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2012 신춘문예 당선작 (1) 본문

현대시모음

2012 신춘문예 당선작 (1)

연안 燕安 2012. 1. 7. 20:38

2012년 제5회 영주신춘문예 당선작

우리들의 인사법法 / 김경순


1.

지문이 세면대 밸브에 쌓여간다
암묵적인 약속처럼
조심스럽게 잡고 올렸다 내리며 안녕,
밸브를 감싸 쥐고 그 위에 나의 지문을 포갠다, 새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매머드를 화석으로 만나듯
비 젖은 발자국에 서로의 무게로 깊이를 더하듯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매일 조우하게 되는 것일까.
만나지 않으려 이렇게 만나는 것일까.

안녕, 안녕,
헤어질 때와 같이.


2.

당신이 지나간 보도블록을 밟았을 때
내가 사려던 책을 당신이 집어 들었을 때
한 소리에 동시에 고개를 돌렸을 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당신과 나도…

춥다는 핑계로 귀 접어 주머니에 넣고
입이 벌어져 있으면 자꾸만 우리는 말이 쏟아질 것 같아요,
아침마다 지우개로 입술을 지우던 나

당신과 나의 선들이 교차하던 순간
내가 웃었기에 당신은 울었다.



[시 심사평]

첫 행의 매력에 끌려


신인들을 만나는 일은 즐겁다. 과거의 낡은 옷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우리 문학의 내일을 보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이 보내온 한 단어,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읽어줄 각오를 하고 한 편 씩 페이지를 넘긴다. 문학이 죽었다고 개탄하는 시대, 돈이 안 되는 문학을 붙잡고 불면의 밤을 지새우는 문청들이 아직도 우리 사회의 곳곳에 숨어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작업 또한 적지 않은 즐거움을 준다. 더구나 어느 순간 큰 나무로 자랄 만한 신인을 발견하면 이런 걱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설렘과 기쁨보다는, 선배로서 떨림이 앞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이번에 5회째를 맞는 영주신춘문예 시 부문에 응모한 시편들은 800여 편에 이른다. 그 중에는 아직 응모의 기본이 안 된 사람들부터, 아직도 원고지에 자필로 정성껏 눌러쓴 글씨도 있고, 미국과 독일에서 국제우편으로 배달된 응모작품들도 섞여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일차적으로 시적 완성도, 새로운 감각, 습작의 수준 등을 고려해서 작품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남은 작품이 한상림 씨의 「임플란트」 외 3편, 김창호 씨의 「자동이체」 외 3편, 정성수 씨의 「배롱나무」 외 2편, 이미화 씨의 「햇빛이 좋은 날」 외 3편, 김경순 씨의 「우리들의 인사법」 외 2편 등이었다.
우선 한상림 씨의 경우는, 일상에서 시적 대상이나 상황을 발견하는 힘은 좋으나, 이것들을 시적으로 형상화함에 있어 현실적 리얼리티에 안주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좀 더 신인다운 상상력을 발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김창호 씨의 경우는, 시상은 잘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적 이미지를 만들어냄에 있어서 너무 서술적이며 산문적이라는 지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시인이 자신의 진술로 설명을 하고 나면 독자들이 느껴야 할 것은 그만큼 적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다. 정성수 씨의 경우도 앞의 김창호 씨와 비슷하게 서술적인 이미지가 지나치게 발견되어 산문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잡은 것은 이미화 씨와 김경순 씨의 작품들이다. 이미화 씨의 경우는 시적인 모티프를 형상화하고 시를 갈무리하는 품이 상당한 습작 이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곳곳에서 발견되는 오자(誤字)들과 행과 연의 구분 등은 시를 읽어감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곤 했다. 반면에 김경순 씨의 경우는 첫 작품, 첫 행부터 읽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앞에서 지적한 다른 분들의 단점을 발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응모된 시들이 고른 수준을 보여주고 있어서 당선자로 밀어 손색이 없다는 데 합의했다.
오직 한 사람만을 뽑아야 하는 신춘문예의 속성으로 인해 굳이 최종심에 오른 분들의 작품에서 단점을 지적하긴 했으나, 기성 시인들도 그러한 점들을 완전히 극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탈락한 분들께도 용기를 가지시라고, 위로의 말씀 전하며, 당선자에게는 큰 박수로 축하를 드린다. 아무쪼록 우리 문단의 큰 나무가 되시길 기원한다.

•심사위원 : 유종인․변종태(대표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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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8회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조장 / 오기석


히말라야는 죽은 자의 무덤이다
바람이 부는 반대 방향으로 그 무덤이 우뚝우뚝 선다
나는 오직 하늘을 나는 독수리를 주목한다
치켜뜨고 고원을 배회하는 그 눈과 내 눈이 부딪칠 때
히말라야는 죽은 자가 산자를 배웅하는
묵직한 항구다
길은 벌써 하늘로 뚫어져 덩그렇게 허공에 매달렸는데
지금 막 망자의 검은 눈을 독수리가 정 조준한다
이곳의 주인은
고원을 만들었다 무너뜨리는 바람이다
그 바람을 타고 독수리는 날아들고 또 그렇게 떠난다
남은 것은 바람의 길을 따라 나는 망자의 영혼 뿐이다

여기서 독수리는 발톱 따윈 쓸모없다
그저 살점을 움켜쥐고 뜯을 수 있는 부리만 튼튼하면 된다
상주도 조문객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들의 목숨은 이미 독수리가 움켜쥐고 있다
그 다음 순서는
모두 바람의 지시에 따라 시간이 알아 할 몫이다
장례의식이 끝나고 죽어서 다시 돌아 올 그 산을 내려간다
이제 남은 것은 망자의 시신과 천장사* 뿐이다
천장사가 도끼로 시신을 난도질한다
그러곤 하늘을 빙빙 도는 독수리에게 살점을 던진다
덥숙덥숙 받아먹는 독수리
그를 바라보는 나도 시신이 되어 던져진다
독수리에게 물고 뜯기는 나의 살점이 나를 바라본다

*히말라야 고원지대 장례에서 시체의 사지를 분해하여 새에게 던져주는 사람.



심사평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언어감각 돋보여


응모작(356편)들이 예년(421편)보다 적지만 작품 수준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관념적이고 상투적인 어휘들이 난무하고 난삽한 작품들이 많아 아쉬움을 떨칠 수 없었다. 언어와 사물의 불일치라는 숙명적 한계를 극복하고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치열한 도전의식(고뇌)이 엿보이는 작품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선자의 손에 마지막까지 남았던 작품으로는 이돈형의 ‘아무르강의 늑대’, 김소현의 ‘칼’, 조영민의 ‘그리움을 수선합니다’와, 오기석의 ‘조장’이란 작품이다.

