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2012 신춘문예 당선작 본문

현대시모음

2012 신춘문예 당선작

연안 燕安 2012. 1. 7. 20:31

 

2012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구름사촌 / 조규남


내 발도 하늘을 문질러본 기억이 있다
나무이파리처럼 시원하게 흔들리며
하늘에 발자국을 찍어본 일이 있다
바람이 건들대며 쓰다듬고 지나가면
구름도 덩달아 내 발을 슬쩍 신어보고 도망가던 자국이 자꾸 간지럽다
운동장 놀이기구에 몸을 기대고 물구나무섰을 때
아무리 참으려 해도 거꾸로 몰린 피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쿵,
내려왔던 하늘이 되돌아가버리자
또 다시 땅을 딛고 온몸 받히며 살아가는 내 발
지금도 이파리가 되었던 짧은 시간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누워 뒹굴면서도 무심히 하늘을 더듬어보고 걸어 다닐 때도
발꿈치를 들어올리며 바람 느끼고 싶어 들썩인다

 

대낮에도 통로가 보이지 않아 눈물을 찔끔 훔치는 일도
최초의 천둥인 듯 크릉크릉 부르짖는 버릇도
내 속에 흐르는 구름의 피가 농간을 부리기 때문

 

발이 간지러운 가로수가 몸을 비튼다
아무리 걸어도 굳은살 한 점 박히지 않은
부드러운 초록 발,
수많은 발바닥 활짝 펴 하늘을 닦는다

 

죽어서도 나비처럼 팔랑팔랑 날아다니고 싶은 발

 

 

심사평

“발상의 신선함에 의견일치”

심사위원=이문재<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안도현<시인·우석대 교수>

예심에서 10명의 작품이 올라왔다. 응모자의 이름이 지워진 채 우편으로 보내온 본심 원고를 미리 읽고 심사위원 두 사람이 농민신문사에서 만났다. 예년에 비해 서정성은 강화되었으나 전반적으로 수준이 떨어진다는 의견을 똑같이 내놓았다. 그만큼 참신한 언어가 드물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당선작을 고르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당선작을 <구름사촌>으로 하자는 의견이 곧바로 일치하였다. 이 시는 먼저 발상의 신선함이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후반부로 가면서 인간의 시선을 나무라는 자연의 시선으로 확장시키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시라는 게 세상을 뒤집어 볼 줄 아는 힘을 내장한 양식이라면 이 시야말로 물구나무서서 세상 바라보기를 시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응모한 <옴마댁>의 ‘눈망울로 길의 태엽 감았다 풀기를 반복’한다는 빛나는 구절도 신인으로서의 신뢰를 주기에 충분했다.

 마지막까지 우리 손에 남은 <찔레차>는 ‘허기가 꽁무니까지 들어붙은 새들이 날아와 빨간 눈을 하나씩 몸에 달고 날아오른다’와 같은 감각적 표현이 일품이었지만 주제를 집약시키는 힘이 조금 부족해 보여 아쉬웠다. 또 다른 분의 작품 <깃털멧돼지>는 엉뚱하고 재미있는 발상을 끝까지 밀고 가지 못한 게 흠이었다. 사족 하나. 최종 심사 대상 작품의 표절 여부를 검증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했던 씁쓸함!

 

 

 

2012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흰꽃이 지다 / 오영애

흰꽃이 진다 한꺼번에 진다 비를 맞으며 서서 수십 톤씩 진다 무더기무더기 진다 바야흐로 진다 가슴이 하나 진다 통곡하듯 진다 둥둥 떠서 진다 꽃상여로 진다 절뚝절뚝 진다 맨땅위에 진다 색 없이 진다 화 없이 진다 자식 없이 진다 원수 없이 진다 수의(壽衣) 없이 진다 실로 꽃 곁에 가까이 울며 서 있는 장바구니 든 나도 진다

 

 

오롯한 말솜씨와 창조적 가락

시처럼 짜맞춘 시, 시로 보이기 위해 안달하는 시, 쓰는 사람 스스로도 재미 없을 그런 시를 읽는 일은 피곤하다. 해묵은 사회적 낭비. 기성 양복을 입은 듯한 말씨만 번잡스럽다. 이즈음 평균 취향이 그렇다며 넘기고 말기에는 씁쓸할 따름. 신춘문예 당선을 겨냥한 신인이라면 자기 목소리를 갖고자 고심한 흔적 정도는 보여야 하는 게 아닌가. 마지막까지 남은 세 편을 두고 뽑는 이는 그 점을 먼저 살폈다.

