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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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그 허(虛)와 실(實)

연안 燕安 2013. 2. 27. 16:45

신춘문예 그 허(虛)와 실(實)


폐(廢)타이어(200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김종현


아파트 공터 한 귀퉁이
속도를 잊은 폐타이어
땅속에 반쯤 묻힌 깊은 침묵 속
햇빛을 둥글게 가두어 놓고
동그랗게 누워 있다

그가 그냥 바퀴였을 때는 단지
속도를 섬기는 한 마리 검은 노예일 뿐이었다
날마다 속도에 사육되고
길들어 갔다
다른 속도가 그를 앞질러 갈 때
그는 바르르 떨며
가속 결의를 다져야 했다
자주 바뀌는 공중의 표정 앞에서는
잽싸게 꼬리를 사려야 했다
검고 딱딱한 세계 위에서 세월을 소모하며
제한된 영역만 누려야 했다

지금 저 동그라미는 자신의 일생이
얼마나 속도에 짓눌려 왔는지 기억하고 있을까
튕겨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했으리라
예약된 모든 속도들 다 빠져나가고
속도는 한 줌 모래처럼 눈부신 한계였을 뿐
얼마나 어지러웠을까
속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속도에 매달린 세월

그가 속도의 덫에서 풀려나던 날
온몸이 닳도록 달려온 일생을 위로하듯
바람은 그의 몸을 부드럽게 핥아주었다
잠시 뒤의 어떤 바람은 풀씨랑 꽃씨를
데리고 와서 놀아주었다
벌레들의 따뜻한 집이 되었다
잃어버린 속도의 기억 한가운데
초록의 꿈들이 자란다
노란 달맞이꽃은 왕관처럼 환히 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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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차장 근처 (서울신문1997 신춘문예 당선작)

박남희

이곳에 있는 바퀴들은 이미 속도를 잃었다.
나는 이곳에서 비로소 자유롭다.
나를 속박하던 이름도 광택도
이곳에는 없다.
졸리워도 눈감을 수 없었던 내 눈꺼풀
지금 내 눈꺼풀은
꿈꾸기 위해 있다.
나는 비로소 지상의 화려한 불을 끄고
내 옆의 해바라기는
꿈같은 지하의 불을 길어 올린다.
비로소 자유로운 내 오장육부
내 육체 위에 풀들이 자란다.
내 육체가 키우는 풀들은
내가 꿈꾸는 공기의 질량만큼 풍성하다.
풀들은 말이 없다.
말없음의 풀들 위에서
풀벌레들이 운다.
풀벌레들은 울면서
내가 떠나온 도시의 소음과 무작정의 질주를
하나씩 지운다
이제 내 속의 공기는 자유롭다
그 공기 속의 내 꿈도 자유롭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저 흙들처럼
죽음은 결국
또 다른 삶을 기약하는 것이지도 모른다
나는 이곳에서 모처럼 맑은 햇살에게 인사한다
햇살은 나에게
세상의 어떤 무게도 짐 지우지 않고
바람은 내 속에
절망하지 않는 새로운 씨앗을 묻는다


박남희 시인 약력

경기 고양 출생
숭실대 국문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석사)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199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고려대, 숭실대 강사
일산 문학학교 시 창작반 강사
시나라. 행시. 시산맥 동인
시집: 『폐차장 근처』(현대시,1999/문학과 경계,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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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두 작품을 보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작가로서 참으로 참담함을 느낀다. 시란 같은 발상을 가지고 쓸 수는 있지만 위의 두 시적인 발상을 보면 읽고 난 느낌이 같아도 너무 같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폐타이어의 발상부터가 신춘문예 당선작이 되기엔 부족한 느낌이 드는 것은 무슨 일인가?
사실 위 폐타이어란 작품은 조선일보 당선소식이 있고 부터 많은 네티즌으로부터 표절이 아니냐?는 항의를 받았고 이에 당황한 심사위원들이 재심을 한 뒤에 표절이 아니라는 결과를 발표했지만 받아들이는 독자들이나 작가들이나 모두 찜찜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폐타이어란 작품의 시어(詩語)를 보면 표절 같지는 않지만 읽고 난 느낌은 별로 유쾌하지는 않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작가는 어느 다른 작가의 글을 좋아 할 수도 있고 비슷한 글을 쓸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가장 권위 있다고 하는 조선일보의 신춘문예 당선작이 이런 수준이라면 심사위원들이 글을 안 읽어도 너무 안 읽는다는 생각이다.
표절은 아니라 해도 모방은 했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은 혼자만의 생각일까?....
창작을 모토로 하는 신춘문예가 모방의 발상을 막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심사위원들은 역대 신춘문예 글은 한번쯤은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한국문단을 빛낼 문인을 양성할 신춘문예나 문예지의 신인상은 적어도 발상 자체도 순수 창작이었으면 하는 소망을 5월이 저물어 가는 여름의 길목에서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