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인식의 혁명 본문
인식의 혁명
문 덕 수(시인, 예술원회원)
1.
거의 1세기가 지난 한국시는 현재 한계의 벽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벽의 정체는 시인마다 달리 보일지 모르나, 지각 있는 시인이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쉽사리 극복하기 어려울 것 같다.
나는 언젠가 “ 시는 언어 예술이면서 언어를 넘어 선다”고 말한 바 있다. 언어를 넘어 선다는 뜻은 지각 레벨에서의 사물의 인식 문제이다. 사물에 대한 지각(知覺)은 복잡한 문제를 내포한다. 유럽의 근대적 자아의 표징으로 간주할 수 있는 단일시점(單一視點)은 예술을 오랫동안 지배해 왔다. 그 뒤를 이어 단일 시점이냐, ‘복수로서의 나’를 공관화하는 다시점(多時點)이냐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다시점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에게서 시도되었고, 이 시도는 다시점 자체가 원근법을 뒷받침해 온 초월적인 단일시점의 붕괴를 가져왔다.
테이블 위의 ‘술병’은 누구에게나 ‘술병’으로 보인다. (먼 거리를 두고 보면 달리 보일 수도 있겠지만) 여기까지는 같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그 앞의 세계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보인다. 아마도 알코올 중독증과 투병하고 있는 사람에겐 ‘악마’로 보일 수도 있고, 그러한 중독증과 관계없는 사람에게는 ‘감로(甘露)’로 보일지도 모른다. 창문을 ‘창문’으로 보고, 꽃을 ‘꽃’으로 보고, 소나무를 ‘소나무’로 보아야 할 텐데, 그렇지 않고 주관적인 생각(선입관)이나 자의적 분별(分別)로 인해서 미혹의 세계 즉 ‘언어의 세계’에 빠진다.
보는 사람의 위치, 조명(照明)의 가감이나 장애물의 유무 등도 큰 영향을 미친다. 보는 사람의 위치가 산정(山頂)이거나 지하철역, 그리고 햇빛이나 기상의 조건 등에 따라 사물이 달리 보인다. 원추(圓錐)나 입방체 같은 3차원의 입체도, 바로 밑이나 바로 위에서 보면 2차원 평면으로 보인다. 동일한 대상의 현상이 이같이 달라지는 것을 ‘퍼스펙티브 현상’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러한 퍼스펙티브 현상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각설하고, 본론에 직접 관련되는 사례를 하나 들어 보자. 창문을 열고 도시의 바깥 풍경을 바라보자. 전신주와 전선 위의 비둘기, 주택가 지붕의 연연(連延), 고층 아파트의 입립, 올막졸막한 높고 낮은 빌딩들, TV안테나와 그 너머의 산들, 산 위의 구름과 하늘 이런 바깥 도시의 풍경은 언어의 성질상 선조적으로 열거되겠지만, 사실은 우리의 시계에 한꺼번에 들어온다. 일망무제라고나 할까, 우리 망막에 한 순간 동시다발적 현상으로 비치는 것이다. 우리의 조그마한 시각에 이같이 광대하고 방대한 사상들의 양이 한꺼번에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우선 이러한 지각현상 또는 인지(認知) 시스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마치 수많은 특수한 컴퓨터들이 동시에 작동하는 것처럼, 이러한 동시다발현상의 지각은 인간의 신경회로망의 성질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신경)회로망 모형에 따르면 인지는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 병행처리과정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모든 마디들이 각자가 하는 일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점이다. 신경회로망 모형을 병행분산처리 모형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앞에 예시한 창밖의 도시풍경의 순간적 동시다발적 지각은 이러한 인지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앞으로 우리 시에 있어서의 인식의 변화를 가져올 결정적 조건들이 이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창문 밖의 도시풍경의 지각은, 인간의 신경회로망(neural network)이 동시적이며 다발적인 시스템임을 보여준다. ‘동시적’이라 함은 계열적, 순차적, 선조적이 아님을 말한다. 심적현상이 형식적 시스템이거나 구문론적 법칙을 가지고 있다면, ‘주어+서술어+목적어’와 같은 성분의 선조적, 시간적 연결구조로 지각 될 수밖에 없지만, 동시다발적 지각에서는 계열적 인식이 불가능하다. 또 ‘다발적’이라 함은 사물들이 분산되어 동시적으로 한꺼번에 그 지각이 이루어짐을 말한다. 흔히 신경회로망의 인지할동이 ‘병렬분산처리’를 한다고 하는 것도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한 대상이나 유니트가 앞뒤의 차례대로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병렬적으로 일어나며, 지각기능을 가지는 인간의 뇌도 이와 같은 구조라는 것이다.
지각(신경회로망)의 동시다발성 병렬 분산처리 모형은 사물의 지각적 인식은 물론이요, 나아가 시쓰기나 작품의 구성방법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우리는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창밖의 도시 풍경에 대하여, 그 중 어떤 대상 하나(아파트면 ‘아파트’ 비둘기면 ‘비둘기’ 소나무면 ‘소나무’ 식으로)만을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이미지화 하고, 집중적으로 표현하는 관습을 지니고 있다. 편협하고 국부적이다. 지각의 전체를 이같이 분할할 것이 아니라, 각각의 유니트들을 살리면서 전체를 집합적으로 조직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주제의 복수화보다 단일화, 형식의 다중구조보다는 단순화를 지향한 지금까지의 시쓰기의 관행을 부숴버릴 수는 없을까.
2.
그러면 한국시가 구문론적 요새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어떤 몸부림을 쳤던가 보기로 하자. 먼저 이상(李箱)의 시를 보자. 이상의 작품은 언어의 한계에 직면한 난파선의 비극상을 보여준다. “1+3/3+1”과 같은 숫자의 수식이나 그 변형형태의 혼용은 이미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언어 자체에 대한 절망행위일까, 아니면 단순한 언어유희일까. 어쨌든 통사론적 구문구조를 깨려고 한 실례를 보기로 한다.
오렌지
大砲
匍匐
萬若자네가重傷을입었다할지라도피를흘리었다고한다면참멋적은일이다
-----이상의 「BOITEUX·BOITEUSE」에서
「BOITEUX·BOITEUSE」는 시 전체가 구문구조를 벗어 난 것은 아니지만 위의 3행은 구문구조를 깬 것으로 보인다. “오렌지/대포/포복”의 열거는 주어인지, 보어인지, 또는 어떤 문법적 기능을 맡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구문구조와의 관계가 없는, 단지 세 단위(unit)의 병렬적제시가 아닌가로 생각된다. 오렌지는 ‘여성의 성기’, 대포는 ‘남성 성기’, 포복은 ‘성교의 상징’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이런 식의 폐쇄적 의미규정을 넘어서는 다양한 의미망의 지평을 열어두고, 그러한 의미의 병렬성, 다양성, 다중성을 살려야 할 것이다.
같은 제목의 시 머리에 “긴 것/짧은 것/열십자”와 같은 세 단위의 제시도 있는데 이것 역시 구문구조를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시 「수염」에는 “홍당무”, “삼심원(三心圓)” 등의 한 단위 (한 어휘)가 하나의 연(聯)을 구성하고 있다. 이상(李箱)은 언어에도 절망했다고 말한 바가 있지만, 실제의 시쓰기에서 통사론적 구문구조의 제약에 빈번하게 직면하여, 이 구조의 법칙성을 깨기 위해 몸부림친 흔적이 그의 작품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러면 김춘수(金春洙)의 경우는 어떠한가. “말의 긴장된 장난 말고 우리에게 또 남아 있는 행위가 있을까?”(김춘수 전집 시론, 문장사,1999,p.389)라고 말한 김춘수의 무의미 시의 실험은 완벽하게 구문 구조 안에서의 ‘언어유희’였다고 할 수 있다. 의미론과 통사론 구조 안에서의 언어유희가 정말로 가능할까? 자신의 무의미나 허무를 추구하는 실험이 언어유희라는 사실을 알면서 탐닉했지만, 실험한 언어가 구문론적 구조의 형식성이라는 사실에 대해선 한 마디도 없었고, 또 깨닫지도 못한 것 같다. 그의 한계성의 하나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있던 자리에
군함이 한 척 닻을 내리고 있었다.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
----〔처용단장 제1부의 Ⅳ〕에서
주목을 끄는 대목은 “바다는 가라앉고”와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이다. 무의미시의 실례다. “돌이 바다에 가라앉고”는 유의미인데, “바다는 가라앉고”는 무의미가 된다. “사냥꾼이 총으로 늑대를 쏘았다”는 유의미인데, “늑대가 총으로 사냥꾼을 쏘았다”는 무의미가 된다. 김춘수의 무의미시는 구조상으로 이러한 예와 큰 차이가 없다.