이돈형의 ‘아무르강의 늑대’란 작품에서 아무르강의 겨울은 바람이 누워있던 자리에 서서히 결빙이 시작되고 굶주린 야성의 울음소리 속으로 늑대사냥의 시작은 생사를 가르는 고단한 생의 애환 속에서 벌이는 생존의 속성을 확인시키고 있는 작품이다.

김소현의 ‘칼’이란 작품은 칼을 갈아 냉동고기를 썰 때마다 아들(작자)은 먼 잠 속의 아버지를 생각한다. ‘네 아버지는 개다’란 어머니의 버릇처럼 외치던 말을 상기한다. 썰리는 고기 속에 손을 넣어 어머니를 만져보고 싶은 충동, 도축장의 소의 혀를 씹으며 짐승의 울음흉내와 겨냥할 수 없는 거리(칼)을 겨냥하는 산자의 일상을 그려내는 솜씨가 돋보인다.

조영민의 ‘그리움을 수선합니다’에선 오랫동안 묵혀둔 아버지의 문서를 정리하다 생존 시 외면했던 아버지의 삶을 아무 가책 없이 허물다 그리움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저 세상으로 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읽어내고 있다.

오기석의 ‘조장’이란 작품은 네팔의 중턱 히말라야에서 성행되고 있는 조장(鳥葬)이란 전래적 장례를 통하여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고 있다. 하늘을 나는 독수리를 주목하며 시신을 주거지 보다 더 높은 곳에서 해체하여 독수리에게 먹이는 장례이다. ‘그를 바라보는 나도 시신이 되어 던져진다/ 독수리에게 물고 뜯기는 나의 살점이 나를 바라본다’는 이미지 포착이 돋보인다.

앞으로 시작활동의 핵심은 대상(사물)을 접촉할 때 관념을 배제하고 탈관념의 사물시 쓰기에 더욱 노력해야 한다. 시단에 큰 재목으로 대성하기를 바라며 오기석의 ‘조장’을 당선작으로 내놓는다.


■심사위원 : 정연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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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역을 놓치다 / 이해원


실꾸리처럼 풀려버린 퇴근 길
오늘도 졸다가 역을 놓친 아빠는
목동역에서 얼마나 멀리 지나가며
헐거운 하루를 꾸벅꾸벅 박음질하고 있을까

된장찌개 두부가 한껏 부풀었다가
주저앉은 시간
텔레비전은 뉴스로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핸드폰을 걸고 문자를 보내도
매듭 같은 지하철역 어느 난청지역을 통과하고 있는지
연락이 안 된다
하루의 긴장이 빠져나간 자리에
졸음이 한 올 한 올 비집고 들어가 실타래처럼 엉켰나
기다리다 잠든 동생의 이불을 덮어주고
다시 미싱 앞에 앉은 엄마
헝클어진 하루를 북에 감으며 하품을 한다

밤의 적막이 골목에서 귀를 세울 때
내 선잠 속으로
한 땀 한 땀 계단을 감고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
현관문 앞에서 뚝 끊긴다
안 잤나
졸다가 김포공항까지 갔다 왔다
늘어진 아빠의 목소리가
오늘은 유난히 힘이 없다


심사평
애달픈 시… 서민가정의 풍경 잘 묘사


지난해보다 작품 수준이 높다는 것이 심사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지만, 개성이 강한 작품이 많지 않다는 지적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행을 타는 것인지 응모작들이 서로 비슷비슷한 점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창작교실 등의 영향이 없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예선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 중에서 특히 정수박이, 설수인, 이해원의 작품들은 당선작으로 일단 손색이 없는 것으로 판단됐다.

정수박이의 ‘능선을 바라보며’는 무리 없이 읽히는 장점을 지녔으며 호소력도 상당하다. 한데 내용이 너무 평범해서 어디서 한 번 들은 것같이 귀에 익다. ‘민달팽이’는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껍데기조차 지니지 못하고 대학을 나온 아들의 취직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오늘의 아버지 모습이 잘 나타나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기에 충분한 내용이다. 그런데도 당선작으로는 무언가 1퍼센트 모자란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어느 한 구석 맺힌 데가 없어서일 것이다. 설수인의 시 가운데서는 ‘투석실의 하루’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직접적인 체험 없이는 쉽게 얻을 수 없는 표현이라는 점이 우선 호소력의 단초를 제공한다. 그 고통을 통해 도달하는 깨달음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한데 조금 장황하고, 내용 탓인지 읽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대목이 없지 않다. ‘줄 끊긴 바이올린’이나 ‘앉은뱅이 저울’에 대해서도 같은 소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해원의 ‘역을 놓치다’는 참 따듯하고 애달픈 시다. 여러 면에서 오늘의 정서를 잘 대변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가난하지만 평화스럽고 행복한 서민의 가정 풍경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새롭고 예리한 느낌을 주지 못하는 흠을 가졌다. ‘육교 밑 고고학자’나 ‘냉장고는 태교중’은 비유가 안이하고 서툴다. 이상의 후보작들을 놓고 숙의한 끝에 시의 완성도에 무게를 두기로 하면서 ‘역을 놓치다’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심사위원 (유종호. 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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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 / 허영둘

젖은 잠을 수평선에 내거니 새벽이다
밤사이 천둥과 함께 많은 비가 내렸다
예고된 일기였으나 어둠이 귀를 키워
여름밤이 죄처럼 길었다
생각 한쪽을 무너뜨리는 천둥과 간단없는
빗소리에 섬처럼 엎드려 나를 낭비했다

지난봄, 바다로부터 해고통지서가 날아왔다 세상은 문득 낯설어졌고 파도는 사소한 바람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코발트블루 바다는 손잡이 없는 창窓, 절망보다 깊고 찬란했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나의 슬픔도 그토록 찬란했을까 나는 구름 뒤에 숨어 낮달처럼 낡아갔다 들판의 푸른 화음에 겹눈을 빼앗긴 나비를 기다리며 나는 오지 않는 희망에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다

바다가 깨어난다
졸려도 감을 수 없는 희망
돌아서는 파도의 옷자락을 따라가면
거룩한 경배처럼 엎드린 섬들
나는 존엄을 다해 아침 바다의 무늬를 섬긴다
희망이란 소소한 풀잎이거나
날 비린내 풍기는 고깃배의 지느러미 같은 것
풀잎도 계단도 허리까지 젖어 궁리가 깊다
밤새운 탕진에도 하늘이 남아 드문드문한
구름 송이들은 젖은 마음을 문지르는 데 요긴하겠다
마루 끝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동안
담장 아래 칸나의 방에 볕이 붉게 들고
거미는 방을 훔치는 수고를 덜겠다
느슨하던 수평선도 다시 팽팽해져 나비를 부르고
고깃배 한 척 안개를 젖히며 희망처럼 돌아오고 있다


심사평

"새로운 어법 통한 도전의식 돋봬"


본심에 오른 것은 총 6편이다. 최은묵의 '알', 권동지의 '늦은 귀가를 베껴쓰다', 권수진의 '과메기', 이주상의 '편두통', 손상호의 '시미즈 터널', 허영둘의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 등이다. 이들은 수준에 올라 당선작으로 하여도 무방한 느낌이 들었다.