김혜경의 ‘진화론’은 변기에 앉는 삶에서 거미의 생태를 유추한 시다. 자신도 “발 대신 다리”가 “돋아날 듯” 쓰리다는 마무리까지 무리가 없다. 그러나 다른 거미 글감 시들과 나뉠 만한 확연한 울림은 얻지 못했다. 김혜강의 ‘비’는 제목 그대로 비에 대한 풍정시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엮은 직조술이 참신했다. 그럼에도 비를 빌린 땅과 하늘의 교감을 “옥황상제와 몸 섞는 소리”라 한 데서 평범에 머물고 말았다.

오영애의 ‘흰꽃이 지다’는 앞선 둘에 견주어 신춘문예용 시에서 멀다. 단형에다 담긴 속살 또한 막연하다. 감상적이기까지 하다. 짜임도 ‘ㄱ이 진다’는 월의 엮음과 되풀이로 한결같다. 그것을 받치는 몸말은 명사형에 갇혀 감각적 표현성을 지니지 못했다. 그럼에도 무엇보다 창조적이다. 자기 가락을 지녔다. 자신이 겪은 바를 자기 목소리로 뱉는 힘이 시인 되는 첫 조건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한다.

게다가 말솜씨까지 오롯하다. 이 시는 삶의 막연한 속살로 길게 이어진 앞과 “장바구니 든 나”를 내세운 짧고 구체적인 마무리 월, 두 매듭으로 짜였다. 그런데 둘 사이 단층이 지닌 뜻은 크다. 앞 매듭에 넘치는 감상이 삶의 깊이로 뒤바뀌는 놀라운 비약을 뒤 매듭이 마련한다. 한 여자가 겪은 아픈 간난을 단형의 가락으로 울림 크게 살려 낸 절창 ‘흰꽃이 지다’. 오 오 시인, 멀고 멀 창작의 길에서 독야청청 피고 피기를.

<심사위원 박태일·김언희>

 

 

201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저무는, 집 / 여성민


지붕의 새가 휘파람을 불고, 집이 저무네 저무는, 집에는 풍차를 기다리는 바람이 있고 집의 세 면을 기다리는 한 면이 있고 저물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있어서 저무는 것들이 저무네 저물기를 기다리는 시간엔 저물기를 기다리는 말이 있고 저물기를 기다리지 않는 말이 있고 저무는 것이 있고 저물지 못하는 것이 있어서 저물지 못하네 저물기를 기다리는 말이 저무는 집에 관하여 적네 적는 사이, 집이 저무네 저무는 말이 소리로 저물고 저물지 못하는 말이 문장으로 저무네 새는 저무는 지붕에 앉아 휘파람을 부네 휘파람이 어두워지네 이제 집 안에는 저무는 것들과 저무는 말이 있네 저물지 못하는 것들과 어두워진 휘파람이 있네 새는 저물지 않네 새는 저무는 것이 저물도록 휘파람을 불고 저무는 것과 저물지 않는 것 사이로 날아가네 달과 나무 사이로 날아가네 새는 항상 사이를 나네 달과 나무 사이 저무는 것과 저물지 않는 것의 사이 그 사이에 긴장이 있네 새는 단단한 부리로 그 사이를 찌르며 가네 나무가 달을 찌르며 서 있네 저무는 것들은 찌르지 못해 저무네 달은 나무에 찔려 저물고 꽃은 꿀벌에 찔려 저물고 노을은 산머리에 찔려 저무네 저무는, 집은 저무는 것들을 가두고 있어서 저무네 저물도록, 노래를 기다리던 후렴이 노래를 후려치고 저무는, 집에는 아직 당도한 문장과 이미 당도하지 않은 문장이 있네 다, 저무네

심사평

詩 자체가 하나의 사건을 이뤄


물리학에서는 수학적 사건이 있고, 생물학에서는 생명의 사건이 있고, 시에서는 말의 사건이 있다.