이리로 오고 있는 한 사나이가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와 같은 대목은 관념세계에서는 가능한 물리적 실현의 불가능성을 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예는 이상의 시에서는 흔하게 발견된다. 무의미시야말로 가장 순수한 예술이라고 믿었던 이 시인이 ‘무의미시’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만들었는가의 일단을 보여 준다.
‘바다가 가라앉는다.’는 표층구조의 의미는 현실적, 물리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없다.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때인가는 지진이나 지각의 변동으로 바다가 가라앉을 물리적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면, 이러한 가능성은 심층구조의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나 김춘수는 이러한 심층구조의 의미보다는, ‘바다가 가라앉는다.’는 물리적 불가능성과, 그것을 뒤집어엎는 관념적 가능성과의 충돌에서 어떤 의미(언어유희)를 찾은 것으로 생각된다.
김춘수가 “언어에서 의미를 배제하고”라고 한 말은 현실의 물리적 가능성을 배제한다는 뜻이다. 또 “언어와 언어의 배합, 또는 충돌”(동상)이라고 할 때, 언어의 지향성의 물리적 가능성과 비가능성과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김춘수의 무의미 시쓰기는 단출해 보인다. 이를 테면, 후속 시행(詩行)에 의한 선행시행의 차단(김춘수는 ‘차단’이라고 하지 않고 ‘처단’이라고 하고 있다.), 후속의 소리나 장면에 의한 선행 이미지의 차단, 연작시에서는 후속 시에 의한 선행 시의 차단 등이다. 이러한 무의미시 쓰기의 장치는 다양한 듯하지만 의외에도 단출하다. 즉, 그의 무의미시 쓰기의 장치는 주어+서술어라는 구문구조 안의 인과 관계거나, 아니면 구문(구문구조를 가진 센텐스)과 구문과의 관계 속에 갇혀 있다.
그러니깐, 김춘수의 실험은 구문론적 구조를 넘어서지 못했다. 음운 규칙 일탈, 동음이의어, 의미의 중층형성, 독립어적 병치 이러한 구문구조 내의 다양한 실험 기능의 과제를 두고 실험을 중지했다. 그러나 문제는 실험의 이러한 협소성보다는, 의미 생산구조인 통사론 안에서의 무의미 추구라는 역리가 돋보인다는 점이다.
3.
유리컵, 탁자, 비둘기, 재떨이 등을 본다고 하자. 눈앞에 있는(혹은 우리의 심적 표상 속에 있는) 사물들 하나하나는 물론, 이것들의 상호연결에서도 어떤 법칙성, 규칙성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유리컵’이라는 물리적 표상에 주술 관계와 같은 통사구조가 내재되어 있을 리 없다. 처음부터 언어 구조를 가지고 빚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유리컵은 한 시간 전에 나타나고, 탁자는 30분 뒤에 나타난다는 선조적 계열성도 없다. 이러한 모든 법칙은 사람(시인)이 둘러씌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주술관계뿐만 아니라 동서남북, 상중하, 원근법 같은 규칙도 가지고 있지 않다. “유리컵은 탁자의 동쪽 모서리에 놓여 있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이것은 주관이 그렇게 사고(思考)한 것이지 , 물체 자체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방위가 아니다. 이러한 모든 규칙은 우리의 주관, 즉 언어가 부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우리는 흔히 주관/객관, 의식/무의식, 나/타자 등으로 분할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유럽 근대 이성의 기반이지만, 그것의 분별력의 폭력은 엄청난 것이다. 이러한 근대 이성의 산물인 주관/객관이 유리컵이나 탁자나 비둘기의 실재(實在) 인식에 별 소용이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찾고자하는 실재는 주/객관의 문화이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유리컵, 탁자, 비둘기 등에 주객관이라는 구별이 있을 리 없다. 근대 이성이 그렇게 분류해 놓은 노선을 계속 맹목적으로 따라갈 필요도 없다. 또 유리컵, 탁자, 꽃 등의 사물에 의식/무의식의 구별이 내재해 있을까. 그러한 구별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사유의 판단 이전, 주객관이나 의식/무의식이나 구문론적 언어분별 이전의 ‘순수직관’으로 돌아 갈 수 없을까. 김춘수는 의식/무의식에 시달렸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한 사실은 결국 사유나 판단 즉 이성언어에 시달렸다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중도에서 사생(寫生)을 포기한 그로서는 도리 없이 ‘언어의 요새’ 속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고(思考)의 언어 (Language of Thought) 라는 개념이 인지관계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다. 자연언어라 할지라도 그것을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언중(言衆)의 마음속으로 서서히 가라앉아 이른바 ‘사고의 언어’를 형성하게 된다. 사고의 언어는 사물과의 직접적인 직관적 관계영역을 뭉개고 통사론과 같은 어떤 규칙으로 인식하게 한다. ‘마음’이라는 인식 기능까지 형식적 시스템으로 굳어져 버리게 한다. 우리는 구문론적 구조를 비롯하여 동서남북이나 상중하, 의식/. 무의식, 주관/객관 같은 이런 여러 가지 규칙들의 그물을 일단 무화 또는 폐기시킬 수는 없을까. 적어도 사고(思考) 레벨 이전인 지각(知覺) 또는 감각 레벨에서 말이다.
사물과 기호
- 사물시와 기호시의 가능성
문 덕 수 (시인, 예술원회원)
1.
탈관념(脫觀念)은 유행어인가, 시론의 한 중심개념인가. 탈이데올로기, 탈서구(脫西歐), 탈모더니즘 등이 갖는 비슷한 유행성 및 인문학적 개념 등과의 이중성을 갖는다. 우연히 걸리는 길바닥의 지푸라기가 아니라 오늘의 우리를 덮치는 강력한 회오리 같은 것이 아닐까.‘관념을 벗어난다’는 것은 낡은 관념의 옷을 벗어던진다는 뜻이다. 벗어 던져야 할 ‘관념’이란 어떤 관념의, 어떤 이유에서일까. 또, 관념을 벗어던진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물’(物 또는 사물)이라면 물이란 관념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물이란 또 무엇이며,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이런 여러 가지 물음이 서로 얽혀서 꼬리를 문다. ‘탈관념! 탈관념!’ 하고 외쳐도 이론이 뒷받침하고 실천이 뒤따르지 않으면 빈 양철 두들기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관념’은 그리스어의 이데아(idea)의 역어라고 한다. ‘notion’도 이에 해당된다. 불교에서는 일찍부터 불타나 진리를 관찰하고 사념(思念)한다는 뜻으로 사용해 왔다. ‘관상념불’(觀想念佛)의 준말이라고도 한다. 한자의 ‘관(觀)은 눈을 크게 뜨고 사물을 두루 자세하고 똑똑하게 본다’는 뜻이고, ‘염’(念)은 생각하여 마음 속에 굳게 간직한다는 뜻이다. ‘이데아’도 ‘본다’는 의미의 동사인 ‘에이도스’(eidos)에서 파생된 말이므로 어원적으로 ‘본다’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데아는 보이는 모습, 형상(形狀), 형식 등, 이른바 표상(表象, representation)을 의미하기도 한다. 관념이건 이데아건 ‘감각적으로 사물을 본다’는 어원을 공유한다.근대 이후 ‘관념’은 사유(思惟)의 대상으로 한정되어 사물을 본다는 감각적 의미가 떨어져 버린 것 같다. 한편 관념론과 경험론으로 갈려 논의되는 경향도, 관념에서 감각적 경험이 떨어져 버린 것의 반영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물의 형상을 관념이라고 말하지 않고 ‘표상’이라고 하고, 사유를 형성하는 능력을 ‘오성’(悟性)이라 하여 구별하는 것도 관념에서 감각적 기능이 탈락되고 있는 추세다. 관념에는 가상성(可想性)과 가감성(可感性)이 논란의 핵으로 불거지면서, 어느새 사유의 대상으로서의 ‘가상성’만이 중심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관념이란 넓은 의미의 정신적 원리(의지, 이성 등)에 의하여 세계의 현실을 해석한 내용을 의미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시론에서 그런 것 같다.
