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권운지 본문
권운지 시모음
권운지 시인
경북 문경 출생
영남대 교육대학원 졸업
1982년 ‘현대시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 ‘소작인의 가을’ ‘빈집의 나날’ ‘갈라파고스’ 등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봄에 쓰는 시 / 권운지
제재소 앞을 지날 때 죽은 나무가 뿜어내는 향기에 몸서리친다. 죽은 나무의 혈액이 아침에 넘기는 책장에 묻어있다. 나는 본다. 은폐된 봄의 이미지, 맹렬하게 돌아가는 전기톱과 완강하게 통나무를 밀어넣는 사내들의 말없는 노동, 줄지어 기다리는 야적장의 나무들을. 절단된 꿈의 비명들이 톱밥처럼 흩어지는 봄날. 억압된 충동들이 켜켜이 잘리어져 우리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생소하게 변형되고 있는 것을. 사내들의 손에 들리어져 나와 가지런히 묶여지는 저 희고 향기로운 판자들은 무엇일까. 라디오에서는 종일 뇌사에 관한 논쟁이 격렬하다. 한 죽음이 오랜 세월동안 종료될 수 없음을 본다. 이 봄날
<현대시학> 2012년 1월호 권두시
고장난 시계 / 권운지
고장난 시계를 고치려고 시계점에 들렀더니 잃어버린 시간들이 그곳에 다 있었다. 그 집의 뻐꾸기시계가 뻐꾹 뻐꾹 크게 울었다. 어슴푸레 뻐꾸기 소리를 따라가다가 나는 그만 길을 잃고 만다. 뻐꾸기 소리는 고장난 시계 속의 길, 그 길은 小路다. 나는 몸을 구부려 그길로 들어섰다. 긴긴 회랑 끝에서 한 아이가 걸어 나왔다. 산밭으로 가는 길에는 우윳빛 안개가 끼어 있고 아직은 찔레순이 여리다. 찔레순을 잡는 아이의 손등에 투명한 이슬이 맺혔다. 주인은 웃으며 야구르트를 권한다. 야구르트 빨대 속으로 찔레꽃 향기가 빨려 나왔다. 주인은 가느다란 핀셋으로 낡은 내 시계 속에서 찔레꽃 한 잎을 들어냈다. 아이의 몸에는 찔레꽃이 피고 있었다. 꽃 피는 시간 속으로, 시간을 맞추어 드릴까요? 건전지를 교환한 내 시계를 건네줄 때, 뻐꾸기 소리 밖으로 문을 열고 나오지만 나는 다시 길을 잃는다.
사신私信 / 권운지
내실의 쥐똥나무가 수상하다. 명확한 확증의 단서를 잡지 못한 채, 오늘 비로소 우수를 보내고, 절제된 가지의 긴긴 침묵 위로 더디게 다가오는 적소謫所의 봄, 겹겹으로 에워싼 감시망을 뚫고, 무엇이 화분의 쥐똥나무를 설레이게 하였는지 오늘밤 내가 지켜보고자 한다. 밤이 깊을수록 유혹의 손길은 끊임없고 홀로 버티는 파수꾼의 밤은 곤혹스럽다. 못 미더워, 완강한 철제대문의 문고리를, 거실의 이중창들을, 방으로 통하는 출구의 자물쇠를, 열두 번씩이나 부정해 보는 오늘밤도 첫닭의 울음소리는 목전에 당도하고, 이 완벽한 차단의 담벼락을 뚫고 들어와 두드러진 잎눈마다 봉인의 밀서를 걸어 두고, 무엇이 이 방을 다녀간 것인가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시집 <갈라파고스>2011. 만인사
<현대시학>1월호 2012년 권두시
기억 / 권운지
호두를 깨뜨릴 때 내가 당면하는 저항, 그것은 호두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호두는 제 스스로 껍질을 깨뜨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언제나 싸움이다. 너에게로 가는 길은, 호두알의 이쪽에서 느끼는 두려움, 나는 깨뜨리고 싶다. 껍질로 둘러싸인 것들만 보면 날카로워진다. 기억재생법으로 그는 나를 치료했다. 치료받는 사람은 모두를 말해야 된다. 단단한 봉합 속에 짓이겨진 시간, 응고된 핏덩이를 걷어내고 마침내 우리는 기억의 저편 희고 가지런한 골짜기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비어있는
중심 / 권운지
우수가 오기 전에 포도나무의 묵은 껍질을 벗겨내야 한다. 묵은 껍질이 감싸고 있는 벌레를 잡아내야 한다. 나는 이빨이 단단하고 입언저리가 붉은, 살 속 깊이 박혀 있던 그 벌레를 본 적이 있다. 벌레는 언제나 중심을 겨냥한다. 껍질에 아물 수 없는 상처를 내고 중심으로 들어가 가장 소중한 추억을 갉아먹는다. 중심의 불꽃을 갉아먹은 힘센 그 벌레는 수족을 마비시키고 실어증을 유발하다. 맥박이 느리고 식욕이 없는 것도, 제철에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도, 해마다 내가 봄앓이를 하는 것도 순전히 그 벌레 때문이다. 잘 벗겨지지 않는 거무죽죽한 마른 껍질을 찢어낸다. 섬유질처럼 질긴 날들이 먼지 파편을 일으키며 떨어져 나왔다. 저 어두운 협궤, 벌레가 파먹고 지나간 줄기는 터널처럼 속이 비어 있고 조금만 건드려도 무너졌다. 벌레는 간곳없고 캄캄한 터널 속에 벌레의 검은 배설물 같은 시간들만 쌓여 있다