'알'은 발상이 참신해 눈이 갔으나 아직 관념이 형상화보다 앞선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 '늦은 귀가를 베껴쓰다'는 삶의 고단함에 대한 감성의 풍부성이 주목되나 상상력의 허점과 문장의 완결성 부분에 문제가 제기됐다. '과메기'는 파란만장한 삶을 바다에 비유해 전개한 참신성이 돋보이나 주제가 너무 상식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흠으로 지적됐다. '편두통'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의 복잡한 심리를 번득이는 표현으로 포착한 점은 놀라우나 관념이 너무 앞서고 설명적이라는 점이 문제로 언급됐다.

그리하여 '시미즈 터널'과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이 종심에 들어가게 되었다. '시미즈 터널'은 쓸쓸한 삶의 내면을 더없이 자연스럽고 유려하게 표현한 점이 장점으로 두드러졌지만, 이 점이 오히려 완숙한 경지를 보여주어 신춘문예로서 가지는 발전 가능성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비해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은 새로운 어법을 통한 도전의식이 엿보이고 현실에 대한 인식의 깊이, 표현의 참신성도 갖춰 당선작으로 확정하는 데에 이의가 없었다. 당선자가 더욱 정진해 한국 시단의 중추가 되길 기원한다.


심사위원 : 김종해·천양희·김경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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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노루귀가 피는 곳 / 최인숙

그래 그래 여기야 여기
신기해하고 신통해하는 것은 뜸이다
안으로 스미는 연기의 수백 개 얼굴이
아픈 곳을 알아서 나긋나긋 더듬는다
그러고 보면 뜸은 어머니의 손을 숨기고 있다
뜸과 이웃인 침을 권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침의 얼굴과 대적한 적 많아
보는 순간 심장부터 놀라 돌아서곤 한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뜸이 다 사그라지기를 기다리다 보면
어머니도 부엌에서 또 뜸을 뜨고 계셨다
아침저녁 굴뚝으로 하늘 한켠을

할머니 무덤 여기저기에
노루귀가 피었다
겨울과 봄 사이
가려워 진물 흐르는 대지에
아니 너와 나의 그곳에
누가 아련히 뜸을 뜨고 계시다

어느 세상의 기혈이 뚫렸나 하루도 환하다

 

 


[심사평] 이질적 형상화로 작가의 시적 내공 고스란히 묻어나

응모작품들을 공들여 읽었다. 요즘의 한국시가 지나치게 난삽하면서 그 길이도 길어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곤 하는데, 이번 응모작들도 그런 경향들을 드러내는 작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시인이 지니는 표현 의도는 최적의 언어로 구조화되고 형태화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표현 의도를 겉으로 드러내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생략과 함축으로 끌어안을 때 견고하게 정제된 시를 만날 것이다.

<노루귀가 피는 곳>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이 시의 작자는 작은 풀꽃인 ‘노루귀’에서 환기되는 정서를 한방요법의 ‘뜸’으로 풀어내고 있다. ‘뜸’은 약쑥을 비벼서 인체의 혈 위에 놓고 불을 붙이는 치료행위이다.

연기를 내면서 쑥이 타들어가고 그 기운이 혈을 자극해서 막힌 기를 소통시킨다. ‘노루귀’의 식물이미지를 한방치료 요법인 ‘뜸’으로 병치시킨 시인의 착상도 새롭지만 아침저녁 굴뚝으로 연기를 피워 올리는 어머니의 노고와 ‘뜸’이 피워 올리는 연기를 합일시킨 상상의 능력도 두드러진다.

상호 이질적인 이미저리(‘노루귀’ ‘뜸’)를 연관시킨 시인의 상상력은 이 시의 작자가 상당한 시적 내공을 쌓은 분임을 미루어 알 수 있게 해준다. 같은 시인의 투고 작품 <무지개>도 선연한 이미지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이분의 역량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최종까지 남았던 작품들은 <우포의 달 외 2편>, <할머니의 기도 외 3편>, <다리가 잘린 소녀에게 외 2편> 등이었다.

이분들도 나름대로 시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분들이다. 정제된 시에 이르는 노력들을 계속한다면 좋은 시에 이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훌륭한 시인으로 우뚝 서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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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얼룩진 벽지 / 성명남

독거노인이 사는 벽 귀퉁이에
어린 재규어 한 마리 숨어 산다
우거진 풀숲 사이로 자세를 낮춘
짐승의 매화무늬가 보인 건
열대우림 같은 우기가 시작된 며칠 뒤였다
지직거리는 TV속 동물의 왕국에선
재규어가 강물 속에 꼬리를 담그고
살랑살랑 흔들어 물고기를 잡는다
노인은 자신의 퇴화된 꼬리를 자꾸 만져보다
돌아누우며 TV를 꺼버렸다
그칠 줄 모르고 비가 내렸다
하루가 다르게 짐승의 영역은 확대 되어갔다
영역을 표시하는 그 채취만으로
목덜미를 물린 듯 노인은 불안에 사로잡혔다
짐승이 다 자랐을 때 닥칠지도 모를
치명적 위험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이다
점점 몸집을 불린 수컷 재규어가
몸이 근질거릴 때마다 혀로 제 몸을 핥는다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기세다
범람한 강물이 골목을 덮쳤을 때
노인의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맹수가 펄쩍 뛰어내렸다
순식간에 평원을 가로질러 노인을 물고 사라졌다
도배장이가 벽지를 쫙 뜯어내자
그 속에 무성한 열대밀림이 펼쳐졌다



심사평
절제의 미학과 따뜻한 응시로 잘 표현

늦게 담은 동치미는 익지 않았고 이곳저곳 지인들의 집에서 보내온 김장김치도 아직 맛이 들지 않았다. 먼저 먹으려고 냉장고에 넣지 않고 밖에 내놓은 김치 역시 설익었다. 먹기에 마땅치 않다.