2.
탈관념시 운동의 효시는 1930년대 모더니즘 운동부터인 듯하다. 정지용(鄭芝溶)과 이상(李箱)이 그 주역이다. 이 때가 탈관념시 운동의 제1기라면 오늘은 제2기라고 할 수 있다. 제2기는 제1기가 지닌 아방가르드성(性), 실험성 등을 계승하여 새로운 시대적 의미의 요청으로 변용․계속되고 있다.정지용과 이상은 외부와 내부, 외면 사생(寫生)과 내면 기록의 대립상을 보이나, 기존의 시적 관념세계에 대한 반동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이 둘의 전위적 성과의 물량은 적으나 퍽 감동적이다. 광복 후 조향(趙鄕)도 방황을 거쳐 이 노선에 합류한다.(탈관념 운동의 3인방이라고나 할까.)
바다는 뽈뽈이
달어 날려고 했다.
푸른 도마뱀떼 같이
재재 발렀다.
― 정지용, 「바다 2」에서
이 바다 물결은
예부터 높다
그렇지만 우리 청년들은
두려움보다 용기가 앞섰다
산불이
어린 사슴들을
거친 들로 내몰은 게다.
― 임화, 「玄海灘」에서
두 편 모두 30년대의 작품으로서 ‘바다’가 대상이다. 정지용은 이데올로기와는 관계없는, 그냥 벌거숭이 바다이나, 임화는 한․일간의 역사적 굴곡이 투영되어 있다. 30년대의 모더니즘이 역사주의 회피를 위한 탈출구가 아니었지만, 역사주의 쪽에서는 그런 비난을 한다. 이런 비난은 오늘날에도 계속될 수 있다. 분단상황과 통일 및 평화라는 민족적 과제를 외면한 반민족적 예술지상주의라는 식으로 변형될 수 있다. 탈관념 시론은 관념주의의 비난을 무릅쓰고라도 ‘물’(사물) 자체를 중요시하고, ‘관념’은 그 다음 것으로 본다.
벌판 한복판에 꽃나무 하나가 있소. 근처에는 꽃나무가 하나도 없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를 열심히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히 꽃을 피워가지고 섰소
― 이상, 「꽃나무」에서
‘꽃나무’에는 역사주의적 관념이 없고, 정지용과 같은 외적 객관적인 존재도 아니다. 주체(이상)의 내면 속에 상상된 점에서 정지용의 사물 점묘(事物點描)와는 다른 심리주의적 수법임을 알 수 있다. 심리 속의 사물이긴 하나 관념 즉 이데올로기의 산물은 아니다.30년대 탈관념론은 사회주의에 편승한 카프계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동운동이다. 카프계와의 골치 아픈 논전을 피하고(카프계의 조직적․전투적 논리의 과격성이 싫었던 것 같다), 정지용은 모던한 감각적 물리성에서, 이상은 내면의 역설적 고뇌의 회오리에서 조용히 사물을 응시하는 탈관념 시쓰기로 혁명한다. 그런데, 조향은 이 두 선배보다 더 치열하고 극성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탈관념 시쓰기와 더불어 탈관념 이론(초현실주의 수법, 단절의 논리, 오브제론 등) 구축에도 적극적이다. 그의 노선은 이상 쪽이다.
열 오른 눈초리 하잔한 입모습으로 소년은 가만히 손을 겨누었다.
소녀의 손바닥이 나비처럼 총 끝에 와서 사뿐 앉는다.
― 조향, 「EPISODE」에서
광복 후, 문단이 좌우로 분열되면서 관념시의 정치적 폭위에 맞선 조향의 탈관념 운동의 보기다. 초현실주의 시론의 영향에 압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조향이 조선문학가동맹 계열의 이데올로기뿐만 아니라, 서정주의 전통적 서정주의나 정지용 계열의 모더니즘(이미지즘)에도 맞섰다는 점이다. 이 점은,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원리로 많이 다가간 오늘의 탈관념론 운동의 한 방향을 시사한다.조향의 초현실주의 클럽의 멤버이면서 조향의 지도를 받은 이선외(李善外)의 글이 있다. “논리적 계산하에 뒤에 올 말이 빤히 집히는 수직적인 언어, 인간에 의해 무력해진 언어들보다는 벌거숭이 언어, 인간의 현실적인 지휘(指揮)를 받지 않는, 생동하는 언어, 존재로서의 언어가 더 시적이고 창조적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이선외, 「의식(존재)의 확대」, 초현실주의문학 예술연구회 편, <오브제>, 덕문출판사, 1980. 3, p. 44) ‘날 이미지’나 ‘날 것’보다 훨씬 앞선 “벌거숭이 언어”라는 말이 유난히 돋보인다.
3.
탈관념 시쓰기는 기존의 관념을 배제하고 물 또는 물체를 중시한다. 기존의 관념을 배제한다는 뜻은, 구문(構文) 구조에서 굳어진 기존의 선조적(線條的)․시간적인 단선의 맥락에서 벗어나서 구문의 종지점(終止點)이건 구문의 중간 지점이건 간에 어디든 접속되어(링크하여) 새 맥락의 가지가 뻗어 나가고, 그 맥락에서 다시 새 구문이 발생하여 전체적으로 복합적인 네트워크를 이루는, 하이퍼텍스트의 원리도 포함된다. 이리하여 ‘물’ 또는 ‘물체’의 의미는, 내면세계의 무질서와 비슷한 하이퍼텍스트 속의 사물이나, 외적 현실 세계의 사물 모두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두 세계에서 흔히 날 것, 벌거숭이 언어, 날 이미지, 있는 그대로의 사물 등을 강조한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 김소월, 「가는길」에서
‘그리움’은 사물인가, 관념인가. 이 시에는 ‘이별의 현장’이 전제되어 있지만, 며칠 몇 시, 어느 곳에서, 누구와의 이별이라는 구체적․개별적 현장체험은 사상(捨象)되어 있다. 실제의 체험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리움’의 정서도 ‘이 사람’ 또는 ‘저기 계시는 저분’에 대한 그리움임이라고 특정할 수 가 없다. 시행(詩行)의 연결에도 관념적 연속성이 있고 또 인간중심주의라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이러한 ‘그리움’의 정서도 관념으로 간주해야 한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 유치환, 「바위」에서
유치환의 ‘바위’도 문제가 된다. 무엇보다도 ‘나’라는 1인칭 주체의 의지세계를 강조한 인간중심주의가 돋보이고, 사물 자체도 개념화되어 그것에 흡수된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 다음에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가 이어져, 바위가 지닌 물성(物性) 즉 바위의 견고성, 무게와 부동성, 풍화작용 등의 물리성을 암시하지만 바위에 대한 관념내용이라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관념이긴 하나 해석에 의하여 물성 또는 물리성을 파악할 수 있고, 이 물성을 근거로 ‘바위’라는 실물에까지 닿게 된다. 그러나 이 시를 탈관념시라고 할 수는 없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 서정주, 「문둥이」에서
서정주의 「문둥이」도 체험적 현장성이 약하다. 특히 문둥이의 서러움이 어떤 모양의, 어떤 성질의 서러움이냐고 묻는다면 그 구체성을 대답하기 어려운 즉 구체성이나 개별성이 없는 추상된 관념성이다.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밀어」), “내 너를 찾아왔다. 수나”(「부활」),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님의 밟으신 길은”(「귀촉도」)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미당도 청마와 마찬가지로 인간중심주의여서 인간 바깥에 실재하는 사물이 개념화되어 인간 쪽으로 수렴되고 있다.