하나의 단어가 일일이 거론할 수 없는 전체를, 누구나 알 수 있는 단일한 사건으로 만들 때 그것은 시에 의해서고, 그것은 시인의 일이다. 말이 사건이 되지 못하는 시는 시가 아니다. 시에 있어서 말의 풍경은 하나의 사건이고, 그대로 지평이다. 예심을 거쳐 최종심에서 받은 스물세 분의 시는 오랜만에 우리 시의 지형 깊은 계곡으로 우리를 놀게 하고, 높은 산으로 우리를 이끌기도 하며 드넓은 바다에서 서 있게도 하는 행복한 경험을 느끼게 했다.

우리는 그 울렁거리는 느낌을 타고 세 분의 시를 골랐다. 일일이 짧은 감상을 달고 토론을 거쳐 힘들게 또는 아쉽게 손에서 터는 작업을 거쳐 남은 세 편의 작품을 두고, 우리는 잠시 부러 딴 이야기를 해야 할 정도였다.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딴 얘기를 하는 둥 마는 둥 다시 토론에 들어가 최호빈의 ‘고민의 탄생’, 김미영의 ‘상자’, 여성민의 ‘저무는 집’을 골랐다.


최호빈의 시는 시상을 치밀히 전개해 나가며 이미지를 구상화시키는 솜씨가 일단 돋보였다. 단어 하나의 선택에서 다년간 습작을 한 흔적이 분명히 드러났다. 김미영의 시는 우리 삶의 비루한 것들을 보듬어 소중한 꽃을 피워 내는, 애정이라고밖에는 설명되지 않는 따뜻함이 편편에서 맡아졌다.

아무리 시가 자기를 위한 자기에 의한 자기의 시라 할지라도 자기의 바깥을 보는 이런 시선은 이 즈음에는 꽤나 귀하게 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 향기는 더 짙었다.

그러나 최호빈의 시는 숲이 울창한 만큼 베어 낼 나무들이 꽤 있었다는 점에서, 김미영의 시는 아직 피상적이라는 점에서 제외되었다. 여성민의 시는 반복되는 말과 말로 공간을 이루고 거기에 막연과 아연의 풍경들을 자리하게 해, 시 자체가 하나의 사건을 이루고 있었다. 좋았다.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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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거미줄동네 / 박광희


뿌리 같은, 오래된 골목이 줄에 걸려 바동거린다
나지막한 지붕들이 이마를 맞댄 좁다른 풍경
TV안테나선, 전깃줄, 빨랫줄들이 하늘을 묶은
제각각의 각도를 가진 도형들로 골목은 늘 무겁다
낡은 시간을 매단 전봇대, 습한 담벼락에 숨어있던
표적들이 나타날 때마다 한 뼘씩 몸집이 커지는
외등들, 거미는 가만히 자신의 넓적다리를 숨긴 채
낮고 좁은 골목길을 얼기설기 엮어 낚아챈다
돌돌 말아 고치로 엮어내는 솜씨는 놀랍다
어쩌면, 이 골목 사람들은
한 번도 하늘을 본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아니, 줄의 포박을 알고도 모른 척하는 지도 모른다
부글부글, 그깟 몸부림 쯤
진작 진흙 바닥에 가라앉히면 그만인 것을
바람의 입질에 걸려든 젖은 골목들의 눈 속
허공이 공허할 수 없는 건 저 줄들이 만드는 유혹 탓
코르셋처럼 집들이 꽉 끼인 것은 줄의 팽팽한 긴장 탓
낡은 모서리처럼 표지가 뜯겨져 나가
내력조차 희미해진 이곳 사람들, 뻐꾸기시계처럼
때가 되면 문을 열고 뛰쳐나가 울음 울면 그뿐
참붕어 같은 골목은 언제 줄을 벗어날 수 있을까
나지막한 허공을 저인망 줄들이 집들을 묶고 있다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진다 젖은 도형들이
허우적거린다, 골목이 환하게 열린다
일제히 미끼를 무는 붕어들의 입질
흰 와이셔츠 폐타이어, 화분, 방수천막지를 물어뜯는다
장마전선의 북상에 바삐 방적돌기를 부풀리는 거미
걸려든 집집의 내력들이 꽈리처럼 부풀어 오른다
동맥경화증에 걸린 골목, 줄에 걸려 파닥거린다

심사평
삶의 고달픔과 어두움 반전시킨 후반부 감탄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 가운데 5편을 선정했다. 정정례의 `내력' 박명삼의 `빈센트 반 고흐의 귀' 김기순의 `미용실' 오영애의 `춘신 春信' 박광희의 `거미줄 동네'였다.

