이자 정치·경제적 권력을 유지·주장하는 데 필요한 이데올로기의 역할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주로 근대 서양사의 철학적 가정과 가치 및 지적 세계관에 대한 하나의 반작용이다. 서양사에서의 근대 시기는 대략 16세기와 17세기의 과학혁명의 시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를 말한다. 사실, 포스트모더니즘과 특징적으로 관련된 대부분의 원리들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일반 철학적 관점에 대한 직접적 부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 물론 그 관점들이 18세기에만 국한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관점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적 실체가 있다. 자연적 실체의 존재와 속성들은 논리적으로 인간에 대해 독립적이다. 즉 인간의 마음과 사회, 인간의 사회적 관습, 인간의 연구 기술에 대해 독립적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이런 관점을 일종의 순진한 사실주의로 이해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에 따르면 거기에 있는 현실은 하나의 개념적 구성이고, 과학적 관습과 언어로 이루어진 가공물이다. 이 점은 또한 역사가들에 의한 과거 사건들에 대한 탐구에도 해당되고, 사회과학자들에 의한 사회적 제도·구조·관행들에 대한 서술과도 관련된다.

둘째, 과학자들과 역사가들의 서술적이고 설명적인 말들은 원칙적으로는 객관적으로 사실이거나 거짓일 수 있다. 객관적이고 자연적인 실체에 대한 부정에서부터 이어지는 포스트모더니즘적 부정은 때로 진실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표명된다.

셋째, 이성과 논리를 이용해서, 그리고 과학과 기술이 제공하는 좀 더 전문화된 도구들로, 인간들은 그들 스스로와 그들의 사회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미래 사회가 현재보다 좀 더 인간적이고, 좀 더 공정하고, 좀 더 문명화되고, 좀 더 번영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인간 진보 수단으로서의 과학과 기술에 대한 계몽주의적 신념을 부정한다. 사실, 많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지식에 대한 잘못된 추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대량 살상을 가능하게 해준 과학의 발달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그들 중 몇몇은 과학과 기술, 심지어 이성과 논리조차 태생적으로 파괴적이고 억압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20세기 동안에 사악한 사람들에 의해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고 억압하기 위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넷째, 이성과 논리는 보편적으로 유효하다. 즉 이성과 논리에 근거한 법칙들은 어떤 사상가와 지식의 어떤 영역에 대해서도 똑같이 공평하게 적용된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에게는 이성과 논리 역시 단지 개념적 구조물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성과 논리가 사용되는 특정한 지적 전통 안에서만 유효하다.

다섯째, 인간 본성이 존재한다. 즉 인간의 본성은 사회 속에서 배우거나 익히기보다는, 어떤 의미에서 태어날 때에 인간 안에 존재하는 재능·자질·성향으로 구성된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인간 심리의 거의 모든 면들은 철저하게 사회적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여섯째, 언어는 언어 자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실체를 나타내고 가리킨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에 따르면, 언어는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가 계몽주의 관점에서 묘사한 '자연의 거울' 같은 것이 아니다.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연구에 영감을 받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언어 속에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가 반영된다고 주장했다. 한 단어의 의미는 세상 속에서 고정된 것도 아니고 심지어 마음 속의 생각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다른 단어들의 의미와의 대비와 차이의 범위일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의미들은 다른 의미들과의 함수이다. 그리고 그 다른 의미들은 또 다른 의미들의 함수여서 이러한 상관관계는 계속 이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의미들은 그것을 말하거나 듣는 사람 사이에서 결코 완전하게 고정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 속에 말하는 주체가 반영된다고 하는 것은 단지 자연 언어만이 아니라, 좀 더 전문화된 특정 공동체의 담론이나 전통을 특징짓는다. 그런 담론들은 사회적 관행 안에 내재되고 담론들이 사용되는 공동체나 전통의 도덕적·지적 가치 및 개념적 구도를 반영한다. 언어와 담론의 포스트모던적 관점은 주로 해체론의 창시자이자 선도적 실천가이며 프랑스 철학자·문학이론가인 자크 데리다(1930~2004)로 인해 구체화되었다.

