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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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점 선 면 (외 1편) / 이장욱

연안 燕安 2013. 10. 3. 10:03

점 선 면 (외 1편)

 

   이장욱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저녁에는.

 

저 먼 데 황혼의 교각이 무너진다.

원자로 하나가 터진 계란처럼 번져간다.

소년이 날카로운 쇠못으로 자동차의 표면을 긁는다.

그 뾰족한 선들을

면들을

원들을

너와 나 사이의 세계라고

 

모든 것이 점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사막이라고 부른다.

목적지를 가득 실은 교각이 그것을 닮아간다.

쇠못으로 긋자마자 미친 듯이 경적을 울리는 자동차가

 

누구든 직선을 허물며 걸어간다.

밤거리에 서 있는 사람이 모든 것에 동의하고 있다.

어디 안 보이는 곳에서 모래가 집요하게

나를 생각하고 있다.

 

 

                        —《현대시학》2013년 8월호

 

 

천국보다 낯선

 

 

 

더 나쁘게 말할 수 있다. 나 자신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 백화점에 대해서.

그건 너무 쉬워서.

 

너무 쉬워서

에스컬레이터의 안정된 속도로 하강하는 것이 가능하다.

너무 쉬워서

적절한 높이의 계절들이 가능하다. 5층에서는

남성용 정장을.

3층에서는 여성용 겨울을.

옥상에서는 누가 툭

떨어지고,

 

형이상학은 지하에서만 가능하다. 커다란 목소리로,

천국이 지옥을 만들었다고!

당신이 나의 천국이라고!

외쳤다,

백화점에서.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면서도

좋아할 수 있어? 팔짱을 낀 채

선과 악이 사라진 통로를 우리는 걸어가고

마음에 드는 것과 안 드는 것 사이에서 점점 격렬해지고

드디어 도달했다,

죽을 때까지.

죽은 뒤의 계절처럼.

 

구름과 밤의 표정으로

누가 나를 불렀다.

아주 친절하게.

천국보다 낯선 목소리로.

그건 너무 쉬워서.

 

 

 

                       —《현대시학》 201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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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 1968년 서울 출생.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생년월일』.

출처 : 애지문학회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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