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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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연안 燕安 2011. 9. 28. 09:34

가을 바람

 

이 해 인

 

 

숲과 바다를 흔들다가

이제는 내 안에 들어와

나를 깨우는 바람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를 키워놓고

햇빛과 손잡은

눈부신 바람이 있어

가을을 사네

 

바람이 싣고 오는

쓸쓸함으로

나를 길들이면

가까운 이들과의

눈물겨운 이별도

견뎌낼 수 있으리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사랑과 기도의

아름다운 말

향기로운 모든 말

깊이 접어두고

침묵으로 침묵으로

나를 내려가게 하는

가을 바람이여

 

하늘 길에 떠가는

한 조각구름처럼

아무 매인 곳 없이

내가 님을 뵈옵도록

끝까지

나를 밀어내는

바람이 있어

 

나는

홀로 가도

외롭지 않네

 

 

가을 노래

 

   저자(시인) : 이해인

 

 

하늘은 높아 가고

마음은 깊어 가네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를 키워 행복한

나무여, 바람이여,

 

슬프지 않아도

안으로 고여 오는 눈물은

그리움 때문인가

 

가을이 오면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멀리 있는 친구가 보고 싶고

죄 없이 눈이 맑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고 싶네

 

친구여,

너와 나의 사이에도

말보다는 소리 없이

강이 흐르네

 

이제는 우리

더욱 고독해져야겠구나

남은 시간 아껴 쓰며

언젠가 떠날 채비를

서서히 해야겠구나

 

잎이 질 때마다

한 움큼의 시(詩)들을 쏟아 내는

나무여, 바람이여

 

영원을 향한 그리움이

어느새 감기 기운처럼 스며드는 가을

 

하늘은 높아 가고

기도는 깊어 가네

 

 

 

가을 저녁의 시

 

· 저자(시인) : 김춘수

 

 

누가 죽어가나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세상 외롬 속에서

물 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 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가을 아침에

 

· 저자(시인) : 김소월

 

 

어둑한 퍼스렷한 하늘 아래서

회색(灰色)의 지붕들은 번쩍거리며,

성깃한 섭나무의 드문 수풀을

바람은 오다가다 울며 만날 때,

보일락말락하는 멧골에서는

안개가 어스러히 흘러 쌓여라.

 

아아 이는 찬비 온 새벽이러라.

냇물도 잎새 아래 얼어붙누나.

눈물에 쌓여 오는 모든 기억(記憶)은

피흘린 상처(傷處)조차 아직 새로운

가주난 아기같이 울며 서두는

내 영(靈)을 에워싸고 속살거려라.

 

그대의 가슴속이 가볍던 날

그리운 그 한때는 언제였었노!

아아 어루만지는 고운 그 소리

쓰라린 가슴에서 속살거리는,

미움도 부끄럼도 잊은 소리에,

끝없이 하염없이 나는 울어라.

 

 

 

가을 저녁에

 

          김소월

 

 

물은 희고 길구나, 하늘보다도.

구름은 붉구나, 해보다도.

서럽다, 높아 가는 긴 들 끝에

나는 떠돌며 울며 생각한다, 그대를.

 

그늘 깊이 오르는 발 앞으로

끝없이 나아가는 길은 앞으로.

키 높은 나무 아래로, 물 마을은

성긋한 가지가지 새로 떠오른다.

 

그 누가 온다고 한 언약(言約)도 없건마는!

기다려 볼 사람도 없건마는!

나는 오히려 못 물가를 싸고 떠돈다.

그 못물로는 놀이 잦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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