이 중 최종 세 편을 압축해 논의했다. `미용실에서'는 감각이 뛰어났고 일상적 삶을 노래한 것은 좋았으나 사유의 깊이가 미흡했다.

`춘신 春信'은 발상은 좋으나 주제의식이 명징하지 않았고 시적인 역동성이 약하여 평면성에 그치고 말았다. 박광희가 응모한 여섯편 모두의 수준이 고르고 특히 그중 단연 돋보인 작품은 `거미줄 동네'였다.

이 작품은 현실인식이 뛰어나고 상상력과 시를 구성해 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특히 이 시의 후반에서 보여준 “소나기가 쏟아진 다음 골목이 환하게 열리는”이라는 이미지 묘사는 시의 전반을 지배하는 삶의 고달픔과 어두움과 공허를 반전시킨 점이 이 시를 더욱 빛냈다. 매우 우수한 작품이었다.

이승훈 한양대명예교수, 이영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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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귀화(歸化), 혹은 흑두루미의 귀환(歸還) / 정영희


아무르 강 소인이 찍힌 항공우편이 도착했다
우표 네 귀마다 고드름이 박혀있는 흑갈색 편지에는
온난화 현상도 이곳에선 세계대백과사전에서나 읽어보는 호사라며
한낮에도 발가락을 날개 안쪽 깊이 파묻고 지낸다는 이야기였다

순천만에서 담근 농게 장을 벽돌 빵에 치즈대신
발라먹고 끼니를 때운다는 이야기며
새끼들로 인한 궁기窮氣때문에 늦은 저녁까지 시베리아 벌판에서
발품을 팔고 돌아온다는 행간에는 한숨이 진하게 배어났다

철새라고 부르는 비아냥 때문에 눈자위 진물이 마를 날이 없다는
대목에서는 먹빛 하늘을 갈기처럼 찢고 싶었다
허기로 눈밭에 시리도록 발자국을 남기는 일이 이젠 지쳐
순천만의 텃새로 귀화를 결심하고 있다는 추신에 이르러서는
철 이른 폭설이 자작나무 숲을 이루고 있었다

갯가 짱뚱어의 눈알이 봉분처럼 튀어나온 이유를 알겠다
망둥어는 왜가리 공습을 기어코 막겠다며 전망대까지 벌써 올라와 있었고
칠게들은 뻘 구멍 속에 흑두루미의 식량을 비축하느라
열 발톱이 문드러질 정도였다

흑두루미의 귀환 아닌 귀화를 위해 탄탄한 움집이라도 예비해야 한다며
풍속을 온몸으로 가늠하고 있는 갈대의 심지도 깊었다
너울은 먼 바다에서 싱싱한 먹잇감을 데리고 오느라
하루에도 몇 번씩 지그재그로 물길을 오르내렸다

냉기가 옷깃을 쓸며가자 사람들이 탐조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깃털 스쳐가듯 달이 구름을 밀어 올리자
쿠르르, 쿠르르, 카아오, 카아오!
회색 부리를 비틀며 북쪽 하늘에 까만 점들이 펄럭거렸다
이백 스물여덟마리 대가족의 귀환 아닌, 귀화였다

심사평

“철학적인 시세계 한폭의 그림 같아”
예심을 거쳐 올라온 시를 읽었다. 문단에서 시 분야가 침체되어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듯 출품작의 수에 비해 시의 수준이 높지 않았다. 실험정신이 살아 있는 시도, 삶을 치열하게 노래한 시도 드물었다. 이슈가 될 만한 시의 흐름도 눈에 띄지 않았고 전반적으로 시의 완성도도 낮았다. 세상을 들었다 놓을 절창을 만나고 싶은 기대를 안타깝게 접을 수밖에 없었다.