금방 담은 김치는 배추의 고소하고 싱싱한 맛과 양념이 잘 어우러져 있어서 그 싱그러움으로 먹을 수 있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면 그 맛을 잃게 된다. 양념이 고루 배고 익어서 맛이 든 김치가 밥상에 오를 수 있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몇 포기 남아있지 않은 묵은 김치를 꺼낸다. 역시 이 맛이야. 시를 쓰는 일도 그렇다. 한껏 기교를 부리며 은유와 비유로 멋을 부린 시들이 막 버무린 김치와 같다면 오래 묵어 양념들이 고루 배고 맛이 든 김치, 그러나 배추의 처음 싱싱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아삭아삭거리는 김장김치는 온몸으로 밀어올린 울림이 있는 시, 깊은 맛이 있는 좋은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최종심으로 올라온 두 작품은 '얼룩진 벽지'와 '보도블록'이었다. 그러나 '보도블록'은 신선한 시선이 돋보였음에도 이를 받쳐줄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지 않았다. 당선작으로 뽑은 '얼룩진 벽지'는 김치와 같았다. 푸른 배추의 싱싱함을 가진 잘 익은 김장김치와 같은 시. 긴장감을 잃지 않고 절제의 미학과 '동거'와 같은 다른 시에서 보여준 깊고 따뜻한 응시를 가진 이 시를 놓고 심사위원들은 즐겁게 당선작에 올려놓았다.

처마 끝에 걸린 곶감들이 잘 마르고 있다. 곶감은 제 몸의 수분을 햇빛과 바람 앞에 알몸으로 온통 내놓고 말라갔을 때 그 속에 비로소 떫은맛이 변하여 달고 붉은 속살을 갖게 된다.

이제 파도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새로운 시인이 헤쳐 나갈 험난한 여정에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시인 김수영의 시 한 구절이다. 온몸으로 밀고 가는 시인정신으로 나는 그 표현을 읽었다. 적어도 시를 쓴다면 이 정도의 자세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목숨을 걸어보는 정도 말이다.

심사위원 문정희 최영철 박남준(이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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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목련꽃 / 조영민


꽃이 문을 꽝 닫고 떠나 버린 나무 그늘 아래서
이제 보지 못할 풍경이, 빠금히 닫힌다
보고도 보지 못할 한 시절이 또 오는 것일까
닫히면서 열리는 게 너무 많을 때
몸의 쪽문을 다 열어 놓는다

바람이 몰려와 모서리마다 그늘의 알을 낳는다
온통 혈관이고 살인 축축한 짚벼늘이 느껴져
아주 오랫동안 지나간 것들의 무늬가 잡힐 듯한데…

꽃 진 그늘에는 누가 내 이름을 목쉬게 부르다가 지나간 것 같아
꿈이나 사경을 헤맬 때 정확히 들었을 법한 그 소리가
왜 전생처럼 떠오르는 것일까

그늘은 폐가다 그것은 새집이나 마찬가지
나는 폐가의 건축자재로 이뤄졌다
태양이 구슬처럼 구르는 정오. 꽃그늘에 앉으면
뒤돌아서 누가 부르는 것 같아
부르다 부르지 못하면 냄새로 바뀐다는데
뒤돌아서 자꾸만 누가 부르는 것을 참을 수 없어
나무를 꼭 껴안아 보는데
나무에선 언젠가 맡았던 냄새가 난다

심사평

"활기찬 이미지 직조·신선한 묘사 뛰어나”

예심을 거쳐 올라온 이가 8명이었다. 전반적으로 과도한 수사와 진정성이 얕은 말놀음에 빠져 있어서 심사위원들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으나, 이를 압축해들어가 마지막까지 논의된 몇 편의 작품에 이르러서야 그러한 의구심이 떨쳐지는 듯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이유진의 ‘내 침대엔 가끔 토끼가 자요’ 외 몇 편과 조영민의 ‘목련꽃’ 등 수편, 그리고 염민기의 ‘이식’ 등을 놓고 저울질을 했다. 그 결과 쉽게 ‘목련꽃’이 당선작으로 선택됐다. 다른 작품에 비해 아주 개성적이어서 단연 돋보인다는 평을 들었다. 함께 보낸 다른 작품의 수준도 고르게 느껴졌다. ‘이식’ 등은 새로운 시각에도 불구하고 이미지의 과도한 학대로 메시지가 애매하다는 점에서, ‘내 침대엔 가끔 토끼가 자요’ 등 몇 편은 작품은 아주 개성적인 데다 일정 수준을 고르게 유지하고 있어 돋보였으나 주제를 부각하는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제외됐다.

‘목련꽃’은 제목의 소박함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아주 짜임새 있는 이미지의 구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늘은 폐가다 그것은 새집이나 마찬가지/ 나는 폐가의 건축자재로 이뤄졌다’와 같은 단연 돋보이는 구절들로 유장하게 짜나가는 솜씨가 아주 뛰어났다. 묘사도 정확하고 신선하다. 이미지의 직조 솜씨도 꾀죄죄하지 않고 상상력의 구사도 아주 활기에 차 있으면서도 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꽃과 나무, 그늘과 밝음을 얽어 짜면서 ‘몸의 쪽문을 다 열어 놓는’ 그 고요한 시선이 눈부시다. 다만 이 시와 함께 보내온 그의 작품들의 미세한 부분에서 드러나는 겉멋과 자의적 이미지들이 걷어내졌으면 더 좋았으리라. 대성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문인수·이하석

 

201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조련사 K / 한명원


그는 입안에 송곳니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두 발로 걷는 것이 불편할 때도 있어 혼자 있을 때 네 발로 걸어도 보았다. 야생은 그의 직업이 되었고 조련은 가늘고 긴 권력이 되었다.

모든 권력은 손으로 옮겨갈 때 가벼워진다. 눈치를 보는 것들의 눈빛은 언제나 심장을 겨냥하는 법. 다만 두려운 것은 손에 들려 있는 권력일 뿐이니까.

조련사 k. 그는 아침마다 동물원을 한 바퀴씩 도는 순방이 있다. 금빛 은행잎이 k의 머리 위로 왕관처럼 씌워진다. 철조망에 갇힌 초원이 펼쳐져 있다. k는 손을 흔들거나 휘파람을 분다. 잠자던 맹수가 눈을 뜨더니 달려온다. 무릎을 꿇는다.

k는 맹수의 꼬리를 목에 두르고 맹수코트를 걸치고 곤봉을 휘두르는 자신을 상상하곤 한다.

어느 날부터인가 k의 얼굴에 구레나룻이 생기고 몸에 털이 자라고 손톱은 길어졌다. 모든 모의謀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긴다. 말 안 듣는 맹수에게 먹이를 주지 않고 채찍을 휘두르며 맹수보다 더 맹수처럼 사나워져갔다.