-나의 치사한 꼴을 보이지 않도록 해 다오
-나의 더러운 몸을 말끔히 씻기게 해 다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가뭄에 물줄기는 끊기고
몇 군데 웅덩이에 웅덩이물만 남았다
그 변두리에
어떤 돌은 옆으로 서 있고
어떤 돌은 자폭(自爆)인가 엎드려 있고
어떤 돌은 엉거주춤 앉고
어떤 돌은 손을 들고
기도하듯
제각기 다른 생각으로 무엇인가 갈구하고 있다
-내 죄가 있다면 물이 흐르는 대로 흘렀을 뿐입니다
-내 죄가 있다면 수석가의 선별 대상이 되었던 것 밖에 없습니다.
-박명용의 「돌」 전문
이 시는 ‘돌’을 인간적인 차원에서 ‘타자’(他者 other)로 인식하고 있고, 돌이 의인화되어 있음은 확실하나, 그렇다고 돌을 자기화(自己化)하고 있지는 않다. “나의 치사한꼴…”의 ‘나’는 의인법을 말해주는 근거이나, 이 시의 주체인 “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유치환, 「바위」), “노오란 네 꽃잎이 필려고/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서정주, 「국화 옆에서」)와 같은 ‘나’와 비교해 보면 돌과 나와의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어쨌든 박명용은 ‘사물과 주체 사이와의 거리’를 많이 떼어 놓고, 사물을 비인간주의적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의 사물로 바로보는 한 계기를 닦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바람과 날개」, 「춤꾼」, 「숯」, 「보길도」 연작시 등이 모두 그런 작품이고, 특히 「보길도․2」 등은 사물을 사물 그대로 보려는 태도를 훨씬 짙게 드러내고 있다.
균근(菌根)곰팡이는 안개처럼 뿌리의 앞을 짓궂게 막아서고
실뿌리는 이리저리 길을 찾아 암석을 파고들고
가는(細) 실뿌리의 절규가 오래도록 암석을 흔든다
시나브로 암석에 금이 가고
조금씩 부서지고 떨어져나간 틈새로 빗물이 스며든다
-이솔의 「곰팡이가 암각화를 그린다」에서
이 시는 박명용의 태도를 더욱 철저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물 자체가 주체(시인)로부터 떨어져 거의 별개의 존재(실재)로 독립되어 있는 대상이 되어 있다. 표현에서 관조하는 시인의 감각적 시선(視線)이 감지되나, 시인의 인간주의적 어떤 감정이나 어떤 사회적 관념(이데올로기 같은 것)을 옹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주관의 개입을 최대한도로 억제하여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이 시인은 마치 관찰의 기술자나 시 제작의 직공처럼 사물의 미세한 운동을 놓치지 않고 더듬는 운동을 보여준다.(그러나 이런 시의 경향만이 절대적으로 좋다는 것은 아니다.)있는 그대로의 사물의 성질을 객관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존 로크(1632~1704)는 사물의 성질을 세 갈래로 분석해서 보여준다. (1)물체의 고성(solidity)이 지닌 양, 형태, 수, 위치, 운동 또는 정지(靜止). 이것을 물체의 1차성질(primary Quality)이라고 한다. (2)우리의 감각에 작용하는 색, 성, 향, 미 등. 이것을 2차성질(second Quality)이라고 한다. (3)물체의 1차성질이 다른 별개 물체의 양, 형태, 조직, 운동을 변화시키는 능력. 이것을 물체의 능력(Power)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분류는 물 그 자체가 그 안에 가지고 있는 성질과, 물이 다른 물체와의 관계에 의해서 나타나는 성질로 대별된다. 1차성질과 2차성질은 전자에, (3)의 능력은 후자에 해당된다.
사금파리로 날을
얇게 세워
거침없이 달려오다가
-박명용 「보길도․2」에서
파도라는 사물의 모양이나 운동을 묘사한 이 시는 존 로크가 말하는 사물의 1차성질이다. 앞에 예로 든 이솔의 시도 역시 1차성질의 것이다. 사물을 강조하는 시는 존 로크가 든 사물의 성질(1차성질, 2차성질 및 능력)을 읊은 것, 사물에서 기존의 어떤 관념을 배출하려고 하는 경향(오규원, 조영서), 사물 자체가 다른 어떤 관념이나 의미를 배후에 거느리고 마치 상징이나 메타포의 유의(喩義)처럼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쁘다라는 식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마지막 경우의 시가 압도적으로 많다.
카프의 이데올로기는 역사주의적 관념이다. 청마의 의지나 미당의 서정은 모두 인간중심주의적 관념이다. 모두 휴머니즘을 지향하지만, 탈관념의 입장에서 보면 임화나 청마나 미당이나 모두 오십보 백보의 관념세계다. 오늘의 분단을 강조하고 통일과 평화를 외치는 민중시도 그렇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 중심주의나 역사주의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4.
이제 모더니즘의 또 한 갈래인 좀더 과격한 전위시를 보기로 한다. 이 경향은 물리주의(사물을 중시하는 모든 경향을 일단 이렇게 부른다)보다는 대상(사물)과 주체(시인) 사이에 존재하는 언어기호의 매개적 관계성을 중시한다. 사물의 실체와 그 실체의 성질의 표현을 중시하는 것보다는, 그 사물을 표현하는 ‘매개적 기호’에 모든 관심과 노력을 집중하는 것이다. 실체론이 아니라 관계론이다. 이미 이상(李箱), 조향(趙鄕) 등이 그렇게 해 왔다.그런대로 의미 있는 이 계열의 상속자들이 꽤 많은 것 같다. 황지우, 박남철은 해체시 계열로 알려져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 ‘기호파’라고 할 수 있다. 오남구, 심상운, 양준호, 박찬일 등의 최근 실험은 모두 이 계열로 보인다.
