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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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모음

번져라 번져라 병(病)이여/문태준

연안 燕安 2011. 7. 25. 13:00

 

번져라 번져라 병(病)이여


1

개망초가 피었다 공중에 뜬
꽃별, 무슨 섬광이
이토록 작고 맑고 슬픈가

바람은 일고 개망초꽃이 꽃의 영혼이 혜성이 돈다

개망초가 하얗게 피었다
잠자리가 날 때이다
너풀너풀 잠자리가 멀리 왼편에서 바른편으로 혹은

거꾸로

강이 흐르듯 누워서 누워서


2

오늘 다섯 살 아이에게 수두가 지나가고, 나는 생각
한다. 만발하는 것에 대하여 수두처럼 지나가는 꽃에
대하여 하늘에 푸른 액정 화면에 편편하게 날아가는
여름 잠자리에 대하여 내 생각에 홍반처럼 돋다 사그
라드는 것에 대하여
 그리하여 나는 지금 앓고 있는 사람이다

 

3

 그리고 나는 본다, 한 집의 굴뚝에서 너풀너풀 연기
가 번져 나오는 것을 그 얼룩을
 그리고 나는 안다, 이 뜨거운 환장할 대낮의 아궁이
에 불을 지피는 한 여인을 그 얼룩을
 에미가 황해도 무당이었고 남편은 함경도 어디가 고
향이고 여인은 한때 소를 한때 묵뫼를 사랑했고 올여
름 연기를 지독히 사랑했고 불을 때는 버릇이 생겼다
는 것을 그 얼룩을

 연기는 아주 굼뜨고, 연기는 무학자이고, 연기는
나부이고, 연기는 풀이 무성한 묵밭이고
 연기는 아궁이 앞에 퍼질러 앉은 그 여인이고, 갈라
진 흙벽의 정신이고, 미친 사람이고

 나는 아니 보아도 안다, 벌써 스무 해 넘게 미쳐 지
내온 저 여인이 어떤 표정으로 지금 앉아 있는지를
 무얼 끓이느냐 무얼 삶느냐 물어도 여인은 손사래
쳐 무심히 불만 밀어넣을 것이라는 것을
 몇 통의 물을 다만 끓이고 끓이고 있다는 것을
 내 눈과 마주치곤 까르르 까르르 웃던 그 검은 얼
굴을

 

4

 하늘의 밭에는 개망초가 잠자리가 연기가 수두처럼
지나가고 있다 더듬더듬거리며 옮아 가고 있다
 번져라 번져라 病이여,
 그래야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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