얼마 전 야생의 모의謀議가 철조망을 빠져나갔다. 그 후 k의 통장으로 감봉된 월급이 들어왔다. k는 자기 목을 조르는 조련사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몸에 털이 빠지고 손톱이 빠졌다.

조련으로 청춘을 보낸 k는 결국, 야생을 놓치고 말았다.

새로운 조련사들이 들어오고 그들은 맹수들과 더 빨리 친해졌다. 동경하던 야생은 저 쪽에서 어슬렁거렸다. 이빨 빠진 맹수 한 마리가 다른 맹수 눈치를 보며 어슬렁거렸고 금빛 왕관은 가을 저 쪽으로 다 날아가 버렸다. 얼마간 퇴직금의 조련을 받는 힘없는 맹수가 되어 있었다



[심사평] 치밀한 관찰과 묘사… 섬뜩한 시적 투시력 보여


본심에 올라온 8명 응모자들의 작품을 읽고 선자들은 갈수록 장황해지고 난삽하고, 모호해지는 오늘날의 시의 흐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시 본연의 길을 추구하는 시로서 시의 고전적 규범이라 할 언어의 함축미와 새롭게 삶을 성찰하고 투시하는 상상력의 결핍이 심화되어 간다는 것을 발견했다.

논의를 거듭하며 검토한 결과 최종적으로 3명의 작품이 남게 되었다. 먼저 ‘창밖이 푸른곳’등 3편을 투고한 김은지의 경우 ‘뿔의 냄새’가 눈길을 끌었지만 아쉽게도 이미 과거에 응모했던 동일 시를 계속 투고하고 있다는 점이 신인으로서의 자세가 아니라는 점과 다른 두 편의 시적 사유도 평면적이란 점이 못내 아쉬웠다.

'조련사k’ 등 3편의 작품을 투고한 한명원의 경우 산문적 진술을 꾀하며 그 안에 극적 구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거슬리지만 삶의 구체성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묘사가 눈길을 끌었다. 그의 시는 오늘날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되돌아보게 해준다. 그러나 시적 발상이나 화법이 새롭다기보다는 유형화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번 응모자 중에서 인간과 현실에서 삶의 남루함을 포착하는 섬뜩한 시적 투시력을 보여준 유일한 작품이란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불통을 어루만지다’외 3편을 투고한 정지우의 경우 시적 표현은 응모 시 중에서 가장 세련되어 보였지만 ‘뒷문의 형식’이나 ‘사춘기’와 같이 시를 거의 관념에서 끌어오고 있다는 점이 아무래도 불안해 보였다. 두 선자는 당선작을 최종적으로 가리는 과정에서 유형화된 시적 틀에 갇힌 시라는 다소의 불만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삶을 관찰하는 한명원의 ‘조련사k’가 보여준 힘없는 맹수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단단한 말의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합의했다. 시라는 것은 삶과 현실에 대한 성찰과 열정의 산물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문정희·조정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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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월면 채굴기 / 류성훈


몸 누일 곳을 모의하러 온 새 몇 마리가
소독된 달 표면을 마름질했다
실외흡연구역의 담뱃불이
바람 안쪽에 수술선을 그었을 때
세 번째 옮긴 병원에서도 아버지의 머릿속
돌멩이는 깨지지 않아
한 몸 추슬러 가던 길들만 허청거렸
온 세상이 앓으면 아픈 게 아니고
매일 아프면 그것도 아픈 게 아니라고
위독한 시간들을 한 곳에 풀어놓으면서
아버지가 고요의 바다 어디쯤을 채굴하고 있었다
병들도 힘 빠질 무렵
두개골을 망치질하는 마른기침이
울퉁불퉁한 삶 쪽으로 흔들렸다
몸속의 돌은 달 뒤편의 돌 같아
닳고 닳은 땅 밑보다도 단단하고
검을수록 깊은 광맥에 이어져 있는데
어느 갱도에서 그는 길을 잃었을까
저 큰 굴착기가 가지고 나올 단단한 돌
돌아와 때때로 돌아눕던 그는
다리의 성근 터럭을 젊은 내게 보여주었다
달의 얼룩이 지구에 뿌리를 내린 날
아무에게도 거기서 뭘 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창 밖 저탄 더미. 캐낸 달빛이
벌써 내게 문병오고 있었다


심사평

"입체적인 상상력에 눈길, 수사의 과잉은 아쉬워"

시 부문 심사는 예심 없이 심사위원들이 투고작을 나누어 읽고 추천된 작품을 교환해서 읽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신춘문예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난해하고 실험적인 시보다는 서정적 화법으로 일상적 삶의 순간을 포착하는 작품들이 대세를 이루었다. 하지만 독창적인 감수성과 화법이 잘 발견되지 않고, 언어에 대한 자의식 없이 정형화된 감정과 관념을 전달하는 데 그친 익숙한 신춘문예 유형의 작품들이 많아 아쉬웠다.

마지막까지 논의 된 작품은 '그늘말'(박하랑)과 '연애의 국경'(여성민), '월면채굴기'(류성훈)였다. '그늘말'은 투명한 감수성과 정갈한 언어들이 돋보이는 시였다. 생에 대한 따뜻한 태도와 언어에 대한 맑은 감각이 좋았지만, 함께 투고된 작품들을 고려할 때, 세계에 대한 해석과 상상력이 평면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연애의 국경'의 경우는 발랄하고 독특한 화법이 매력적인 시였다. 다소 거칠게 느껴지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연애'와 '국경'을 연결시키는 상상력은 흥미로웠다. 그런데 언어와 형식상의 안정감이 떨어진다는 우려를 떨치기 힘들었다.

