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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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산책로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연안 燕安 2012. 3. 16. 00:29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신경림

 

 

내가 시를 쓰는 일에 회의를 느낀 것은 문단에 나온 직후이다. 내가 문예지 ‘문학예술’에 추천을 받은 시는 ‘낮달’, ‘갈대’, ‘석탑’ 등 이른바 순수시였다.

 

갈 대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그 무렵은 서울은 전쟁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 곳곳에 폭격이나 포격으로 허물어진 집이 즐비하고, 팔이나 다리가 잘린 젊은이들이 길거리에 넘치고 있었다.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절망감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내 시는 이러한 내 감정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내 시가 우리가 또는 내가 사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런 회의에 사로잡히면서 나는 차츰 시에 게을러졌다. 내 시뿐 아니라 그 무렵 우리 시를 지배하고 있는 화두는 신이니 존재니 하는 외국서 들어온 관념이 아니면, 사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전통적 서정 일색이었던 터다.

그때 내가 즐겨 다니던 곳은 동대문과 청계천 일대의 고서점들이었다. 거기서 이미 읽은 바 있던 백석의 ‘사슴’이며 이용악의 ‘낡은 집’ 등의 시집을 구해 읽으며 막연히 내 시가 계속 이럴 수는 없다 라고 생각했는데, 특히 내 생각을 크게 바꾼 것은 카와카미 하지메(河上肇)의 ‘가난 이야기’였다. 이 책을 읽고 나자 세상이 새롭게 보였다. 눈 앞을 가리고 있던 안개가 말끔히 걷힌 것 같았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이때부터 만나는 친구들도 말라졌다. 문학하는 친구들 대신 고서점에서 만난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외국 사람들의 흉내를 내어 ‘수요회’라는 이름을 붙인, 말하자면 독서 서클로였다. 이 모임에서는 새로운 책을 읽은 사람이 그날그날의 리더가 되므로 경쟁적으로 책을 읽게 되었는데, ‘공산당 선언’ 같은 문건도 이때 처음 접한 것이다. 시와는 더욱 거리가 멀어지면서 문학 따위 하지 않은들 어떠냐 하는 건방진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골 내려와 10년 가까이 살게 된다. 그 사이 소설도 써보고 번역도 해보고 또 진로를 바꾸겠다고 엉뚱한 공부도 해보았지만, 만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서울생활을 계속할 능력도 내겐 없었다. 그럴 때 수요회의 한 선배 멤버가 조봉암의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이 되었다. 겁이 많은 나는 무작정 서울을 탈출했고, 대학을 다니고도 밥벌이도 못하는 미운 털이 되어서 거의 10여년을 시골서 떠돌게 된 것이다. 이미 아버지가 사업이다 자식들 학비다 해서 전답을 거의 팔아 없애 농사거리도 제대로 없는 데다, 아버지는 아직 일할 나이에 일찍암치 실업자가 되고 집안살림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오죽 어려웠으면 이른봄 마당 한구석에 무리를 이루었던 작약 뿌리를 캐어 보리쌀과 바꾸었겠는가. 유달리 자존심이 강하고 시샘도 많은 할머니는 아무 하는 일 없이 방구석에 죽치고 앉았다가 때가 되면 보리밥만 한 사발씩 축을 내는 부자를 앞에 놓고 시도 때도 없이 종주먹질을 했다.