앞 바다를 빨래처럼 걸어
줄에 매어놓고 나면
나부끼는 바다
핏빛 선명한 해가
미끈, 미끄러지며
캄캄하게 사라졌다
-오남구 「서해」에서
이 시는 고군산군도 근처 서해의 일몰(日沒) 현장 풍경의 이미지이지만 결코 서해 일몰의 리얼한 사생(寫生)은 아니다. 서해라는 현실적 현장의 일몰풍경이, 하이퍼텍스트 이미지 형성의 모티프가 되었을지는 모른다. 시인 자신의 자유로운 원근법에 의한 별개의 기호세계를 이루고 있다. ‘원근법’도 매개적 관계자다. 이 텍스트는 바깥에 존재하는 현장의 사물을 지향대상(referent)으로 지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시 자체는 사물의 세계를 넘어선 기호세계의 텍스트다.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늘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다
-심상운,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 에서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시문학, 2007. 6)의 제1연만으로는 여느 물리시와 별반 다를 바 없다. 분명히 사생(寫生)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제2연은 다음과 같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 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심상운 윗 시의 제2연
시위 장면의 촬영현장과 제1연의 안개 속의 나무, 사회와 자연이라는 두 장면이 한 작품의 구조 속에서 몽타주처럼 연결된다. 더욱이 이 시의 제3연, 제4연에서는 계속 더욱 이질적인 다른 이미지의 세계가 연결되어 겹쳐진다. 즉 제3연은 촬영한 안개 속의 나무를 벽에 걸어놓은 식탁의 한 광경이고, 제4연은 회를 먹는 리포터의 입이 화면 가득히 확대되는 TV의 사이버 이미지다. 이 작품은 ‘자연풍경+사회와 정치적 사건+실내의 식탁 광경+TV 화면’ 등이, 복잡하게 연결된 ‘집합적 결합’(문덕수 「나의 시쓰기」)이라는 일종의 하이퍼텍스트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분명, 우리 시의 미지의 세계다.조향의 “유리창에 시꺼먼 손바닥/따악 붙어 있다/指紋엔 나비의 눈들이/(M․S)/쇠사슬을 끊고”로 시작되는 「검은 SERIES」는 역사주의도 아니고 인간중심주의도 아니다. 유리창에 붙은 손바닥은 물체이면서 그 기호(記號)다. 대상과 주체 사이의 관계론으로의 전환을 암시한다. 일종의 혁명적 징조다. 임화, 미당, 청마와는 전혀 다른 종류, 다른 성질의 시다. ‘물체에의 접근’처럼 보이지만, 실은 기호의 혁명적 전환에 의한 기호의 외적 지향성의 관련사물일 따름이다. 임화와 같은 이데올로기는 물론 아니요, 청마류의 의지나 미당류의 서정 같은 것도 아니고, 단지 하이퍼텍스트의 이미지가 표상하는 물체의 벌거숭이, 날 것 그대로의 제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리창에 붙은 손바닥 이미지’에는 내적 맥락의 연속성 같은 것을 볼 수 있다.(맥락의 연속성도 관념이다.) 「아시체놀이」는 그런 맥락도 없다. 더욱 과격하다.「아시체놀이」의 관념은 더욱 철저히 배제했다고 볼 수 있다. 「雅屍体 놀이」라는 시는 조향이 서울에서 주도한 초현실주의 문학 예술연구회에서 발행한 <오브제>(덕문출판, 1980. 3)에 수록된 작품이다. ‘놀이’라는 말에서, 여러 사람의 합작임을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조향 씨 주동의 학습클럽 멤버들(김요환, 이용진, 김병만, 민장호, 이선외 등 제씨)이 참여한 합작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쨌든 「검은 SERIES」가 보여준 행 사이의 연속성이 여기서는 그것마저 단절되고, 마치 불교의 선문답(禪問答)처럼 엉뚱하고 기발하고 충격적이다.다음에 양준호의 시 「눈뜨는 나뭇잎의 9월」과 「아시체놀이」를 함께 든다. 비교해 보면 재미있다. 양준호의 하이퍼텍스트도 「아시체놀이」와 비슷하다. 송시월, 박유라도 이 계열에서 논할 수 있을 것 같다.(다음 기회에는 ‘서정시와 관념시의 가능성’ 문제를 다루어볼까 한다.)
그런데 왜 우리가 마치 나방이 같지?
시궁창에 쳐 넣어진 거야.
안경알에 비친 무지개 빛깔은?
머리카락이다
세모꼴의 치아의 촌수는?
미학의 꽁무니다
-「雅屍体놀이(문답시 1)」 전문
내가 깔고 앉았던 바다를 공중변소 휴지통에 구겨버리고 온 날, 뜰 앞의 노오란 민들레는 눈 멀어 종일 바닷새가 회항(回航)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준호 「눈뜨는 나뭇잎의 9월」 전문
사물과 언어와의 만남
문 덕 수 (시인, 예술원회원)
1
시쓰기는 제재(또는 사물), 언어, 시인, 독자, 미디어(잡지, 신문, 방송), 출판, 서점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어울려 상황을 구성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관점에 따라 輕重의 차이가 있겠지만, 사실 어느 한 가지인들 중요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요소들의 중요성의 경중을 따져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요소들 중에서 특히 '사물'과 '언어'라는 두 요소에 집중하여, 이른바 사물과 언어와의 만남이라고 할까, 관계라고 할까, 그런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한 마디로 사물과 언어와의 만남 또는 관계라고 하지만, 여기에는 몇가지 문제점이 잠재되어 있다. (1) 사물과 언어 또는 관념과의 일치 여부 또는 준별 가능성, (2) 사물(thing)이라는 개념의 범주 확정, (3) 이 문제에 불가피하게 관련되는 비유, 상징, 이미지, 지성, 정서, 상상력, 구조, (4) 시쓰기의 原點 또는 출발점 등이다. 이렇게 열거하고 보면, 사물과 언어와의 만남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은 사실상 시의 모든 문제를 전부 포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는 이러한 문제를 하나하나 살펴볼 수는 없고, (1)번 문제에 집중하되 나머지 문제도 관련되거나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언급해 보기로 한다.
누군가 이미 한 말 같다만 사물은 시간마다 달리 보이는 법, 그래도 관념은 여전히 고집을 피우고, 까닭 없는 슬픔은 온몸 가득 번져 나른한데, 다탁 위에 놓인 내 손끝을 잡고 애써 웃는 그대를 새롭게 부르고 싶어 견딜 수가 없구나.
―윤석산, 「칸나꽃 뒤로 보이는 풍경을 위하여」에서
이 시에서, 尹石山은 시간에 따라 변하는 사물과 변하지 않는 언어 사이에는 불일치가 있고, 따라서 사물과 언어는 다른 것이며, 변화하는 그 사물에 알맞은 새로운 이름을 부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말하고 있다. "언어는 존재다"라든지, "언어는 사물이다"라고 말하는 시인들이 있는데, 尹石山은 사물과 언어, 사물과 관념과의 불일치 또는 구별을 의식하고 있다. 바다를 언제나 항상 '바다'라고 부르는 것, 빗속에 흔들리는 칸나꽃을 항상 '붉다'고만 하는 것은 확실히 사물과 언어와의 불일치를 무시한 언표일 수 있다. 하물며 연인의 경우, 사랑하기 이전과 이후는 그 이름이 마땅히 달라져야 할 것이다.
같은 하나의 사물에 대하여, 집단(종족, 민족)이나 언어나 개인 등에 따라 달리 언표되는 사례는 늘 경험하는 일이다. '개 짖는 소리'에 대하여, 한국인은 '컹컹'이라고 하고, 일본인은 '완완'(ゆんゆん)이라고 하고, 미국인은 '바우와우'(bowwow)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일례다. 또 '컹컹'은 개가 짖는 소리에만 국한되지 않는 예도 있다. 이를테면, 沈相運은 "아직도 몇몇 목공들은 살아서 / 컹컹 기침을 하며 / 환한 속살의 각목을 켠다"(「木工幻想」에서)라고 하여, 목공들의 기침 소리를 '컹컹'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기침소리의 음성상징(의성어)에도 리얼리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전에서는 매미의 울음소리를 '매암, 매암'(준말은 '맴맴')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서울시내, 아파트 틈새의 매미소리는 '맴맴맴'을 7번~10번 정도에서 끊고, '매애앰'하고 길게 뽑는다. 몇 년 전 강화도의 전등사에 갔었는데, 경내의 숲에서 들은 매미소리는 15번~17번이나 울고서는 그 다음에 '매애애애앰' 하고 길게 뽑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전등사 경내의 매미는 '맴맴'이 아니라 '맹맹' 또는 '매앵, 매앵' 하고 울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기운이 없는, 또는 공해에 병든 매미는 '미미' 또는 '매매'로 울고, 건강하고 생기 있는 매미는 '맹맹' 또는 '매앵, 매앵'으로 탄력이 넘치는 소리로 들린다. 이러한 매미소리의 분석도 실제의 매미소리와 얼마만큼 일치하느냐 하는 것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시인은 시쓰기에 있어서 사물과 언어와의 완전한 일치를 가장 이상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사물과 언어 사이에는 분열, 틈이 있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완벽한 답은 神의 몫이겠지만, 대충 말한다면 사물에 대한 언어의 양적 빈곤, 사물과 떨어져 있는 언어의 독자성, 그 可動性(mobility), 언어의 추상성과 언어의 구조적 결함, 언어 사용자의 주관, 등등을 들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이 문제에 대한 언급을 이런 정도로 해둘까 한다.