일곱째, 인간은 자연적 실체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이 지식은 증거나 원리라는 기초 위에서 궁극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이러한 증거나 원리는 즉각적으로나 직관적으로, 또는 다른 확실성으로 알려지거나 알려질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철학적 근본주의를 거부한다. 이 철학적 근본주의는 과학적 지식을 비롯한 경험적 지식의 체계를 세우기 위한 확실성의 근본을 확인하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의 격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여덟째, 최소한 원리적으로, 자연적·사회적 세계의 많은 양상들을 설명하는 일반 이론들을 주어진 지식의 영역 안에서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같은 역사의 일반 이론이 그러한 예이다. 더 나아가 그런 이론들을 구축하는 것이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탐구의 목표여야만 한다. 비록 그 이론들이 실제로는 완벽하게 도달할 수 없다고 해도 말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이러한 개념을 계몽주의 담론 안에서의 하나의 망상이나 건강하지 못한 경향성의 징후로 치부한다. 이러한 계몽주의 담론을 프랑스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사고의 '전체화' 시스템이라 불렀고, 프랑스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인간 생물학과 역사학, 사회적 발달의 '거대담론'이라고 주장했다. 이 이론들은 거짓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담론이나 전망들에 효과적으로 준거를 부여하기 때문에 유해하다. 이렇게 준거를 부여함으로써 이 이론들은 다른 전망이나 담론들을 억압하거나 소외시키고 침묵시킨다. 데리다 자신은 전체성에 대한 이 이론적 경향성을 전체주의와 동일시했다.

앞에서 지적되었듯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많은 특징적 주장들은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혹은 윤리적 상대주의의 어떤 형태를 구성하거나 함축한다. 하지만 몇몇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그 상대주의자라는 꼬리표를 강하게 거부한다는 것을 유념해야만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현실의 객관적 측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현실에서 객관적으로 옳거나 그른 말들이 있다는 것도 부정한다. 그러한 말들, 즉 객관적인 지식에 대한 말들이 가능하다는 것도 부정한다. 인간이 확실하게 어떤 것들을 아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도 부정한다. 그리고 객관적 혹은 절대적인 도덕적 가치가 있다는 것도 부정한다. 실체와 지식, 그리고 가치는 담론에 의해 형성된다. 따라서 그것들은 그 담론들과 더불어 변할 수 있다. 이것은 현대 과학의 담론이 그것의 내재적 기준들과 별도로 고려될 때에는 점성술이나 마법을 포함한 다른 대안적 전망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때로 이성과 논리의 사용을 포함한 과학의 증거 기준을 '계몽적 합리성'으로 특징짓는다.

이렇듯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폭 넓은 상대주의는 다양한 종류의 담론의 본질 및 기능과 관련하여 사유의 방법을 안내한다. 만약 실체와 지식 및 가치들이 담론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의 주장이 옳다면, 계몽주의 담론이 다른 대안적 담론보다 더 필연적이거나 정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계몽적 담론이 어떻게 처음에 정립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일으킨다. 그것이 객관적인 진실에 도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하나의 담론을 평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기존의 정립된 담론이 어떻게 현대에 널리 퍼진 세계관의 일부가 될 수 있었을까? 다른 것들은 그렇지 못한 반면에, 왜 이런 담론은 받아들여졌거나 발달되었을까?

포스트모던적 대답의 일부는, 폭 넓게 말해서 어떤 사회에서 널리 퍼진 담론은 지배 집단이나 엘리트 집단의 이익과 가치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이러한 연결에는 동의하지만, 그 성격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이 "각 시대의 지배 이념은 그 시대의 지배 계급의 사상이 되어왔다."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카를 마르크스의 격언을 외견상 지지하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좀 더 신중한 입장을 취한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역사적 연구에 영감을 받은 몇몇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마르크스의 입장과는 미묘하게 차이가 있는 관점을 옹호한다. 그 관점은 특정한 시대에 지식으로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복잡하고 미묘한 방식으로 권력에 대한 고려에 의해 영향받는다. 하지만 마르크스보다도 더 멀리 나아가고자 했던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면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문학 이론가인 뤼스 이리가레는, 고체역학이 유체역학보다 발달한 이유는 물리학에 있어 남성 지배적 제도가 유동성과 고형성을 남성과 여성의 성 기관과 각각 연결시켰기 때문이라고 주장해왔다. 계몽주의의 기존 담론은 다소간 자의적이고 공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변화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권력자들의 이익과 가치를 다소간 반영했기 때문에 변화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그들의 이론적 위치를 독특한 방식으로 포괄적이고 민주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계몽주의적 담론의 부당한 헤게모니를 인식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계몽주의적 담론은 똑같이 정당한 근거를 갖추었음에도 비엘리트 집단의 관점에 대해서는 부당하게 헤게모니를 행사해왔다. 1980, 90년대에 다양한 문화적·인종적·종교적 집단들의 편에 선 학문적 옹호자들은 현대 서양사회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비판을 포용했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정체성 정치학'이라는 새로운 운동의 비공식적 철학이 되었다.