당선작이 된 '월면채굴기'는 우선 그 상상력이 입체적이고 화려하다. 아버지의 병과 생의 이야기를 아버지 몸속의 돌과 두개골과 달 뒤편 돌의 이미지와 연결시키는 발상은 매혹적이었다. 언어를 다루는 능력도 뛰어나며 아버지의 병과 생애를 둘러싼 깊은 시선이 구체적인 이미지를 얻고 있다. 다만 수사의 과잉이 있고, 다채로운 이미지의 구축에 치중하는 작법이 어법 자체의 신선함을 보여주지는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 아쉬움은 앞으로 쓰게 될 미지의 작품들을 통해 극복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시 쓰는 일이 외로움을 무릅쓰지 않고는 불가능한 시대에, 투고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심사위원 황지우(시인) 정일근(시인) 이광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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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풍경 재봉사 / 김민철


수련 꽃잎을 꿰매는 이것은 별이 움트는 소리만큼 아름답다
공기의 현을 뜯는 이것은 금세 녹아내리는 봄눈 혹은
물푸레나무 뿌리의 날숨을 타고 오는 하얀 달일까

오늘도 공기가 휘어질 듯하게 풍경을 박음질하는
장마전선은 하늘이 먹줄을 튕겨놓고 간 봉제선이다
댐은 수문을 활짝 열어 태풍의 눈에 강줄기를 엮어준다

때마침 장맛비는 굵어지고, 난 그걸 풍경 재봉사라 부른다

오솔길에 둘러싸인 호수가 성장통을 앓기 전,
빗방울이 호수 가슴둘레를 재고 수면 옷감 위에 재봉질한다
소금쟁이들이 시침핀을 들고 가장자리를 단단히 고정시킨다

흙빛 물줄기들은 보푸라기의 옷으로 갈아입고
버드나무 가지에서 밤새 뭉친 실밥무늬가 비치기도 했고
꾸벅 졸다가 삐끗한 실밥이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그것은 풍경 재봉사의 마지막 바느질이 아닐까

주먹을 꽉 쥐려던 수련의 얼굴로 톡 떨어지는 물방울

수련꽃이 활짝 피어 호수의 브로치가 되었다


심사평

유행·시류 벗어난 우아한 아름다움 돋보여



예심을 거친 20명의 작품 중에서 최종심까지 올라온 작품은 이해존의 ‘안락한 변화’, 유정용의 ‘IN 1914 네루다’, 안대근의 ‘샌드위치 인생’, 김민철의 ‘풍경 재봉사’ 등 4편이었다.

‘안락한 변화’와 ‘IN 1914 네루다’는 사실성이 두드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 전체가 지나치게 모호하다는 점에서 먼저 탈락되었다.

정말 좋은 시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어야 하는데 지나친 모호성이 해석의 다양한 물꼬를 막았다.

‘샌드위치 인생’은 ‘벽돌의 무게를 짊어지는 사람의 등은 벽돌보다 벌겋지’라는 첫 행에서부터 개성적 면모가 두드러졌으나 결국 희망이 상실된 어두운 심상으로 시가 종결되고 말았다는 점이 단점이었다.

무엇보다도 제목을 정하는 능력이 약했다. 제목도 시의 일부이므로 시 전체를 관류할 수 있는 제목이 요구되나 그렇지 못했다.

더군다나 같은 시를 제목만 바꾸어 중복 투고해 성실성을 인정하기 힘들었다.

‘풍경 재봉사’는 신선하고 아름답다. 유행과 시류에서 벗어난 점이 무엇보다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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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물푸레 동면기 / 이여원(李如苑)


물푸레나무 찰랑거리듯 비스듬히 서 있다
양손에 실타래를 감고 다시 물소리로 풀고 있다
얼음 언 물에 들어 겨울을 나는 물푸레
생각에 잠긴 척
바위 밑 씨앗들이 졸졸 여물어가는 소리를 듣고 있다
얼룩무늬 수피가 물에 닿으면 물은 파랗게 불을 켰었다 바람은 지나가는 분량이어서 몸 안에 들인 적 없고 팔목을 좌우로 흔들어 멀리 쫓아 보냈었다
손마디가 뭉툭한 나무는 실을 푸느라 팔이 아프다
나무의 생채기에 서표(書標)를 꽂아두고
녹아 흐르는 물소리를 꽂아두고 말린다
푸른 잎들은 물속 돌 밑에 들어 있고
겨울 동안 잎맥이 생길 것이다
추위가 가득 엉켜 있는 물가, 작은 샛길이 마을 쪽으로 얼어 미끄럽다
빈 몸으로 서 있는 겨울나무들
모두 봄이 오는 방향 쪽으로 비스듬 마중을 나가 있다
날짜를 세는 가지는 문맹(文盲)이다
개울이 키우고 있는 것이 물푸레인지 물푸레가 키우고 있는 것이 개울인지 알 수 없지만
나뭇잎 하나 얼음 위로 소금쟁이처럼 떠 있다

시 심사평
치밀한 묘사력·견인주의적 시각 돋보여

대개 오늘날의 새로운 경향의 시는 상관관계가 멀게 느껴지는 이미지의 조합이나 산문적인 형식의 실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말의 상투적인 틀을 해체하고 인간의 감성을 새롭게 드러낸다고 하여 어불성설이 되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전적으로 자유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은 꽃의 개화(開花)도 후에 관찰해보면 어떤 법칙이 내재해 있다. 그러므로 읽히지 않는 시라고 하여 다 난해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시가 난해하기는 해도 어불성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사물들에서 상관관계를 보는 참신한 시각과 그에 따른 보편성의 획득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신춘문예는 참신성과 패기가 새로운 보편성을 창출해나가는 신인들의 미래 문법이 각축을 벌이는 축제의 장이다. 예심을 통과한 21명의 작품 중에서 최종심에서 논의된 것은 이재흔의 '크라이오닉스', 이해존의 '유목의 방', 이여원의 '물푸레 동면기'와 '난청' 등 4편이었다. '크라이오닉스'는 발상이 참신하지만 언어의 경제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실패한 은유들이 더러 눈에 띈다. '유목의 방'은 말미의 비약이 아쉽다. 이 시는 고시원이라는 막막한 삶의 공간을 대초원이라는 상상적 공간으로 재해석해낸다. 그러나 말미의 ‘고시원 휴게실’과 앞에서 펼쳐낸 ‘몽골 사내’의 이야기가 어떻게 연관을 맺을 수 있는지 좀 더 치밀하게 접근했어야 한다. 세상에 완벽한 시는 성립할 수 없다지만 불가능한 것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능력은 시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결국 이여원의 두 작품에서 하나를 당선작으로 선정하기로 이견 없이 합의했다. '물푸레 동면기'는 얼음물에 떠 있는 겨울의 물푸레나무를 치밀하게 묘사해가면서 서정시의 깊은 완성도를 보였다. 또한 '난청'은 사물을 포착하는 감성이 신선하다. 그만큼 두 작품 모두 각각 완성도와 참신성이라는 양측면에서 잘 빚어냈다. 그의 두 작품 중에서 '물푸레 동면기'를 당선작으로 선정한 것은 아포리즘의 도움 없이 세밀하고 실제적인 묘사만으로 새롭게 열어 보이는 서정의 창출이 읽을수록 착착 감기는 감칠맛과 더불어 깊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얼음물 속에서 동면하는 물푸레에서 견인주의적인 접근을 통해 “푸른 잎들은 물속 돌 밑에 들어 있고/ 겨울 동안 잎맥이 생길 것이다”라는 성숙한 견자의 시각을 이끌어내는 점도 인상적이다. 당선을 축하하며, 우리 시단에 서정의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길 기대한다.(도광의`박형준)