정도전의 ‘귀화(歸化), 혹은 흑두루미의 귀환(歸還)’과 권시은의 ‘프리다 칼로가 익어가는 팔월’을 놓고 고심한 끝에 정도전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권시은의 작품들이 완성도는 더 높았으나, 정도전의 시가 보여준 세계를 바라보는 깊이와 ‘철 이른 폭설이 자작나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와 같은 수일한 이미지에 표를 던졌다. 정도전의 시는 다소 설명적 이여서, 행간에 이미지의 증폭이 없어 시의 맛이 반감되고 있다는 단점도 지적되었음을 밝힌다.

위의 두 명의 시 외에 선자들의 관심을 끓었던 작품에는,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황재운의 ‘운주사’와 치밀한 묘사가 돋보인 천선필의 ‘자화상’이 있었다.

당선자도 낙선자도 모두 분기하여 우리 문학사를 빛낼 시인이 되길 바란다.
*곽재구
광주 출생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가 당선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했고 신동엽 창작기금과 동서 문학상 등을 수상 ▲ 시집 ‘사평역에서’ ‘전장포 아리랑’ ‘서울 세노야’ ‘참 맑은 물살’, 동화집 ‘아기 참새 찌꾸’ 등

*함민복
▲충북 중원군 출생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졸업 ▲1988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제6회 윤동주문학대상 수상 ▲시집 ‘자본주의의 약속’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말랑말랑한 힘’등을 냈고, 시에세이 ‘절하고 싶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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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철새를 만나다 / 홍철기


문득
뭇별들의 제자리걸음이
그렁그렁한 눈물을 머금게 하는

안개 속 방파제는
육지로 난 길 인양
어서 나아가 보라며
건너가 보라며 나를 부르는데
엉겨 붙어 나를 말리는
바람
그래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울먹일 때
빈 껍질만 남아 뒹구는 희망
피난민처럼 몰려왔다

이젠 떠나고 싶은데
갈 곳이 없는지 멍자국 같은 사연
하나 둘 모여 불을 밝히고
마을을 이루고 그래서 한세상
어우러진 잡풀처럼 흔들릴 때
알고 있었다 저마다 소금에 저린
마음 한 다발씩 묶어 쌓아두고 있음을

맨 정신엔 타오르지도 못했던
마음 불쏘시개 삼아
한 잔 두 잔 마신 술에
취하기는 바다가 취하고 끝내
바락바락 악을 쓰며 달려들다 고꾸라지며
살 아 야 하 나
이어지지 못하고 부서져 되돌아가 버리는 말
담뱃재 떨듯 매일같이 칭얼대는
희망쯤이야 쉬이 떨어내면 그만이라고
말보다 먼저 떠난 파도가
다한 힘으로 와 쓰러질 때.

저기 저 봉두난발한 바닷바람
사이 위태위태하게 날아가는
철새
한 마리



심사평

시는 궁극적으로 삶 혹은 체험의 기록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시는 언어 예술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작품을 선정함에 있어 언어예술성을 담지한 체험의 진솔성이 기본항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격을 갖춘 작품들 중에서 최종적으로 낙점을 받기 위해서는 다른 작품에 비해 감동의 진폭이 남달라야 한다.

곡진한 정서가 튼실한 시적 형상화를 이루고 있어 선자의 손에 최종까지 남은 분들은 홍철기 ‘철새를 만나다’, 김은실 ‘겨울, 민원을 내다’, 임복금 ‘갈대숲에서’, 노원숙 ‘소라보 당신’, 이근영 ‘고추말리기’였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들은 모두 생의 갈피에서 길어 올린 투명하고 절절한 정서를 언어미학적으로 훌륭하게 형상화 하였다. 그러나 김은실과 임복금의 작품은 몇몇 군데에서 노출되는 불투명한 표현 때문에, 노원숙과 이근영의 작품은 안이하고 상식적인 표현 때문에 시적 긴장감이 이완되고 있다.