갈라파고스 / 권운지
적도 아래 갈라파고스가 있다
거센 해류와 수많은 암초로
바다 한가운데 저마다 고립되어
섬마다 방울새나 거북이가 진귀한 진화론을 쓰고 있는
갈라파고스 갈라파고스 갈라파고스
나직이 되뇌어보라
멀지 않은 곳에 갈라파고스가 있다
춘란이 꽃을 피우지 못하는 사무실
책상 아래 무수히 뒤엉킨 전선들
수백만 볼트에도 감전되지 않는
잠을 잊은 야행성으로
생존을 위한 이 혹독한 진화
우리는 이 섬의 고유종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갈라파고스 (참고하세요^^)
남아메리카 동태평양에 있는 에콰도르령(領) 제도로서 살아 있는 자연사 박물관이라 불리는 19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1,000km 떨어져 있으며,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준 섬으로 유명하다.
정식명칭은 콜론 제도(Archipiélago de Colón)이며. 주도(主島)는 산크리스토발섬이다. 총면적 7,850㎢, 인구 약 1만(1990)이다. 에콰도르 해안으로부터 서쪽으로 1,000km 지점에 위치하며, 대소 19개의 섬과 다수의 암초로 이루어져 있다. 이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은 이사벨라섬(5,800㎢)으로, 최고봉은 아술산(1,689m)이며, 다른 섬들은 대개 작고 평평하다. 1535년 에스파냐의 T.데 베를랑가가 발견하였다. 발견 당시에는 무인도로서 큰 거북이 많이 살고 있었다. 거북을 에스파냐어(語)로 갈라파고스라고 하는데, 이 제도의 명칭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현재도 거북의 등딱지와 기름은 주요 특산물이다.
낙화를 따라가다 / 권운지
한 남자가 강물에 투신하였다고 아침 뉴스가 전한다. 뉴스를 전하는 화면 속으로 벚꽃 눈부신 봄이 강물처럼 출렁이며 지나간다. 그 남자의 지난했을 생애가 간단명료하게 자막으로 처리 되었다.낙화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작은 파문도 일으키지 않았다.벼랑까지 떠밀려와 꽃잎처럼 몸을 날린 그 남자를 생각하며 나는 지금 그 화면의 봄 속을 지나가는 것이다. 그 남자가 남겼을 절절한 유서속으로, 환하게 꽃 핀 길은 분명 무엇인가를 숨기고있다. 해독이 어려운 은유처럼 햇살속에는 비밀스런 향기가 섞여있다.어떤 향기는 잠결에 들은 고함소리 같다. 검은 껍질을 뚫고 나와 꽃들은 일제히 절벽에 매달려 있다.미풍에도 꽃의 중심은 뜨겁고 소란하다. 여린 꽃잎에서 절벽을 들어 올리는 힘을 본다.절벽 하나가 하르르 무너진다. 누군가 경적을 울렸다. 아찔한 어지러움에 나의 몸이 봄의 강물에 기울어졌다.
<시와 반시> 2010, 봄호
꽃 / 문인수 말이 되지 않는다.
손아귀에 꽉 꽉 꽉 구겨 쥔 에이 포 용지를 냅다 방구석으로 던졌다. 어, 처박힌 종이 뭉치에서 웬 관절 펴는 소리가 난다. 뿌드드드 드드 부풀어오르다, 부풀어오르다, 이내 잠잠해 진다.
종이도 죽는구나
그러나 입 꽉 툴어 막힌 그 마음의 밑바닥에 얼마나 오래 눌어붙어 붙어먹었으면, 그리고 그 무거운 절말, 암흑의 産道를 얼마나 힘껏 빠져 나왔으면 그토록 환하게 뼈 부러지게 기뻤을까
누가, 날 구겨 한 번 멀리 던져다오
시집『쉬』2006. 문학동네
문인수 시인
경북 성주군 초전면 출생 1985년 심상신인상에 「능수버들」 외 4편이 당선, 1986년 시집『늪이 늪에 젖듯이』심상사. 1990년『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문학아카데미, 1992년『뿔』민음사 1996년 제14회 대구문학상 수상. 1999년 시집『홰치는 산』만인사 2000년 김달진문학상 수상 2003년 노작문학상 수상 ‘달북’
2006년『쉬』문학동네 2008년『배꼽』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