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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산책로

해체시(解體詩)에 대해/ 임보

연안 燕安 2017. 7. 20. 10:47

해체시(解體詩)에 대해/ 임보

 

어느 시대거나 모든 분야에 있어서 전통적인 것을 소중히 여기고 이를 계승하고자 하는

온건한 경향이 있는 반면 이와는 달리 낡은 것보다는 새로운 것을 지향하고자 하는 진취적인

경향이 공존합니다. 전자를 보수파 후자를 개혁 내지는 혁신파라고 부릅니다.


역사는 상반된 대립들이 빚어낸 결과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변증법의 이론이기도 합니다. 시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평시조에 대한 사설시조, 시조에 대한 신체시, 신체시에 대한 자유시 등의 대립들을 통해

현대시로 발전해 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1930년대에 이르게 되면 이상(李箱)

의해 소위 과격한 모더니즘의 혁신적인 실험시가 나타납니다.


이상(李箱) 이러한 실험적인 시풍(詩風) 한때 잠잠하다가 1980년대에 다시 기승을 부리며

일어납니다. 이것이 이른바 해체시(解體詩)라는 것입니다.
젊은 시인들에 의해 시도된 있는 해체적 경향은 이제 포스트모던이즘이라는 새로운

서구적 풍조의 그늘 밑에 서식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시단에서 시도된 해체적 경향을 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장르의 경계를 무너뜨림

시를 산문화(散文化)한다든지, 시에 희곡이나 시나리오 기법을 도입하기도 하고, 속에 회화나

도형을 삽입하기도 합니다.

 

둘째, 표현 매체의 개방

시는 언어 예술이지만 표현 매체를 언어만으로 한정하지 않고 그림, 사진, 도형, 기호 등을

동원하여 표현하기도 합니다.

 

셋째, 기존의 규범 문법에 구속되지 않음

사회적인 약속인 기존 문법에 구애되지 않고 비문(非文)이나 논리적 타당성이 없는 문장을

구사하기도 합니다.

 

넷째, 시적 주체의 소멸

독특한 개인의 생각이나 감정이 담긴 개성적인 글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글들을

여기저기서 무작위로 끌어다 자신의 글처럼 쓴다든지[pastiche], 광고나 기사(記事), 사진 같은

것들을 오려 붙인다든지[collage] 하는 행위입니다.

 

다섯째, 탈이념(脫理念) 현상

어떤 주의(主義) 사상(思想) 예속되지 않고 자유를 추구합니다. 나아가서는 도덕과 윤리의

속박으로부터도 벗어나고자 합니다.

 

여섯째, 예술의 저속화[kitsch] 현상

일상의 저속한 것들 속에서 소재를 구한다든지, 속어나 욕설 등의 비어(卑語)들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으로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특징으로도 지적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해체시의 특징들을 마디로 요약하면 기존의 것들 전통적인 것들에 대한 거부라고

있습니다. 이러한 해체 사상이 80년대에 유행하게 것은 당시 인기를 얻고 있었던

프랑스의 사상가 데리다(J. Derrida) 영향 때문으로 보입니다.


데리다의 해체 이론은 기존의 것을 바꾸어 놓아야 하는가 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데리다의 사상을 마디로 요약하면불확정성(不確定性)’이라고 있습니다.


그는 현존(現存presence) 특성을 ‘differance(差延)’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differance differ(差別) defer(延期) 합성어라고 합니다.
전자는 현존의 공간적 특성을 지적한 말이고 후자는 현존의 시간적 특성을 지적한 말입니다.

 
어떤 사물의 공간적 존재 양태는 다양합니다.
하나의 사물은 그것을 바라다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서 천태만상의 다른 모습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물의 양태를 하나로 확정지어 설명할 없습니다.
또한 사물의 시간적 존재 양태는 끊임없이 변해 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속 변해 갑니다.


이것이다하고 붙드는 순간 이미 그것은 과거 속의 낡은 모습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현존의 상태는 과거와 미래의 사이에 관념적으로만 존재할 , 끝없이

연기된다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은 확정적으로 단정할 없다는 것이 불확정성의 이론입니다.


그런데 서구의 합리주의는 사물을 우열의 관계로 잘못 확정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성>감성, 남성>여성, 백인>유색인, 기독교>다른 종교 등으로 앞의 것을

우월한 것으로 확정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의 우열의 관계는 바른손과 왼손의 관계처럼 기회가 많이 주어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결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자리를 뒤바꾸어 후자에게도 기회를 주자는 것입니다.
기존의 제도, 전통, 관습 이러한 모든 것들이 잘못 굳어져 있으니 이를 해체(deconstruction)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해체는 결코 파괴(destruction) 아니라고 합니다.
데리다의 이론은 얼핏 보면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해체이론에는 가지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 현존의 차연적(differance) 특성 때문에 확정지을 없다는 전재에는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사물의 영구불변한 진상(眞相) 확정지을 없다는 것은 수긍하지 않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론이 차연적 상황에 대한 진술의 가치를 부정한다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사물의 일면만을 담고 있는 정물화도 의미가 있는 작업이고, 인물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전기문도 가치가 있는 기록입니다.

둘째, 기존의 모든 것들이 잘못된 구조라고 확정짓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잘못된 전통이나 편파적인 관습 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사회가 향유하고 있는 문화는 수천 동안의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그렇게 형성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전통으로 자리 잡게 것들은 비교적 최선의 것들이라고 있습니다.
잘못된 것들보다는 바람직한 것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됩니다.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태도는 무척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기존의 것보다 가치 있는 것으로 검증될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그것은 개혁의 대열에 끼지 못하고 개악과 파괴로 규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해체시가 시도하고 있는 것들은 어떠한가 냉정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전통적인 시의 인습을 무너뜨리는 바람직한 혁신들인가. 아니면 기존의 것을 뒤집어 놓겠다는

데리다적인 단순한 거부의 발상인가를 신중히 검토해 보아야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실험적인 시도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 불리어지려면 언어를 떠나서는 되고 또한 예술의 반열에 놓이려면

아름다움을 잃지 말아야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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