2
사물과 언어의 불일치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우리가 잘 아는 시가 있다. 이 시는 그러한 문제를 사물 쪽에도 있고, 언어 쪽에도 있고, 그리고 언어 주체(사람) 쪽에도 있음을 암시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물상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1」에서
이 작품은 어떤 사물(절대 존재, 또는 사람, 연인 등)에 이름을 불러주기 이전과 이름을 불러준 이후의 차이라는 구조를 갖고 있다. 사물, 이름(언어), 그리고 이름을 불러주는 주체(사람) 등이 다 표면화되어 있으므로, 사물과 언어의 불일치 또는 일치 문제의 요인들이 다 암시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물상'(物象)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름을 불러주자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름'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물상'과 '꽃'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여기서의 '이름'은 동식물이나 사람이나 무기물 등 상호간을 구별하기 위하여 부르는 명칭, 성명이나 명의(名儀) 등의 사전적 의미라기보다는, 특별한 관심(동정, 연민, 사랑, 믿음 등)을 가지는 어떤 존재(신, 절대자, 연인, 친구, 존경의 대상)에 대한 특별한 의미나 가치에 대한 명칭, 또는 호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호칭(명칭)은 언어화 또는 언어로 표출되는 명명행위라는 점에서, 견강부회가 될는지 모르겠으나 간략하게 '언어'라고 해둔다. 아담이 만물에게 이름을 지어 불러준 그런 의미의 이름 불러주기라고 하더라도 역시 언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한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물상에 불과했는데, 이름을 불러주자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꽃도 물상의 일종이지만, 金春洙의 이 작품에서는 물상과 꽃이 준별되어 있다. 그러니까, '물상'은 이름을 불러준 이후의 '꽃'과는 다른, 말하자면 이름 이전, 이름이 없는, 다시 말하면 언어 이전의 사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이 만물을 창조한 이후, 아담이 이름을 지어 불러주기까지의 기간에 존재했던 사물이 물상이 아닐까. 그러한 사물에 이름을 불러주니까, 그 사물이 모두 내게로 와서 나와 특별한 관계를 맺으면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소중한 존재(꽃)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해석이 가능할 줄 믿는다. 또, 언어(이름)는 물상을 꽃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어떤 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은 다음과 같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意味가 되고 싶다.
"무엇이 되고 싶다"든지,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는 것은, 애벌레가 나방으로 변신한다든지, 개구리가 땅 속의 동면에서 깨어나고 싶은, 그런 '변신'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존재의 근원적 상황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즉, "나는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근원적 물음이 내포되어 있고, 그러한 물음에 대한 응답으로 확산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와 같은 데카르트식의 근대적 자아의 존재방식이 아니라, '나와 너'(Ich und Du)라는 부버(M. Buber)식의 존재방식임을 알 수 있다. '나'란 무엇인가 라는 근대적인 물음이, '나'에게서 출발해서 '나'에게로 되돌아오는 일방적'폐쇄적 코스가 아니라 '나'에게서 출발하여, '너'에게로 나아가는 쌍방적•개방적 코스를 통해서, '개인'이나 '전체'로 환원될 수 없는 '더불어' '함께' '共生'의 범주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부버가 인간존재의 원범주로서의 인간의 '간'(間, das Zwischen)이라는 개념을 제기하고 있는데, 그것이 내가 너를 대상화하여(즉 물상화하여) 이용하려고 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서로 마주보는, 서로 '꽃'의 의미를 지닌 주체로서의 공생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金春洙의 「꽃1」에서 이상과 같은 해석을 전제로 하여 두 가지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싶다. 첫째, 이름을 부르기 이전(즉 언어 이전)의 '사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춘수는 그것을 '물상'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특유한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어떻게 불렀던 간에, 아직은 이름이 없는 언어 이전의 적나라한 사물세계임이 분명하다. 둘째, 작자는 이 시에서 신화적•창조적인, 어떤 점에서 아담과 비슷하기까지 한 명명행위를 체험하고(?)있다. 즉,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름이 없는, 언어의 인공적 가공의 퇴적이 아닌, 언어 이전의 사물의 원점에서 이름을 지어 불렀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기존의 관념이나 선행언어들을 고친 것, 즉 개명도 추가도 아닌 새로운 명명행위라고 할 수 있다.
3
사물과 언어와의 분열•불일치는 여러 가지 이유에 기인한다는 점을 앞에서 말했다. 그러한 분열․불일치가 있으므로, 그것을 극복하여 일치시켜보려는 시도(즉, 진실과 진리의 추구나 노력)에서 사물과 언어와의 만남의 양상도 또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사물과 언어와의 분열•불일치의 여러 원인 중이서, 사물을 관찰하는 주체 즉 시인의 입장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큰 다른 양상을 가정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는, 먼저 어떤 관념을 정해 놓고, 그 관념에 알맞은 사물을 찾아 그 관념을 해석하거나 그 관념에 사물을 끌어다 연결시키는 방법이 있다. 이러한 태도의 근원은 낭만주의 또는 인간중심주의에 있다고 하나, 고전주의에도 있다. 사물보다 관념을 선행시키는 태도는, 사물을 이데아의 가상(假像)이나 모상(模像)이라고 하여 참된 실재로 보지 않고, 참된 사물의 실재는 '이데아'라고 주장한 플라톤의 이상주의에 그 이론적 연원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하나는 '관념'을 먼저 만들지 않고 사물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의식하려고 하는 리얼리즘의 방법이다. 이 경우, 그 사물에서 가급적이면 인생론이나 사회론 같은 관념을 배제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고 그 사물에서 어떤 관념을 귀납적으로 끌어내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사물과 언어와의 만남의 양상에서, 낭만주의(휴머니즘)와 리얼리즘이 갈라지기 시작하는 분기점의 하나를 발견할 수 있음도 흥미롭다고 하겠다.
먼저 전자의 경우부터 살펴보겠다. 관념을 먼저 만들어 놓고(정해 놓고), 그런 다음에 사물을 찾아 연결시키는 방법을 관념의 감각화, 관념의 肉化(incarnation)라고도 말한다. 관념을 관념 그대로 표현하는 방법도 물론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의 전형적인 예로서 이방원의 「何如歌」(관념을 설정한 후, 사물을 끌어다 연결시킨 것)와 답가인 정몽주의 「丹心歌」(관념 즉 일편단심이라는 의지를 의지 그대로 표현한 것)를 들 수 있다. 현대시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가장 성공한 시인은 金顯承일 것이다.
나의 희망,
어두운 땅속에 묻히면
黃金이 되어
불 같은 손을 기다리고,
너의 희망,
캄캄한 하늘에 갇히면
별이 되어
먼 언덕 위에서 빛난다
―김현승, 「희망」에서
이 시의 제목은 「희망」인데, 그것은 앞으로 이렇게 또는 저렇게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어떤 가망, 염원을 의미하는, 보편성을 띤 관념이다. "나의 희망(이) / 어둔 땅속에 묻히면 / 黃金이 되어"라는 선조적(線條的)•축자적 표현을 차례대로 분석해 보면, "어둠의 땅속"이나 "黃金"이라는 사물에 앞서서 먼저 "희망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또 "나의 희망은 무엇이며, 너의 희망은 무엇일까" 등 일련의 의문이 결합된 문제 즉 관념이 형성되고, 그런 연후에 그런 관념에 적합한 '사물'(땅속, 황금)을 발견하여 연결시켜 감각적으로 구체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주지주의에서 강조하는 "사상의 감각화"라는 것은 이를 두고 일컫는 말이다)
이 경우, 혹자는 작자가 '희망'이라는 관념을 떠올리기 이전에 "어두운 땅속에 묻힌 黃金"이라는 사물(또는 사물 이미지)을 먼저 발견하고, "이 사물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숙고한 끝에 '희망'이라는 관념을 찾아낸 것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사물에서 어떤 관념을 해석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도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작품으로 정착되기 이전의 작자의 심리세계, 즉 역순(逆順)이 자유로운 혼돈의 상상세계와, 그것을 정리하여 작품(텍스트)으로 일단 조직화한 후의 축자적․선조적 질서와는 구별해야 할 것이다. 어떤 성질의 해석과 분석이든, 어떤 관념(예를 들면 '희망' '자유' '고독' 등등)을 먼저 설정하고, 연후에 그 관념을 구체화•감각화 할 수 있는 사물을 찾아서 그것에 결부시켜 표현할 작품임이 분명할 때, 그 작품의 축자적•선조적 질서를 뒤엎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관념을 먼저 설정하고, 연후에 그것을 구체화•감각화 할 수 있는 사물을 찾아 결부시키는 방법을 중시할 때, 그러한 작품의 의도나 목적은 '관념탐구'(또는 어떤 사상의 선전)에 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의 사물의 실재(참된 사물의 모습)를 탐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즉 사물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을 더 중시하고, 그 관념을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내려고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므로, 先觀念 後事物의 방식을 취할 때, 관념(언어)과 사물과의 일치여부, 적합여부를 분석하는 기준은 사물이 아니라 관념 쪽에 있다고 하겠다. 즉, 진리로 정립된 관념을 얼마만큼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표현하여 전달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그 기준을 둔다.