홍철기는 같이 응모한 ‘금일도’의 작품도 미학적 완성도가 뛰어났다. 특히 철새를 통해 인생의 한 단면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한 ‘철새를 만나다’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선명한 묘사력, 구조적 안정감과 더불어 유려한 리듬감을 확보한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그리하여 ‘철새를 만나다’를 당선작으로 선정한다. 훌륭한 시인이 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 양병호(시인, 전북대 인문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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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경인일보 당선작


우물이 있던 자리 / 이승혁


잠 못 이루는 잔별들이 풍덩 깊은 우물 속으로 빠져 드는 밤

할미의 쇠잔한 잔기침을 받아내는 밤안개가

처마 끝에서 너울지며 유영하고 있었지

빨랫줄에 걸린 물때의 온기가 자정을 적실 때면

어린 나의 입속으로 곶감 같은 어미의 숨결이

아득하게 쏟아졌었지

위태로운 유년을 닮은 초승달이

내 여린 이마를 가만히 보듬고 가곤했지

바다의 능선을 타고 돌아오던 메아리가

어린 치어들을 깨워놓고 산 그림자 속으로 흘러가던 날

두레박을 혼자 끌어올리자

변성기의 새벽들이 사춘기처럼 찾아왔지

할머니, 내 울대의 잔별들이 사라졌는지

우물에선 맑은 목소리가 올라오지 않아요

누군가 머릿속에 방생한 악몽들만 짜디짠 입가를 헤엄치고 있어요

줄이 끊어진 두레박을 기울여야 또 다른 힘을 얻던 유년이 꿈들도

더는 담겨지지 않아요

얘야, 네 어미의 바다는 새벽시장의 마른 비늘들 궤짝의 틈이란다

횟 속 깊이 박힌 몇 개의 미늘과 목젖을 열 때마다

아아…말이 되지 못하는 실어증의 힘으로만 너를 낳았단다

그렇게 할머니의 유언이 몇 줌 두레박 속의 전설로 담겨지는 사이

어머니의 바다 더 깊은 궤짝들 틈으로 실종되었고

지금은 어떠한 우물거림으로도 씹히지 않는 먼먼 날들의 그 바다

저물녘

늦가을의 핸들을 구부리며 깃드는 신문리 451번지*의 안마당 고요가

방금 전 그 파도에게라도 들켰는지

아주 오랜 옛날의 漁信처럼 기억의 지느러미 하나로 획 사라지고

있었다


*강화읍의 마을주소



-1993년 인천 강화 출생
-강화고등학교 졸업 예정
-만해축전 시부문 장원
-현대시문학 청소년 문학상 금상

심사평

"유년기 시적 감수성 한 데 묶어… 현실·꿈 오가는 상상력 돋보여"


본선에 올라온 35편의 작품들은 시적 완성도에서 일정 수준에 이른 것은 분명하지만, 전반적으로 관념의 덩어리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결함을 지니고 있다. 파편적 이미지 다발의 연쇄로 서술의 골격이 약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추상성과 관념성이 구체적 시적 진술로 체화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다. 엘리어트의 말대로 시는 이해되기 전에 전달돼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소통과 통섭이 이 시대의 가치론적 코드인 만큼 수용미학적 차원에서 시적 소통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할 일이다.

심사위원들은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난 세 편의 작품에 주목했다. 먼저 최영랑의 '고동의 길'은 고동의 길에서 인생의 굴곡을 반추하여 삶의 본질을 천착하는 형이상학적 주제를 실현한 작품이다. 관념적 주제를 구체적 형상과 비유를 통하여 설득력있게 풀어가고 있다. 하지만 형상화의 초점이 다소 산만하게 흐트러져 시적 텐션이 조밀하게 형성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다. 허영술의 '치즈의 눈물'은 원룸촌의 고달픈 삶과 슬픔의 내부를 의식의 소도구들을 동원하여 정치하게 포착하고 있다. 하지만 다소 정제되지 않은 이미지의 충돌로 진술의 정체성이 모호해지는 결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승혁의 '우물이 있던 자리'는 시적 감수성의 통합에 성공한 작품이다. 유년기의 잡다한 체험과 소재, 의식들을 하나의 감수성으로 통합하여 내적 질서를 창조해 내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 시적 구조의 근간을 이루는 유년기와 성년기의 상상체계에 '잔별, 초승달, 두레박, 바다' 등의 은유기제를 덧입힘으로써 감수성의 통합에 성공하고 있다. 유년기의 기억을 인상의 연쇄로 묶어내어 튼튼한 회상구조의 내적 통로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내적 통로는 시적 화자의 내밀한 언술로 착색되어 설화적 상상력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다양한 의식과 체험들을 개성적 감성으로 흡인하여, 현상과 환몽의 의식세계를 넘나드는 환유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아울러 이미지 다발의 유기적 짜임으로 의미생성을 이루는 생산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시적 성취를 고려하여 '우물이 있던 자리'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노숙 / 이영종

