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나태주 시인 대표시선 본문
다시 산에 와서--나태주
1. 그 나무
그 나무 어렸을 때를 나는 안다
아니, 나 어렸을 때를 그 나무가 안다
봄이 와 나무에 잎이 피어나기 시작하면
나도 잎이 피어나기 시작했고
나무에 꽃이 피어나면
나에게도 꽃이 피어나던 시절이었다
혹, 가을날 오후 같은 때
학교에서 돌아와 집안에 아무도 없어
심심해진 내가 가까이 가면
공손히 허리를 내밀어
무동 태워주곤 하던 나무
더러는 맛있는 과일을
선물해 주기도 하던 나무
지금 그 나무 어디에 있는가?
이제는 가지가 꺾이고 줄기가 삭아서
밑둥만 남아 있는 나무
썩어 뭉개진 나무의 흔적만이 거기
나무가 서 있었음을 말해주는 나무
이름으로만 나무인 나무
그 나무는 나의 어렸을 때를 안다
아니, 나는 그 나무의 어렸을 때를 안다
그 나무 이름은 보리똥나무다.
2. 소가 좋아서
자비하신 신이 있어
딱 한번만 사람으로
돌아오게 한다면
소가 좋아서
소 키우는 집 아버지의
아들이 한번 되어보고 싶다
소낙비 한 줄금 스쳐간
여름날 오후 같은 때
소를 풀밭에 풀어놓고
벌러덩 풀밭에 팔베개로 누워
하늘을 바라보아야지
입을 벌려 푸른 하늘
쪽빛 호수 물도 들이마시고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흰 구름도 끌어다
솜사탕처럼 베어먹어 보아야지
그러다가 끝내 심심하면
풀을 뜯고 있는 소의 커다란
두 눈도 들여다 볼 일이지
소의 두 눈에도 파아란
하늘 호수는 고여 있을 테고
흰 구름 배 알몸으로 천천히
호수를 가로질러
건너가기도 하겠거니!
3. 초등학교 선생님
아이들 몽당연필이나
깎아 주면서
아이들 철없는 인사나 받아 가면서
한 세상 억울한 생각도 없이
살다 갈 수만 있다면
시골 아이들 손톱이나 깎아 주면서
때 묻고 흙 묻은 발이나
씻어 주면서 그렇게
살다 갈 수만 있다면.
4. 뒷모습
뒷모습이 어여쁜 사람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다
자기의 눈으로는 결코
확인이 되지 않는 뒷모습
오로지 타인에게로만 열린
또 하나의 표정
뒷모습은
고칠 수 없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물소리에게도 뒷모습이 있을까?
시드는 노루발풀꽃, 솔바람소리,
찌르레기 울음소리에게도
뒷모습은 있을까?
저기 저
가문비나무 윤노리나무 사이
산길을 내려가는
야윈 슬픔의 어깨가
희고도 푸르다
5. 눈부신 속살
담장 위에 호박고지 가을볕 좋다
짜랑짜랑 소리 날 듯 가을볕 좋다
주인 잠시 집 비우고 외출한 사이
집 지키는 호박고지 새하얀 속살
그 속살에
축복 있으라.
6. 돌
돌에게도
사람들처럼
얼굴이 있다
돌에게도
이목구비 뚜렷한
얼굴이 있다
한참 동안
돌의 앞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돌이 먼저
입을 열어
말을 걸어온다
이보게 친구
자네도 무던히
망설이고 있네 그려.
7. 천천히 가는 시계
천천히, 천천히 가는
시계를 하나 가지고 싶다
수탉이 길게, 길게 울어서
아, 아침 먹을 때가 되었구나 생각을 하고
뻐꾸기가 재게, 재게 울어서
어, 점심 먹을 때가 지나갔군 느끼게 되고
부엉이가 느리게, 느리게 울어서
으흠, 저녁밥 지을 때가 되었군 깨닫게 되는
새의 울음 소리로만 돌아가는 시계
나팔꽃이 피어서
날이 밝은 것을 알고 또
연꽃이 피어서 해가 높이 뜬 것을 알고
분꽃이 피어서 구름 낀 날에도
해가 졌음을 짐작하게 하는
꽃의 향기로만 돌아가는 시계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가고
시도 쓸 만큼 써보았으니
인제는 나도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 하나쯤 내 몸 속에
기르며 살고 싶다.
8. 대숲 아래서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득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4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하기는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찍이 먹고
우물가에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9. 멀리까지 보이는 날
숨을 들이쉰다.
초록의 들판 끝 미루나무
한 그루가 끌려들어온다.
숨을 더욱 깊이 들이쉰다.
미루나무 잎새에 반짝이는
햇빛이 들어오고 사르락 사르락
작은 바다 물결 소리까지
끌려들어온다.
숨을 내어 쉰다.
뻐꾸기 울음소리
꾀꼬리 울음소리가
쓸려 나아간다.
숨을 더욱 멀리 내어쉰다.
마을 하나 비 맞아 우거진
봉숭아꽃나무 수풀까지
쓸려 나아가고 조그만 산 하나
다가와 우뚝 선다.
산 위에 두둥실 떠 있는
흰구름, 저 녀석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몸 안에서
뛰어 놀던 바로 그 숨결이다.
10. 다시 산에 와서
세상에 그 흔한 눈물
세상에 그 많은 이별들을
내 모두 졸업하게 되는 날
산으로 다시 와
정정한 소나무 아래 터를 잡고
둥그런 무덤으로 누워
억새풀이나 기르며
솔바람 소리나 들으며 앉아 있으리.
멧새며 소쩍새 같은 것들이 와서 울어주는 곳,
애인들꺼정 데불고 와서 지저귀는
햇볕이 천년을 느을 고르게 비추는 곳쯤에 와서
밤마다 내리는 이슬과 서리를 마다하지 않으리.
길길이 쌓이는 壯雪을 또한 탓하지 않으리.
내 이승에서 빚진 마음들을 모두 갚게 되는 날,
너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백발로 졸업하게 되는 날
갈꽃 핀 등성이 너머
네가 웃으며 내게 온다 해도
하낫도 마음 설레일 것 없고
하낫도 네게 들려줄 얘기 이제 내게 없으니
너를 안다고도
또 모른다고도
숫제 말하지 않으리.
그 세상에 흔한 이별이며 눈물,
그리고 밤마다 오는 불면들을
내 모두 졸업하게 되는 날,
다시 와서
싱그런 나무들 옆에
또 한 그루 나무로 서서
하늘의 천둥이며 번개들을 이웃하여
떼강물로 울음 우는 벌레들의 밤을 싫다하지 않으리.
푸르디푸른 솔바람 소리나 외우고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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