앞에 든 김현승의 작품을, 이러한 기준에 비추어 조금 살펴보자. "나의 희망, 어두운 땅속에 묻히면 / 黃金이 되어(「희망」)"라는 대목은 어떤가? 자기의 희망이 손에 잡히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땅속에 묻혀 있으면 도리어 고귀하고 아름다운 '黃金'이 된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제기될 수 있다. 즉, 내가 추구하는 '희망'이 실현될 수 없는, 손에 잡히지 않을 경우에는 과연 '황금'과 같은 물질(상징)이 되고, '돌'이나 '마른 나뭇가지' 같은 다른 사물은 될 수 없을까. 즉, 관념(내 희망)과 사물(황금)이 일치된 상태일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 다음에는 "너의 희망 / 캄캄한 하늘에 갇히면 / 별이 되어"(「희망」)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경우에도 관념(희망)과 사물(별)과의 일치여부가 문제로 제기된다. 즉 '별'만 되고 '달'이나 '태양'이나 '무지개' 같은 다른 사물은 될 수 없는가. 또, 나의 희망의 경우에는 '황금'과 결부되는데, 너의 희망의 경우에는 '별'과 결부되는 까닭, 그리고 황금과 별의 차이는 무엇인가 ― 이런 의문도 제기된다.(이러한 의문 제기는 부질없는 것일까).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
―김현승, 「堅固한 고독」에서
'견고한 고독'은 이 시인 자신의 삶의 방식이나 태도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자기 개인 레벨을 초월하려고 하는 의도도 엿보인다. '고독'이라는 인간조건은 불가피한 것이지만 삶에 대한 부정적 측면이 더 강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고독을 혐오하거나 기피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하며 확고부동한 자세로서 수용하고 고수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견고한 고독」이라는 제목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껍질을 더 벗길 수 없을 만큼 단단하고 깡마른 흰 얼굴은, 작자를 접촉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작자의 실제 몰골을 연상할 수 있을 만큼 유사한 것이다. 일종의 고독 나르시시즘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작자는 고독을 사랑하고, 그러한 고독의 여러 양상 중에서도 '견고한 고독'을 특히 중시하고 강조하는 그런 인생태도를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도대체 견고한 고독이란 어떤 고독일까, 이런 의문이 제기된다. 이런 의문에서, 작자는 삶의 어떠한 불리하고 부정적인 조건에서도, 결코 흔들림이 없는 확고부동한 '고독'의 고수야말로 '진실한 삶'이라는 의지를 정립한 것이다. 아마 그러한 고독의 관념은 양심이나 정의와 연결되어 더욱 확고한 신념으로 굳어진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관념(견고한 고독)을 구체적•감각적으로 밑받침할 수 있는 사물로서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 단단하게 마른 / 흰 얼굴"을 연결시킨 것이다. 문제는 견고한 고독을 구체적•감각적으로 밑받침할 수 있는, 더욱 더 적합한 다른 사물은 없는가 하는 것이 의문으로 제기된다. 껍질을 더 벗길 수 없는,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만이 견고한 고독과 완전히 일치하고, 이를테면 '바위'나 '마른 논바닥'이나 '양철' 같은 사물은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는가. 어쨌든, 이 경우 판단의 기준은 신념화된 '견고한 고독'이라는 관념 쪽에 있다고 하겠다.
4
시쓰기의 또 다른 중요한 하나의 방향이 있는 것 같다. 관념을 거치지 않고 '사물'로 직행하는 방향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창조한 만물에 이름을 지어준 이후, 수많은 시인들의 명명행위는 되풀이되고 있는데, 사물이란 되풀이되는 그런 명명행위의 축적으로 가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물은 언어에 의하여 왜곡되거나 오염되어 진실한 모습이 은폐되거나 훼손되어 있다. 그러한 선행관념은 모두 인공적 가설(?)이므로 제거되어야 한다. 시쓰기에 있어서, 그러한 선행관념의 부정은 물론이요, 사물의 체험에 앞서서 먼저 관념을 설정하는 일을 그만두고,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직접 체험하여 사실 그대로 표현하려고 하는 태도를 지향하려고 한다. 그런 태도가 사물이나 세계의 진리나 진실을 추구하는 기본태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사물을 가리고 있는 누적된 언어적 인공물을 제거할 수 있는가, 또는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는, 언어 이전의 사물을 체험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도 제기될 수 있다. 만약 가능하다면, 사물과 언어(또는 세계와 언어)를 분리시키려고 하는 2분법 사고의 소산이라고 비난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한편 "언어는 사물이다"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고, 또 그런가 하면 자연의 風景은 자연과 문화의 교환관계에 의한 매개적•이중적 장소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이러한 논란은 언어의 의미기능, 언어구조, 언어의 언급성(referentiality) 등의 문제에 깊숙이 내재되어 있어서, 여기서 꼬치꼬치 따질 계제가 아니다.
언어를 거두어 낸 뒤의 사물, 또는 언어 이전의 사물의 세계라는 것이 있을까. 시쓰기에 있어서 시인이 추구하는 것은 진실, 진리의 세계이고, 그것은 일단 있는 그대로 사물의 참된 실재를 추구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플라톤이 이데아와 가상<假像>을 구별하고, 칸트가 물자체와 현상을 구별하는 식의 이론에 대한 왈가왈부는 일단 젖혀두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구약성서』 창세기 2장 19-20
시인이 사물을 직접 관찰하고 체험하는, 아담이 사물에 이름을 지어 주기 위하여 사물(피조물)을 보고 듣고 체험한 행위와 같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만물창조(창조설을 믿든 안 믿는 별문제로 하고 일단 창세기의 창조설을 상징적 의미로 수용한다)와 아담의 명명행위에 대한 창세기 이야기는 두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신의 창조 이후 아담의 이름 지어주기까지 사이로 '이름이 없었던 사물세계'(무명의 사물세계)요, 다른 하나는 아담의 '이름지어주기'(명명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이다.