열차와 멧돼지가 우연히 부딪쳐 죽을 일은 흔치 않으므로

호남선 개태사역 부근에서 멧돼지 한 마리가

열차에 뛰어들었다는 기사를 나는 믿기로 했다

오늘밤 내가 떨지 않기 위해 덮을 일간지 몇 장도

실은 숲에 사는 나무를 얇게 저며 만든 것

활자처럼 빽빽하게 개체수를 늘려온 멧돼지를 탓할 수는 없다

동면에 들어간 나무뿌리를 주둥이로 캐다가

홀쭉해지는 새끼들의 아랫배를 혀로 핥다가

밤 열차를 타면 도토리 몇 자루

등에 지고 올 수 있으리라 멧돼지는 믿었던 것이다

사고가 난 지점은 옛날에 간이역이 서 있던 자리

화물칸이라도 얻어 타려고 했을까

멧돼지는 오랫동안 예민한 후각으로 역무원의 깃발 냄새를 맡아왔던 것일까

역무원의 깃발이 사라진 최초의 지점에

고속철도가 놓였을 것이고 밝은 귀 환해지도록 기적소리 들으며

멧돼지는 침목에 몸 비벼 승차 지점을 표시해 두었으리라

콧김으로 눈발 헤쳐 숲길을 철길까지 끌고 오느라

다리는 더욱 굵고 짧아졌으리라

등에 태우고 개울을 건네줄 새끼도 없고

돌아갈 숲도 없는 나는 오랜만에 새 신문지를 바꿔 덮으며

그때 그 역 근방에서 떼를 지어 서성거렸다는

멧돼지 십여 마리의 발소리를 믿기로 했다

 

 

이영종

1961년 정읍 출생

우석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재

호남제일고 교사

 

"따뜻한 서정과 맑은 연민 보여주고 있어"

송하선(시인) 문태준(시인)

심사는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심사위원들은 한 편의 시가 유기적 구조를 갖추고 있는지를 우선적으로 보았다. 작품의 처음과 끝이 조직화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난해한 시를 배제하지는 않았다. 난해한 시는 명상과 사색에서 탄생한 것으로서 유심하게 들여다보면 해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들이 곤란하다고 본 시는 비록 그것의 파편적 언어와 기발한 상상력이 부분적으로 절창을 낳더라도 맥락의 구조화가 되어 있지 않은 경우였다. 시행의 전개가 연상에 의해 진행되더라도 산만하고 까다롭기만 한 경우는 제외시켰다.

고현도의 '까치의 독후감' 외 2편은 안정되고 사려 깊은 시편들이었다.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장점이 돋보였고, 오래 다듬은 흔적도 역력했다. 그러나 정아(正雅)하기만 할 뿐 새롭고 기발한 해석이 부족했다. 규정하고 설명하는 진술이 많은 것도 시의 맛을 떨어지게 했다.

반면에 임해야의 '독도' 외 4편은 전체적으로 보아서 사고가 기발하고 분명했다. 그런데 이 기발하고 분명함의 수준이 투고한 작품들 사이에서 편차가 컸다. '독도'나 '쿼드러츠學' 같은 작품들은 상상력이 뛰어났으나 그 착상 자체는 진부하고 평범했다. 그래서 연상이 과잉되게 사용되고 있는 느낌을 갖게 했다. 시적 질문이 보다 더 독특하고 다양한 곳에서 생겨났으면 좋을 듯하다. 당선작과 마지막까지 경합한 작품들이었음을 밝혀둔다. 분발을 당부한다.

도율의 '노숙' 외 3편은 진지한 작품들이었다. 순정이 있는 따뜻한 서정을 보여주었다. 옹동이라는 곳의 맵고도 신 삶의 풍경을 보여준 '항아리'도 좋았으나 심사위원들은 '노숙'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우화적 요소가 가미되었으나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맑은 연민에 이르고 있다는 점도 이 시의 장점이었다. 시단에 좀 늦게 나오는 만큼 정신을 곤두세워 부지런히 좋은 작품을 쓰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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