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시인수첩 본문
또 하나의 시 전문 잡지 <시인수첩>이 여름호로 창간됐다. 출판사 문학수첩에서 나온 이 잡지의 발행인은 문학수첩 대표인 김종철 시인이 맡았고, 장경렬 서울대 교수, 구모룡 한국해양대 교수, 허혜정 한국사이버대 교수가 편집위원으로, 김병호 협성대 교수가 편집장으로 참여했다. 광고나 외부 기관의 도움 없이 자율성과 독립성을 지키고자 발행인이 사재 20억원을 출자하기로 약속했다는데, 그 때문인지 창간호에는 ‘시인수첩 신인상 공모’ 안내 말고는 그 어떤 광고도 보이지 않는 점이 이채롭다. 이 잡지는 나아가 2년 안에 월간지로 전환하겠노라고 밝혔으며, 같은 출판사에서 소설 전문지 창간을 추진하는 등 의욕을 보이고 있다.
돌이켜 보면 한국 문학사는 문학 잡지들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여명기 한국 현대문학사를 기술하면서 ‘<백조>시대’니 ‘<폐허>파’니 하는 말을 쓰곤 하는데, 문학 잡지의 이름에서 온 이런 표현들은 문학사와 잡지의 긴밀한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숱한 잡지들이 명멸한 가운데, 1955년 1월호로 창간되어 단 한 호의 결호도 없이 이번 5월호로 677호째 발행된 월간 종합 문예지 <현대문학>은 한국 잡지 역사의 최장수 기록을 매호마다 갱신하고 있는 중이다. 1972년에 역시 월간으로 창간된 <문학사상>도 이상문학상을 통해 문단에서 나름대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1966년에 창간되어 한국 문학의 계간지 시대를 연 <창작과비평>, 그에 자극받아 1970년에 창간된 <문학과지성>(지금의 <문학과사회>의 전신), 1976년에 창간된 <세계의문학>, 그리고 1994년부터 나오기 시작해 90년대와 2000년대를 자신의 시대로 만든 <문학동네>, 그리고 2008년에 닻을 올린 <자음과 모음>에 이르기까지 문학 잡지들의 부침은 그대로 문단 지형도와 문학적 경향을 재는 바로미터로 구실했다.
그런데 길게는 60년 이상, 짧게는 3년 정도 이어져 오고 있는 이 잡지들의 이면에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스러진 잡지들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2002년에 창간되었지만 창간호가 곧 종간호가 되어 버린 <문학생산>을 비롯해 <문학·판> <문학인> <상상> <리뷰> 같은 종합 문예지와 <포에티카> <포에지> 같은 시 전문지, 그리고 비평 전문지 <비평과 전망> 등이 이런저런 이유로 문학사의 뒤안으로 사라져 갔다.
가장 큰 이유는 문학잡지의 운명이 발행인의 변덕에 좌우된다는 데에 있다. 대부분의 문학잡지들이 순수한 판매 및 광고 수입만으로 지탱되기 어려운 사정 때문에 잡지의 지속 여부는 순전히 발행인의 형편과 의지 여하에 달려 있게 마련이다. 처음에는 나름의 명분과 의욕을 가지고 나섰던 발행인이 어떤 이유에서든 잡지에 대한 미련을 접게 되는 순간(!), 잡지는 그야말로 문학사에서 ‘제명’이 되고 만다. 실제로 <시인수첩>을 창간한 출판사 문학수첩은 종합 계간 문예지 <문학수첩>을 28호까지 발행하다가 2009년 겨울호를 끝으로 무기한 휴간에 들어간 바 있다. 사실상 종간한 것이다. 최근에는 출판사 세계사에서 내던 계간 <작가세계>가 출판사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세계사로부터 독립해 ‘작가세계’라는 발행처를 따로 등록해 나오고 있으며, 출판사 문학동네의 청소년 대상 문학 계간지 <풋>도 종간을 앞두고 있다. <시인수첩>의 첫 출발을 기대와 우려가 뒤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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