나는 밖으로 떠돌 수밖에 없었다. 공사장으로 건달 친구를 찾아가 신세를 지기도 하고 광산에서 일하는 선배를 찾아가 한 달씩 공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막일인들 내가 왜 못하랴, 애초에 내가 찾아간 의도는 이런 것이었으나, 내가 몸이 약하다면서 친구나 선배는 대학물을 먹은 나를 막일에서 빼주었던 터다. 또 어쩌다 기회가 와도 나는 이내 현장 감독들과 술친구가 되거나 장부 정리나 해주는 사무 보조가 됨으로써 먹물티를 냈고, 결국 내 노동현장의 삶은 늘 단명으로 끝났다. 일부러 전혀 아는 사람이 없는 공사장을 찾아간 일도 있다. 이때도 나는 힘든 일을 며칠 견디지 못하고 내가 먹물임을 내세워 편한 일자리를 얻고는 했다. 장돌뱅이 친구가 있어 나도 한번 해볼 것이라고 며칠 따라다닌 일도 있고, 그로부터 물건을 나누어 받아 따로 다녀본 일도 있으나, 깨달은 것은 먹고살기가 이렇게 힘드는구나 라는 사실뿐이었다. 시골살이 10년에 내가 제대로 밥벌이라고 한 것은 아마 학원 강사 또는 개인교수였겠는데, 이 일도 내가 종종 저지르는 엉뚱한 짓거리 때문에 대개 뒤끝이 개운치 않게 끝났다. 엉뚱한 짓거리란 특별한 의도도 없으면서 술에 취해 북쪽을 찬양해서 당국의 추적을 받거나 친지나 친구가 맡긴 귀중품을 멋대로 처분해서 술을 마시는 따위였다. 나는 주위에서 무책임하고 신뢰성이 없는, 이상한 소리나 하고 다니는 또라이로 낙인이 찍혔다.

 

파 장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수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하지만 이 사이 나는 세상 공부를 다시 했다. 사실 농촌에서 태어났다고 하나 나는 지게를 져본 일도 논에 들어가 피사리를 해본 일도 없었다. 자식들이 학문으로 출세하기를 바랐던 할아버지가 철저히 금한 것이 집안의 내력이 되었던 것이다. 농사일이란 게 이렇게 힘들고, 장사고 노동이고 쉬운 일이 없다는 것을 이때 처음으로 제대로 알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 땅이 사람이 살기 어려운 척박한 땅이요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는 것도 이때 처음 느꼈다. 곳곳에 역사가 할퀴고 간 자국이 너무 깊이 흉측하게 남아 있는 것도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가령 어떤 동네에 가보면 같은 날 아버지나 형 제사를 지내는 집이 여남은 집씩 되었으며, 또 어떤 동네는 온통 과부천지였다. 보도연맹이다 부역자다 해서 같은 날 학살당하기도 하고 또 그 보복으로 죽임을 당하기도 한 것이다. 한 동네 살면서 서로 보지도 않고 사는 경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 무렵 나는 내게 다시 글 쓸 기회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다시 글 쓸 기회가 온다면 이런 사람들의 정서, 설움이며 한 같은 것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었다. 그래도 그 10년 동안 시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단 한 편도 발표하지 못하면서도 어쩌다 노트 조각 같은 데 시를 끄적였으니 말이다. 그때 그렇게 끄젹였던 작품이 ‘눈길’, ‘그날’ 같은 시들이다.

 

눈 길

 

아편을 사러 눈길을 걷는다

진눈깨비 치는 백리 산길

낮이면 주막 뒷방에 숨어 잠을 자다

지치면 아낙을 불러 육백을 친다

억울하고 어리석게 죽은

빛 바랜 주인의 사진 아래서

음탕한 농짓거리로 아낙을 웃기면

바람은 뒷산 나뭇가지에 와 엉겨

굶어 죽은 소년들의 원귀처럼 우는데

이제 남은 것은 힘없는 두 주먹뿐

수제비국 한 사발로 배를 채울 때

아낙은 신세 타령을 늘어놓고

우리는 미친놈처럼 자꾸 웃음이 나온다

 