 

* 포스트모더니즘의 적용

 

 

메르꼴레디의 여자는 어느날 새벽, 터널 속의 철길을 걸어가고 있다.

 

불란서 느와르(Noir) 영화에 나오는 비극 속의 여주인공처럼 걷던 여자는 문득 기차 속에 몸을 실은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떠나버린다.

 

이 때 끄레아또레의 여자는 새벽 도심의 주차장에서 누군가에 의해 납치라도 될 듯 도망을 가고 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그녀 자신의 강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와지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메르꼴레디와 끄레아또레의 런칭 광고에 구태여 스토리를 붙이자면 위와 같은 내용이라 하겠다. 이같은 스토리에 점차 화면전환기법을 도입하기 시작한다. 모델의 움직임은 계속적인 잔상을 일으키기도 하고, 배경이 페인트박스(Paint box)에 의해 변하면서 모델과 합성되기도 한다.

 

때로는 현실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전개시켜 나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꿈을 꾸듯 몽상의 세계를 헤매이는 메르꼴레디의 여자.

 

작년 여름 편에서 메르꼴레디의 여자는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자신과 마음 속에 내재된 또다른 자신을 동시에 나타내 주고 있다. 이는 화면상에서 정상적인 색깔의 모델이 합성되 동시진행됨으로 표현되었다.

 

이에 반해 끄레아또레의 여자는 자신을 둘러싸고 구속하려는 현실에서 자기만의 자유를 찾아 몸부림치고 있다. 초록색 조명이 연출하는 싸늘한 분위기, 원칙을 무시한 카메라웍크(Camera work)의 자유분방함, 신문지로 채워진 벽에 비춰지는 그림자, 목탄화로 그린 남자의 얼굴을 문질러버리는 여자의 손놀림 등으로 끄레아또레 여자의 성격이 표출되고 있다.

 

이같은 흐름은 가을 편으로 이어지게 된다. 소위 에콜로지(Ecology)로 표현되는 자연생태계적인 분위기에서 메르꼴레디 여자는 상념에 젖는다. 회색빛과 갈색빛이 어우러진 화면톤에서 기괴한 모양의 고목이 서 있다. 이 고목 앞에는 고색창연한 의자에 앉아있는 메르꼴레디 여인이 있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여자의 시선은 도도함과 고독함이 엿보인다.

 

이에 대한 끄레아또레는 여기 현실에 대한 구속을 못벗어나고 방황하고 있다. 자신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를 피하고 창살사이로 새어나오는 태양빛을 동경하는 끄레아또레 여인.

 

겨울 편에서 메르꼴레디와 끄레아또레는 마침내 자유로움을 만끽하게 된다.

 

무인도의 폐허가 된 등대에서 메르꼴레디의 여자는 옷깃을 세우고 수평선을 응시한다. 카메라는 공중에서 여자를 돌기 시작한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여자의 자태를 통하여 메르꼴레디는 해방감을 고취시키기도 하며, 센티멘탈을 느끼게도 한다.

 

끄레아또레 또한 야외로 벗어난다. 뗏목에 차를 싣고 하염없이 떠나는 끄레아또레 여인은 다음 편에서 자동차 위에 비스듬히 눕는다. 옆에는 영상기가 돌아가고 있다. 전방에는 대형스크린이 놓여있다. 이어지는 여름 편에서 자동차는 파괴되어 있고, 솟구치는 물기둥을 헤치며 여자는 자유 이미지를 마음껏 발산하고 있다.

 

메르꼴레디는 봄 편을 통하여 자신의 세계로 조용히 침잔된 여인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중간에 삽입된 새장 속의 새들을 통하여 또 다른 마음의 한 부분을 시사해준다. 마침내 다음 편에서 메르꼴레디는 다시 야외로 벗어나 연못가에 배를 띄우고 있다.

 

메르꼴레디와 끄레아또레의 여인은 누구의 간섭도 받기를 거부한다.

 

메르꼴레디, 끄레아또레는 영상전개에서 나타난 반대로 현실도피적이고 지극히 냉정하기만 한 반면 낭만적이고 자유의지가 강하게 내재되어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영상의 흐름은 어떤 한 방향에 집착됨이 없이 무분별하게 진행되어진다.