예심: 송종규`장하빈
본심: 도광의`박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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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나의 고아원 / 안미옥

신발을 놓고 가는 곳. 맡겨진 날로부터 나는 계속 멀어진다.
쭈뼛거리는 게 병이라는 걸 알았다. 해가 바뀌어도 겨울은 지나가지 않고.
집마다 형제가 늘어났다. 손잡이를 돌릴 때 창문은 무섭게도 밖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벽을 밀면 골목이 좁아진다. 그렇게 모든 집을 합쳐서 길을 막으면.
푹푹, 빠지는 도랑을 가지고 싶었다. 빠지지 않는 발이 되고 싶었다.
마른 나무로 동굴을 만들고 손뼉으로 만든 붉은 얼굴들 여러 개의 발을 가진 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 이상했다. 집을 나간 개가 너무 많고
그 할머니 집 벽에서는 축축한 냄새가 나. 상자가 많아서
상자 속에서 자고 있으면, 더 많은 상자를 쌓아 올렸다. 쏟아져 내릴 듯이 거울 앞에서
새파란 싹이 나는 감자를 도려냈다. 어깨가 아팠다.


식탁에서 / 안미옥


내게는 얼마간의 압정이 필요하다. 벽지는 항상 흘러내리고 싶어 하고 점성이 다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싶어 한다.
냉장고를 믿어서는 안 된다. 문을 닫는 손으로. 열리는 문을 가지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옆집은 멀어질 수 없어서 옆집이 되었다. 벽을 밀고 들어가는 소란. 나누어 가질 수 없다는 게
다리가 네 개여서 쉽게 흔들리는 식탁 위에서. 팔꿈치를 들고 밥을 먹는 얼굴들. 툭. 툭. 바둑을 놓듯


심사평
남다른 상상력 때묻지 않은 목소리

두 심사자가 예심에서 넘어온 16명의 시 80여 편을 각각 읽고 난 뒤 정지우의 ‘납작한 모자’, 김복희의 ‘매일 벌어지는 놀랄 만한 일’, 윤종욱의 ‘서툰 사람’, 김양태의 ‘흐르는 돌’, 종정순의 ‘알람들’, 조선수의 ‘분홍손’, 안미옥의 ‘나의 고아원’ 등을 당선작으로 논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를 “어떤 것의 존재를 지우면서도 그것을 읽기 쉽게 유지하는 몸짓의 이름”이라고 했다. 시 쓰는 것도 낡은 존재를 지우고 그 위에 새로운 존재를 세우려는 몸짓일 테다. 나날의 현존과 시적 현존은 섞이고 스민다. 그렇게 상호 삼투하는 나날의 현존과 시적 현존은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시적 현존을 세우는 데 상상력이라는 화학작용이 불가피하게 개입하는 까닭이다.

두 심사자는 안미옥을 당선자로 세우는 데 흔쾌하게 동의했다. 다만 어떤 작품을 당선작으로 할 것인가 하는 데는 의견 조율이 필요했다. 고심 끝에 두 작품 ‘나의 고아원’과 ‘식탁에서’를 골랐다. 익숙함 속에서 익숙하지 않음을, 하찮은 것에서 하찮지 않음을 찾아내는 눈이 비범하고, 현존의 혼돈을 뚫고 그 눈길이 가닿은 지점에 어김없이 생의 기미들과 예감들이 우글거렸다. 남다른 상상력과 때 묻지 않은 자기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도 신춘문예라는 통과의례 이후의 작품들에 대한 신뢰를 크게 더하게 한다. 험난한 시업(詩業)의 길에 들어선 것을 축하드린다.

심사- 장석님 장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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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경제신춘문예 가작


정중한 각도 / 손호경

관솔 몇 점으로 술잔을 만든다
그 잔에 향기를 가득 채우면 그가 나를 차지할 것이다

먼저 톱을 켜서 곁가지를 자른 다음 용각무늬가 새겨진 몸을 열어놓는다
빗물로 몸을 닦고 바람으로 머리를 빗던 한 생이
압축된 곡선을 고담하게 품고 있다

끌 머리를 토닥이며 흑반점 하나를 도려내자 메아리가 퍼렇게 울려 퍼진다
그늘이 엷은 바람을 일으키자
그 몸에 우주를 그리듯 동그라미를 그려 넣고 숨을 멈춘 채 굳은 살점을 파들어간다
날 선 끌을 튕겨내다가 제 무늬를 가무리며 끌을 물고 늘어진다

어느 누가 제 몸을 호락호락 내어줄까
정중한 각도로 손잡이를 고쳐 잡고 청정한 마음으로 살점을 들어낸다
구멍이 깊어질수록 관솔은 유순해지고 한 생애를 묵언으로 간직해온 감로정의 향기가 무늬의 간극 마다 흘러나온다

두 손 위로 올라앉은 술잔
울창한 솔밭 한 채가 그 안에 담겨있다



심사평



시부문은 아직 수준에 미달하는 출품작들이 많았다. 산문의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이 용이한 일은 아닐 것이다. 어렵게 4편을 최종심에 올렸다. <폐화분>과 <오리무중>그리고 수상작으로 결정된 <구두>와 <정중한 각도>가 그 작품들이다.

<폐화분>은 골목에 버려진 화분을 보고 마음 아파하는 시인의 따뜻한 시선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수작이었다. 그러나 함께 출품한 작품들이 이에 따르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다음으로 <오리무중>은 "세상은 수심이 너무 깊어/발이 닿지 않았다"는 표현에서 보듯 시적 상상력이 뛰어났다. 다만 작품 후반이 전반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하고 허망하게 끝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가작으로 뽑힌 <정중한 각도>는 함께 출품한 작품들이 골고루 완성도를 갖추고 있어 시적 훈련이 되어 있는 분임을 말해준다. 산문처럼 늘어지지 않는 시적 긴장도를 갖춘다면 더욱 좋은 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희주 시인 이순원 소설가, 채원배 머니투데이 금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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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신춘무등문예 시 당선작