우연히 고 김관식 시인을 길에서 만나, 우리 함께 서울 올라가서 좋은 시 한 번 써보자는 권고를 받았을 때 나는 환호작약했다. 그다지 믿을 바가 못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나는 앞뒤 돌아보지 않고 그를 따라 무작정 상경했다. 갑자기 시를 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상경해서 처음 쓴 시가 ‘겨울밤’이다. 이 시가 신문에 나오자 친구들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내 초기 시에 호의를 보인 바 있던 몇 친구는 너무 오랫동안 시를 안 써서 시에 대한 감각이 이상해진 것 아니냐는 투로 말들을 했다. 그래도 내가 계속 몇 해 동안 시골서 다시 내게 시를 쓸 기회가 오면 쓰겠다고 생각한 대로 시를 썼으니, 주위에 내 새로운 시를 이해해주고 격려해주는 친구며 선배 후배들이 여럿 있어 힘이 되었다. 이때 내가 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은 시는 그 시대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 되지 않아서는 안된다는 것이었고, 이 생각은 날이 가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시대의 요구란 유신, 긴급조치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에 대한 반대로 이해되었으며,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이 무렵에도 나는 여기저기서 만난 사회과학 공부하는 사람들과 많이 어울렸는데, 이들의 생각과 떠돌이생활 10년에 내가 보고 느낀 것이 서로 같아 쉽게 의기투합할 수가 있었다. 이때 썼거나 과거의 생각을 정리한 것이 ‘농무’에 들어 있는 시들이다.

 

농 무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모여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 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시는 그 시대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 되지 않아서는 안된다, 나는 한동안 이 명제에 충실했다. 결국 내 시는 반유신, 반군사독재적 정서를 띌 수밖에 없었으며, 그 무기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과격한 생각까지 했었다. 그러나 늘 마음 한구석에는 아름다운, 더 많은 사람들한테 감동을 줄 시를 쓰고 싶은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으며, 이것이 드러나면 친구나 후배들은 나를 문학주의자로 매도했다. 이 매도를 감수하면서 내 시는 경직되었던 것 같다. 나는 눈치를 보고 마음에 없는 과격한 소리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시 쓰기가 싫어졌고 지루해졌다. 내가 민요에 몰두한 것은 이 무렵부터가 아니었나싶다. 민요적 정서를 시 속에 도입, 내 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보자는 의도였는데, 민요와의 접목은 내 시 쓰기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민요적 정서는 역시 지난날의 정서요 그 말을 가지고는 생동감있는 현실을 포착한다는 일이 어려웠던 것이다. 나는 시 쓰기가 더 싫어졌고 더 지루해졌다. 80년대 전기간이 내게는 시 쓰기가 가장 어렵고 지루했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목계장터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시집 ‘길’ 속의 시를 쓰면서 나는 서서히 민요의 중압에서 벗어났다. 고지식하게 민요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민요에서도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우고 배울 것이 없으면 배우지 말자고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시대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란 명제도 그렇다. 그 시대의 삶에 깊이 뿌리박는 것으로 충분하지 그 이상의 대답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나의 삶, 우리들의 삶에 충실한 시를 쓰자,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시 쓰는 일이 조금씩 편하고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또 생각했다, 내가 시를 쓰는 한 내게는 시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삶은 없다고. 말하자면 나는 스스로 문학주의자로 자임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사의 전부가 되었다.

 

새로 낸 시집 ‘뿔’의 후기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나는 요즈음 나무를 심는 기분으로 시를 쓴다. 내가 심은 나무가 아무리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단 열매를 맺어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보고도 그것이 주는 기쁨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들 무슨 상관이랴, 그 나무는 있을 거이요 그것을 보는 사람 아는 사람에게는 큰 기쁨을 줄 터인데. 하지만 그 나무는 오늘의 나의 삶, 우리들의 삶이 심은 나무요 키워낸 나무일 때 그것이 주는 기쁨도 진정한 기쁨이 되리라.

 

떠도는 자의 노래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특급열차를 타고 가다가

 

이렇게 서둘러 달려갈 일이 무언가

환한 봄 햇살 꽃그늘 속의 설렘도 보지 못하고

날아가듯 달려가 내가 할 일이 무언가

예순에 더 몇 해를 보아온 같은 풍경과 말들

종착역에서도 그것들이 기다리겠지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산역에서 차를 버리자

그리고 걷자 발이 부르틀 때까지

복사꽃숲 나오면 들어가 낮잠도 자고

소매 잡는 이 있으면 하룻밤쯤 술로 지새면서

 

이르지 못한들 어떠랴 이르고자 한 곳에

풀씨들 날아가다 떨어져 몸을 묻은

산은 파랗고 강물은 저리 반짝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