 

고독, 사랑, 자유, 섹스, 우아함, 절제, 자연, 쾌락, 갈등, 환희, 파괴 등 메르꼴레디와 끄레아또레의 영상에 담겨있는 요소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영상은 메르꼴레디, 끄레아또레를 입는 소비자들에게 적용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글 서두에서 밝힌 바 있듯이 유행의 본질과 옷의 성격에서 테마를 찾아내는 것은 패션광고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메르꼴레디, 끄레아또레는 표현테마의 전개를 포스트모더니즘의 형태로 적용시키고 있고, 이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하여 나타난 메르꼴레디, 끄레아또레의 강한 개성은 어느덧 메르꼴레디의 여인과 끄레아또레의 여인을 탄생시키고 있다.

 

이 여인들은 강한 준거집단(Reference group)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영상을 통하여 또다른 유행을 창조하고 있다.

 

패왕별희 - 모더니즘의 처절한 죽음.

 

 

<문화예술>

문화예술의 경우는 시기구분이 좀더 세분화된다. 19세기 사실주의(Realism)에 대한 반발이 20세기 전반 모더니즘(Modernism)이었고 다시 이에 대한 반발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사실주의는 대상을 그대로 옮길 수 있다는 재현(representation)에 대한 믿음으로 미술에서는 원근법을 중시하고 어떻게 하면 실물처럼 그릴까 고심했다. 문학에서는 저자가 객관적인 실재를 그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스토리가 인물을 조정하여 원근법과 같은 효과를 나타내었다. 이런 사실주의는 20세기에 들어서 베르그송의 시간의 철학·실존주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등 객관진리, 단 하나의 재현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면서 도전 받는다. 대상은 보는 자의 주관에 따라 다르다는 전제도 미술에서는 인상주의로부터 시작되어 입체파 등 구상보다 추상으로 옮아가고 문학에서는 저자의 서술 대신 인물의 서술인 독백(‘의식의 흐름’이라고도 함)형식이 나온다.

모더니즘은 혁신이었으나 역설적으로 보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재현에 대한 회의로 개성 대신에 신화와 전통 등 보편성을 중시했고 피카소, 프루스트, 포크나, 조이스 등 거장을 낳았으나 난해하고 추상적인 기법으로 대중과 유리되었다. 개인의 음성을 되찾고 대중과 친근하면서 모더니즘의 거장을 거부하는 다양성의 실험이 포스트모더니즘이었다. 따라서 철학에서는 모던과 포스트모던 상황이 반발의 측면이 강하지만 예술에서는 연속의 측면도 함께 지닌다. 비록 이성과 보편성에 의지했지만 이미 재현에 대한 회의가 모더니즘(현대성)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미술에서는 추상 대신에 대중성을 띄고 다시 구상이 등장하였다. 그런데 팝아트처럼 같은 대상을 여러 번 찍어 ‘다르게 반복하기’를 선보이는 경우, 모나리자 등 친숙하고 고유한 원본을 패러디 하여 ‘다양한 재현들’을 선보이는 경우, 예술가의 권한을 축소한 미니 멀 아트 등, 단 하나의 절대재현을 거부한다. 문학에서는 인물의 독백이 사라지고 다시 저자가 등장하는데 더이상 19세기 사실주의와 같은 절대재현을 못 한다. 작가가 자신의 서술을 되돌아보고 의심하는 자의식적 서술(메타 픽션), 현실과 허구의 경계 와해, 인물과 독자에게 선택권을 주는 열린 소설, 보도가 그대로 허구가 되는 뉴저널리즘, 작가의 권한을 최소화한 미니멀리즘 기법 등이 쓰인다. 영화와 연극 역시 사실주의의 패러디로서 환상적 기법, 자의식적 기법을 사용한다. 무용에서는 토슈즈를 신었던 19세기 발레에서 맨발의 자유로움과 기법을 중시한 모더니즘, 그리고 다시 운동화를 신는 포스트모던 댄스로 대중성과 개성이 중시된다. 서사(narrative), 기호학 등 비평이론의 경계와해는 공연예술에서 탈 장르로 나타난다. 포스트모던 건축은 기능주의 적이고 중앙집권적인 밋밋한 건축에서 장식과 열린 공간을 중시하고 분산적이며 옛것에 현대를 접합시킨 패러디가 유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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