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래’와 같은 시에서 릴케가 상상력에 의한 현실 변용을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주관적인 판타지-요즘 식으로 말하여 현실을 편리하게 넘어 가는 기발한 문화 콘텐츠를 옹호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의 시의 메시지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사실의 세계에 충실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착잡한 의미를 변증법적으로 승화하는 방법으로서 상상적 변용을 말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이라거나 일시적이라기보다는 전체 문명의 성취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 문명 속에서 상상력은 객관성을 얻었다. 여기의 객관성은 과학적인 의미에서의 객관성과는 거리가 있는 객관성이다. 이것은 시와 과학의 차이를 참으로 깊은 의미에서 암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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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서구 문학인에게 희랍은 인간성의 완전한 미적 표현을 이룩한 문명의 원형으로 간주되는 것으로 보인다. (<18. 19. 20 세기에 있어서 희랍의 독일 지배>라는 저서의 제목 자체만 보아도 이것을 짐작할 수 있다.) 릴케도 이러한 지배에 순응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여튼 그는 다면적 인간성이 갖는 명암-비극적인 명암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심미적 표현을 통하여 펼쳐지고 순화되고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세계의 모든 것이 인간의 내면에 새로 태어나게 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존재론적 사명이라고 할 때, 그가 의미한 것은 이러한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문명의 심미적 노력이 깨어진 것이 20세기였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엄격한 사실 표현을 예술의 기본 기율로 생각한 그의 문명의 이상이 무엇인가를 직접적으로 설파한 시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의 사실적인 시-그러면서 그 자체로 미적 정형화를 이룬 시의 기저에 그 이상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문명의 이상은 다시 말하건대, 주어진 현실을 형상적으로 또는 심미적으로 고양된 세계에서 현실화된다.
그렇다면 이 고양은 무엇을 통하여 가능한가? 그것을 매개하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형상이다. 그러나 이 형상은 단순히 사람의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그 나름의 인식론적 기반을 가지고 있고, 그 인식론적 관심은 세계의 사실적 원리 그리고 존재론적 변증법에 연결되고자 하는 노력의 일부이다. 1924년 작고 2년 전에 쓴 한 시는 존재론적 근본에 이르고자 하는 인식론적 시도의 성격을 간단하게 요약해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새가 통과하여 날아가는 공간은 그대에게 그 모습 뚜렷한, 믿고 있는 공간이 아니다. (저 열린 공간에서 그대는 부정되고 돌아올 길이 없이 스러지고 말리니.)
공간은 우리에게서 뻗어 사물로 건너간다. 나무의 있음을 확실히 하도록, 그를 둘러 그대 안 본유의 공간에서 내면 공간을 던지라. 나무를 경계로 두르라. 나무는 스스로에 금을 긋지 않으니. 그대의 체념의 조형(造形)에서 비로소 사실로 있는 나무가 되리니.
이 시의 아래에 놓여 있는 것은 거의 철학 논의의 대상이 되는 공간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철학적으로 공간을 문제 삼을 때, 그것은 사물에 들어 있는 속성인가, 단순히 사물들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가, 또는 그 모든 것에 선행하는 어떤 실체 또는 사물 인식의 형식인가 하는 것이 문제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서, 또 하나 철학의 관점에서 주의할 수 있는 것은 공간이 사물의 관계-칸트가 정의한 바에 따라, 사물에 선행하는 직관 형식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인식의 주관을 상정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그 주관은 개인의 자의적인 주관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릴케의 시에는, 그가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이러한 철학적으로 문제 삼을 수 있는 생각들이 들어 있다. 그는 새들이 날고 있는 공간은 완전히 열려 있는 공간이라고 한다. 그것은 공간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비어있음이고 자연이다. 그렇다는 것은 새가 인간처럼 공간이나 공간의 사물을 인식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거주하고 있는 공간은 공간으로, 그 모습을 가진 것으로 인식되는 공간이다. 그러한 공간은 주관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것이다. 주관이 공간을 의식한다는 것은 주관을 가진 주체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 공간에 존재하면서도 사람은 하늘을 나는 새처럼 공간에 일부가 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고 그 안으로 스며들어 버리는 것도 아니다.
공간은 사람에게서 나와 사물로 간다. 그것은 사람의 의식에 내재하는 직관의 형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이 있음으로 하여 사물은 객관적으로 인식된다. 나무의 모양 또는 그 존재를 뚜렷하게 인식한다는 것은 그것을 공간 속에 있는 물체로 파악한다는 것을 말한다. 나무를 규정하기 위하여서는 내면 공간으로 나무를 둘러싸야 한다.
그런데 내면 공간 개입은 여기에서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그것이 사람의 마음에서 의미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인의 사명은 사실 이러한 의미를 여러 사물에서 발견하는 일이다.
시에 나무가 나온다면, 그것은 식물학의 지식에 공헌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인의 삶 그리고 독자의 체험에 뜻 깊은 것이어야 한다. 시인은 사실 세계를 과학으로서가 아니라 체험으로서 내면화하려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하여 시인의 세계 인식이 자의적인 의미를 사물에다 부여하는 것일 수는 없다.
시인은 객관성이 없는 판타지, 우의(寓意)나 교훈을 사물에 덮어씌우는 사람이 아니다. 시인이 나무 인식, 사물 인식을 위하여 그것을 공간에-내면 공간에 놓아야 한다면, 그 공간은 주관적 감정 또는 감성의 공간으로서의 내면 공간이 아니라 보다 본래적인 공간-간단히 내면적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본유의 공간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칸트는 공간은 인간의 관점이 있음으로서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면 공간은 불가피하게 주관적인 요소-감정과 선입견과 오류를 수반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시인은 이러한 요소를 무시하지 않음으로써 시적인 감동을 주는 시를 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스러운 것일 수는 없다. 그리하여 시인은 자기의 내면을 사물에 투사하면서 동시에 ‘체념’ 또는 극기의 수련을 하여야 한다. 그러한 자기 기율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나무나 다른 사물을 제 모습으로 그려낼 수 있다.
다만, 되풀이 하건대, 이러한 주관적 편향을 포기한 객관적 인식이, 적어도 시의 관점에서는 과학적인 인식과 일치하는 것일 수는 없다. 그것은 시를 버리는 것이 될 것이다. 시인에 있어서의 내면과 외면의 일치는 깊은 의미에서-감정을 포함하여 전인적인 감동을 포함하는 의미에서의 인간과 사물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이 일치에는 말할 것도 없이 피상적인 자아를 버리는 일이 필요하다.
릴케는 새의 노래를 듣고 사람이 그에 직접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사람의 심성의 깊이와 새로 하여금 노래하게 하는 새의 본능 사이에 어떤 통로가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한 일이 있다. 이에 비슷하게 내면과 외면의 일치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높은 정신적인 차원에서의 인간의 본성과 세계의 진리의 일치만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둘 사이에는 존재론적인 바탕이 존재한다. 거기로부터 시적인 의미의 내면 공간, 사물의 직관 형식으로서의 내면 공간, 그리고 그것을 초월하는-어쩌면 새가 날아가는 공간을 포함하는 존재의 지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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