불고기, 물꼬기 / 유빈


낱말들을 고르게 쓰다듬다 놓쳐버리는 혀
빈 밥상 위 문법책은 달아나는 발음을 따라잡지 못해요
귀퉁이 까매진 책갈피 사이로
나쨩 해변의 파도가 밀려와요
불고기는 불고기, 물고기는 왜 물꼬기일까요
언제나 고개를 끄덕여주는 선생님 그러나
센터 문만 나서면 불고기도 불고기,
물고기도 물고기, 책에 빨갛게 그려넣은
물결무늬 밑줄들, 어려운 차이들이
행간 사이를 꼬불꼬불 헤엄치고 있어요
발화(發話)되지 않는 더듬이
언제쯤 머리로 말하지 않아도 될까요
계약서를 다 채우려면 얼마큼 부드러워야 하나요
듣기연습을 위해 놓치지 않는 9시 뉴스데스크
화면에 떴다 사라지는 얼굴
전송되지 못한 채 들것에 실려나가는 비명소리
면사포 속에서 하노이 강이 부풀어올라요
방향도 통로도 모른 채 꿈에 젖은 갈매기들
셀 수 없는 물이랑을 넘을 때
순서를 따라 늘어서는 인터뷰 행렬
해본 적 없는 질문들, 나는, 너는…
기름에 잠겨 지글거리는 계란 프라이 한가운데
섬처럼 똬리 튼 노른자 한 알
하얀 거울에 노란 얼굴이 밤낮없이 비춰지고
강변의 모래알들 잊으면 될까요
맘 편히 흘러들 수 있는 틈새는 어디 있을까요


심사평
정체성 담는 노력 담담히 그려내

신덕룡(문학평론가·시인·광주대 문창과 교수)

2012년 무등일보 신춘문예에 많은 예비시인들이 몰려왔다. 효율과 결과만을 요구하는 시대에 시인을 꿈꾸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희망적인 일이다. 보다 행복한 삶을 꿈꾸는 이들의 에너지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려 생각하면, 현재의 우리 삶이 황폐할 대로 황폐해져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기도 하다. 오죽했으면 시로 지친 영혼을 위로하고자 했을까? 너나할 것 없이 물질적 욕망에 휩싸여 정신없이 살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다.

이런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많은 시편들에서 시적화자가 과장되어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징징거리고 있거나, 울고 있거나, 잔뜩 화가 나 있었다. 형상이 아닌 격정의 토로에 매달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적 대상과 화자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구체적 형상을 통해 의미를 구축해가는 시편들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작품은 양은정의 '신발을 위한 레시피', 안준혁의 '검은 강의 기록', 유빈의 '불고기,물꼬기' 였다. 우선, '신발을 위한 레시피'는 삶의 내용과 요리를 결합시켜 시상을 전개했다. 시의 바탕에 깔린 삶의 쓸쓸함이 잘 묻어났지만, 이런 상상력은 신선하지 않다는 결점이 있었다. '검은 강의 기록'은 문명비판적인 시각으로 우리 삶의 음화를 잘 표현했지만 주제가 시적 형상을 압도하고 있었다. '불고기,물꼬기'는 이주여성의 삶을 ‘언어’를 통해 형상화했다. 언어로 동화되지 않는 현실의 틈새를 발견하고, 그 틈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노력을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이었다.

세 사람의 장단점을 비교한 결과, 시상을 전개시키는 솜씨나 발전 가능성의 측면에서 유빈씨의 작품에 믿음이 갔고,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앞으로 좋은 시인으로 성장하길 빈다. 아울러 양은정, 안준혁 두 분에게도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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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링거 속의 바다 / 김영란


온 몸이 글썽거린다 아득한 바다냄새
어쩌면 이 신열은 오래 전의 길 하나 열어줄지도 몰라
세상은 바다가 낳은 미지근한 비망록일거라고
아니, 그 비망록이 낙서들의 끝에 부려놓은 삽화일거라고
네가 나른한 힘을 얘기했던 곳으로지금 나는 가고 있는지도 몰라
내가 너의 힘을 빌려 나에게 이르지 못할 때마다
변명처럼 꺼내든 바다가 아닌
방금 전 내 몸의 한 모퉁이로 들어오던
링거액 같은 바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잠깐의 외출로
조회할 수 있는 너를 믿지 않지
너의 웃음이 우리가 기억할 수 없는 날들 속에서
조난의 느낌 하나만으로
바람을 이끌고 오고 폭풍을 이끌고 와
끝내 범선 같은 고백을 숨겼던 것처럼
나 지금도 먼 옛날의 너를 믿지 않아
기억이란 몇 방울의 망각으로 걸어나갔던
오랜 신열의 발자국들
어디선가 때 이른 저뭄이 다가와
내 옆구리를 툭 친 것도
네가 나로부터 멀어지던 형식이었음을 기억하는 한 순간
내 통증의 한 쪽에서 고개를 드는 현실 하나
나는 잠시 링거액 건너편에 기대어 놓았던 목발을 챙겨
너의 바다가 보일 것 같은 창가로 절룩절룩 걸음을 옮긴다




심사평
형식적 면에서 가장 숙련된 솜씨

김규린 시인

작품보다 작품 속의 영혼이 먼저 들여다보여서 감상이 순조롭지 못한 경우가 있다. 예심을 거친 작품들은 선자로 하여금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토록 다른 4인 4색의 영혼과 그 시력(詩歷)은. 고심하며 읽은 작품은 최재우의 '간이역', 김현의 '겨울의 안쪽', 황경철의 '공포의 기록', 김영란의 '링거 속의 바다'였다.

'간이역'에서 최재우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노숙함으로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시골대합실", "소달구지", "보따리"와 같은 소재를 통해 드러나듯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정겹다. 그러나 그는 그리 길지 않은 시력의 한계 또한 노정시키고 있다. '간이역'에서의 돌연한 장면 전환이나, 그의 다른 시 '포구'에서 드러나는 이미지 분절 등은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김현의 '겨울의 안쪽'은 세밑에 꼬옥 끌어안고 싶은 시이다. 서사를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내는 능력은, 차고 낯설게 만연하는 시들과 차별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서사적일수록 정제된 호흡과 리듬감을 견지해야 하는 법, 몇 군데 군더더기가 눈에 띈다. 따뜻하지만 너무 잔잔한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황경철의 시들은 미숙하고 거칠지만 패기가 있다. 다만 추상적인 대상을 추상적으로 풀어내는 일이 그에게는 힘에 부친 듯하다. 자폐적으로 분산된 이미지들이 제어되지 못한 채 범람하고 있다. 시가 아물 수 있도록 그의 상처가 더 깊어지기를 바란다. 깊어진 상처가 그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김영란의 '링거 속의 바다'는 형식적인 면에서 가장 숙련된 솜씨를 보여준다. 그러나 자신의 색채가 부족하고 소품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약점도 갖고 있다. 더구나 그의 시들은 작품들간의 격차가 드러나서 기우를 갖게 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기는 어려웠다. 모쪼록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열어나갔으면 한다. 숙련된 자의 출발점은 지금 다시 놓여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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