첫째 문제부터 보기로 하자. 엿새 동안의 창조행위가 끝나고, 며칠 뒤에 아담이 이름을 지어주었는지, 성서는 밝히고 있지 않다. 이 문제는, 신의 창조 이후 아담의 명명 이전의 기간을 이름이 없었던 사물세계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어쨌든, 신의 창조행위가 완료한 직후의 하루만에 아담의 명명행위가 끝났다고 가정하자(하루만에 모든 사물의 명명행위가 다 끝났다고는 보기 어렵지만) 엿새 다음은 일요일이니까 하루는 휴식한 셈이고, 월요일부터 아담의 이름지어주기가 시작되었으므로, 전주의 첫째날(월요일)에 창조한 사물(빛과 어둠, 낮과 밤)은 7일간이나 이름이 없는 상태로 있은 셈이고, 둘째날(화요일)에 창조한 사물(궁창 즉 하늘,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은 6일간, 셋째날(수요일)에 창조한 사물(뭍, 바다, 풀, 채소, 과목 등)은 5일간, 넷째날에 창조한 사물(궁창의 광명, 사시와 일자와 연한, 해, 달, 별)은 4일간, 다섯째날에 창조한 사물(물고기류, 조류 등)은 3일간, 여섯째날에 창조한 사물(땅의 생물 즉 짐승, 육축, 기는 모든 동물 등)은 2일간으로 각기 이름이 없는 사물 그대로의 세계로 있었던 셈이 된다. 즉 언어 이전의 사물, 또는 언어라는 의상을 완전히 벗어버린 적나라한 사물로서, 시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로 그러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문제를 보기로 하자. 아담의 이름지어주기에 대해서, 성서는 단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세기, 2장 19절)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 더 이상 구체적 언급이 없다. 아담의 명명행위의 현장에는 명명행위의 근원인(이름을 지어 부르도록 지시한 주체) 여호와가 보고 있었고, 여호와신이 보는 앞에서 이름을 어떻게 짓는가 하는 '명명방법'은 아담에게 일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명명방법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적어도 신의 명령(지시), 신의 피조물에 대한 이름짓기, 신이 만든 인류 최초의 인간에 의한 이름지어 부르기라는 점에서, 적어도 神聖性과 神話性 및 창조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기존의 어떤 관념이나 언어도 없었으므로, 그러한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다만 신 또는 창조라는 우주적 질서와의 동화 내지 일체가 된, 主客 미분의, 그리고 사물(피조물)에 대한 신성한 외경감 같은 순수직관에 의해 이름이 지어지고 불리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어떤 관념을 설정하고 사물의 이름을 지어 부른 것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의 직접적, 구체적 체험에서의 명명행위였으리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5
이제, 鄭芝溶의 작품을 통하여 관념을 거치지 않고 사물로 직행하는 시쓰기의 한 방향을 살펴보기로 한다.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정지용, 「春雪」에서
정지용의 「春雪」의 첫연인데, 그 다음에 "우수절 들어…"라는 말이 계속된다. '우수'는 입춘과 경칩의 사이에 있고, 양력으로 2월 18일 무렵이다. 2월이면 아직도 겨울철이므로, 이 때에 내린 눈을 '춘설'이라고 할 수 있을지?…… 그러나 달력에 너무 매달리지 말고, '춘설'이라는 그때의 실제 계절감각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좋겠다.
어쨌든 겨울이 거의 다 끝난 계절이라, 눈이 내리리라고는 예상할 수 없는 절기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 창문을 열자, 그 찰나 뜻밖에도 밤새 춘설이 하얗게 덮인 먼 산봉우리가 이마에 선뜻 와 닿아 매우 차다(寒)는 것이다.('차게 느껴진다'가 아니라 바로 '차다'이다.) 단지 이것뿐이다. 그러나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문 열자"와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사이에는 단절이나 연장(延長)이 없는 찰나의 감각경험 뿐이다. 즉 동작(문 여는 것)과 풍경 및 감각(먼 산이 이마에 차라)이 연속되어, 미처 다른 생각(관념이나 사상)이 끼어 들어갈 틈이나 여유가 없다. 그래서 어떤 동작이나 사태의 찰나적 신속성을 나타내는 부사 '선뜻'이 알맞게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문 열자"는 이른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여는 동작이고, 그 찰나 간밤에 모르게 내려서 하얗게 덮인 먼 산봉우리의 봄눈이 선뜻 이마에 와 닿는 찬(寒) 감각, 그 찬 느낌이 가득 차는(滿) 촉감은, 그 자체 어떤 인생론이나 자연철학 같은 관념 세계가 아니다. 그리고 어떤 개념에 의한 조직이나 구성 같은 인위적 加工도 배제된 순간의 감각적 체험 그대로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먼 산봉우리에 내린 봄눈의 감각과, 작자인 시인이 느끼는 감각을 객관과 주관, 객체와 주체로 분리하여 구별할 수 있을까. 간밤에 내려서 덮인 산봉우리의 봄눈이 내게 차게 느껴지고, 차게 느껴지는 그 감각을 사유(思惟)하는 과정을 거쳐서 인식하고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산봉우리의 봄눈을 객체나 대상으로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이마에 선뜻 와 닿는 찰나의 감촉을 주관적 사유에 의한 인식이라고 할 수도 없다. 말하자면 '대상'과 '나' 사이에 티끌만큼의 간격이나 틈이 없다. 사물과 체험, 대상과 인식 사이의 분열이나 거리가 없다는 것은 主客未分의 상태, 언어 이전의 세계라고 할 수 없을까. 이러한 경지에서 시는 생명, 사물, 진실 그 자체의 참된 실재로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몇 대목 더 실례를 들어보자.
선뜻! 뜨인 눈에 하나 차는 영창
달이 이제 밀물처럼 밀려오다.
―정지용 , 「달」에서
프로펠러 소리
鮮姸한 커브를 돌아나갔다
―정지용, 「아침」에서
담장이
물 들고
다람쥐 꼬리
숱이 짙다
―정지용, 「毘盧峯」에서
앞에 든 「달」 「아침」 「毘盧峯」 등은 모두 관념을 거치지 않고 사물의 직접적•감각적 체험을 그대로 드러낸 것들이다. 뜨인 눈에 하나로 영창에 가득 차버리는 달빛, 선연(鮮姸)한 커브를 돌아나간 비행기의 프로펠러 소리, 물이 든 담장이, 숱이 짙은 다람쥐의 꼬리 ― 이러한 순간적•찰나적 감각체험 속에는 어떠한 사유도 분석도 판단도 끼어 들 틈이 없다. 이러한 감각체험에는,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든지, "그렇게 느꼈다"든지, 그러한 체험 후의 관념 활동이 꼬리표처럼 붙어 있지 않고, 또 "나는 이러저러한 인생관, 세계관을 가리고 사물을 본다"와 같은 관념의 선행활동도 없는 것이다. 만약에 사물의 찰나적 체험 전이나 후에 그러한 관념활동이 추가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사물의 실재를 대상이나 객관으로 생각하고, 그러한 대상이나 객관을 의식하는 '나'나 '주관'과의 대립•대응 관계가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객관과 주관, 객체와 주체, 타자와 자기의 분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 든 정지용의 사물체험에서는 전혀 그런 것을 분석해 낼 수 없다고 본다. 즉, 주객미분의 상태, 知情意 미분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언어 이전, 관념 이전, 주객분열 이전의 사물의 실재 그 현장 ― 이것이 정지용이 지향했던 시의 원점이고, 또 출발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관념으로 시를 쓰지 않고 '사물'로 시를 썼다. 정지용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한 가지 사물에 대하여 해석이 일치하지 않을 때, 우리는 서로 쟁론하고 좌단할 수는 있으나 정확한 견해는 논설 이전에서 이미 타당과 和協하고 있었던 것이요, 진리의 보루에 의거되었던 것이 오……"(「시의 옹호」). 사물에 대한 "정확한 견해"는, 관념을 거치지 않고 사물로 직행하여 체험한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고, "논설 이전에서"는 기존의 퇴적된 언어 이전, 관념 이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정지용의 말은, (1) 관념을 먼저 설정한 뒤에 사물을 끌어다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의 참된 실재를 감각적으로 직접 체험하는 사물주의, (2) 기존의 언어를 완전히 벗어버린 뒤의 발가벗은 사물 그 자체, (3) 주객미분의 사물세계 즉 사유나 사고나 분석이나 판단이 개입되지 않는 찰나적 체험 ― 이러한 특징과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정지용이 지향한 적나라한 사물과 그 현장이 그의 시의 원점이며 출발점이라면, 우리는 이 점을 매우 중시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토포스는 모든 것이 자유스러운, 즉 어떤 기존관념이나 기존 언어의 제약에서 벗어나 있고, 따라서 창조행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관념을 거치지 않는다든지, 선행 관념을 설정하지 않는다든지, 또 누적된 기존 언어에서 벗어난다는 등의 말을 했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관념•사고•분석•판단 등을 완전히 배제해 버린다는 뜻은 아니다. 주객을 버리라는 뜻도 아니다. 이 점을 곡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제로(zero) 지점과 같은 원점, 또는 출발점 즉 사물 자체의 참된 실재와 그 현장의 직접적•감각적 체험을 통해서, 그 체험을 수용하여 그 속에서 다시 관념이나 사고나 주객(主客)이 발생하는 과정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물의 참된 실재, 그 자유로운 원점의 체험이 없이,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을 추종한다든지, "나는 낭만주의자다, 근대주의자다, 모더니스트다"라고 하는 것은, 스타트 라인에까지 가지 않고 중간 지점에서 경주에 참가하는 반칙행위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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