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내면세계의 미학 본문

좁은 산책로

내면세계의 미학

연안 燕安 2013. 7. 2. 23:53

 

이 시론은 <사상계> 1966년 3월호에 발표된 시론으로서 한국 현대시에 '내면세계'라는 새로운 공간을 열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대상에서 해방된 '순수 이미지의 세계'라는 창조적 영역을 개척한 시론이다. 21세기의 한국 현대시에서 '하이퍼시' 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시론이라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 된다. 

 

내면세계의 미학

 

                                                              문 덕 수 (시인, 예술원회원)

 

 

이미지의 시대

 

현대는 이미지의 시대라고 한다. '추상예술의 모험'의 저자인 미술 평론가 미셸 라공은 말의 시대가 있은 후 기술記述의 시대를 거쳐 우리는 오늘날 새로운 시대, 즉 이마쥬의 시대에 들어섰다고 말한 바 있다. 범람하는 텔레비전, 영화, 간판, 사진 등 우리 시대의 전반을 ‘이미지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시라는 특수 분야에 한정해서 보아도 현대는 이미지의 시대임이 분명하다. 시어에는 소리, 의미, 이미지의 세 국면이 고려되어야 하는데, 이 세 국면을 고려한다면 ‘소리의 시’와 ‘의미의 시’를 거쳐 ‘이미지의 시’에 도달한 것이다. 고대와 중세의 시는 소리의 시였다. 서정시를 의미하는 Lyric이 그리스의 악기 라이어(Lyre)에서 나왔다는 점을 생각하더라도 고대의 서정시가 악기의 음률에 맞추어 노래로 불리어졌다는 것은 명백하고, 또 중세의 서정시가 음유시인들에 의하여 음송되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근대의 시는 의미의 시였다. 근대 로만주의시가 풍부한 감정과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요구하여, 형식보다는 내용편중의 방향으로 줄달음쳤다. 그래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와 같은 철학시가 나왔고, 워즈워드를 위시한 근대 로만파 시인들의 작품에서 심원한 주정적․주관적 세계를 보게 된다그러나 현대시는 이미지의 시이다. 시를 정의해서 이미지라고 하고, 시의 구조가 바로 이미지임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의 일이다. 이미지가 단지 ‘언어가 그리는 심적心的 회화’라든지, ‘유추’라든지 하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 새로운 이미지의 창조를 주장한 영미의 이미지즘 운동과,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운동은 이미지에 대한 현대적 관심의 적극적 표시라 하겠다. 그리고 1930년대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분석비평가들의 초점도 이미지의 분석에 두었던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술 운동과 비평 운동이 이미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현대적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줄 안다.  이미지의 미적 주권

 

그렇다면 이미지란 무엇인가? 즉, 우리가 탐구해 보려는 이미지는 무엇인가?이미지란 언어로서 그리는 심적 회화라고도 할 수 있고, 이미지를 그 구조상에서 본다면 유추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어로서 그리는 심적 회화라든지, ‘유추’라든지 하는 정도의 이미지는 20세기의 시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의 시에도 편재하고 있었던 것이므로, 그러한 개념정의를 새삼 문제로 삼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이미지즘 운동의 지도자였던 에즈라 파운드는 이미지를 정의하여, “일순에 시현示現하는 지적․정적 복합체”라고 하였고, 이미지즘 운동의 창시자인 T.E. 흄은 “아날로지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그 양자에 각각 뭔가를 부가하고 하나의 경이감을 부여하는 것을 찾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시에 있어서의 아날로지의 주된 작용은 흥분을 일으키는 일 점一點에 독자의 주의를 끌어 붙들고, 그리하여 불가능한 일도 이루어서 그 일 점一點을 일 행으로 바꾸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상의 말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미지스트들이 탐구한 이미지는 결코 단순한 심리회화도 아니요, 단순한 유추도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또 이 점에 이미지즘 운동의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으로 안다.초현실주의도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이미지의 정의에 만족하지 않고, 초현실주의적 변증법에 입각한 이미지의 탐구에 전력을 기울였다. 초현실주의 이론의 지도자였던 앙드레 브르통이 어느 날 밤 잠들기 직전에 ‘유리창에 둘로 절단된 한 사나이’라는 충격적인 이미지를 보았는데, 이러한 ‘초현실적 이미지’는 브르통의 말대로 인간이 두 번 다시 생각해 낼 수 없는, 아편阿片이 보여주는 이미지와 같은 것이다. 브르통은 이미지의 창조에 있어서 ‘우연’이라든지, ‘전도체(conducteur)의 전위차電位差’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는 두 말의, 말하자면 우연한 접근에서만이 어떤 특수한 빛을 자아내게 하며, 이와 같은 이미지의 번쩍임에 대해서는 우리의 눈이 한없이 민감한 것이다. 이미지의 가치는 이와 같이 해서 획득한 불꽃의 미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두 전도체傳導體 사이의 전위차에서 생기는 작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미지의 번쩍임이라든지, 두 전도체 사이의 전위차라든지 하는 말이 조금도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상과 같은 이미지 정의는 브르통 이전에도 들어 본 적이 없었고, 또 브르통 이후에도 들어 본 일이 없다. 시사상詩史上에 있어서의 초현실주의의 참된 의의는 말하자면 초현실적 이미지의 탐구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현실주의 이론이 갖는 변증법적 우주론, 무의식의 영역의 발견과 중시, 상상력의 무한한 확대, 오토마티즘 등도 따지고 보면 초현실적 이미지의 탐구를 위한 방법이요, 배경적 이론에 지나지 않다.나는 시사상詩史上에 있어서 오늘이야말로 이미지의 미적 주관시대라고 말하고 싶다. 이미지가 시에 있어서의 모든 미의 주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20세기의 모든 전위 예술 운동의 중심 과제가 이미지의 추구였다는 점과, 그러한 운동이 성취한 이미지의 순수한 가치면에서 볼 때 조금도 과장된 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주권이라는 말은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주된 권리’라는 의미의 정치 용어이다. 우리가 국가주권이라고 말할 때 그것을 대내, 대외의 양면에서 보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적 주권美的主權’의 경우에도 그렇다. 시 자체의 내적 면에서 이미지를 본다면, 그것은 시의 구조의 핵심이며, 또 시의 본질 그 자체이며, 시가 갖는 모든 미감美感의 결정권을 의미한다. 그러나 시의 외적 면에서 본다면, 대상과 주제(주제는 시의 내부에도 있고 외부에도 있다)에 관련이 없는 순수한 자주성自主性을 의미한다. 나는 특히 후자를 강조하고 싶다. 말하자면, 이미지는 어떤 객관적 대상을 가질 필요가 없고, 또 반드시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질 필요도 없다고 본다. 엄격한 의미에서, ‘순수 이미지’란 객관적 대상도 없고, 개념으로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것만으로서 충분하고, 그 밖에 이미지가 지시하는 객관적 대상을 찾는다든지, 이미지가 내포하는 철학적․인생론적 관념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미지를 불순케 하는 심리적 과욕이라고 생각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이다.

 

대상에서의 해방

 

지금까지의 우리 시는 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상이 있는 시요, 대상의 존재에서만이 그 존재가 가능한 시였다. 그 대상이 자연이건 사회 현상이건, 또 순전히 관념이건 간에, 대상이 없는 시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소나무, 포플러, 장미, 하늘, 구름, 대지, 강물 등의 이미지가 나오면, 그것들은 곧 시 바깥에 있는 세계의 대상과 연상이 되고 결부된다. 그래서 이 시는 장미를 노래한 시라든지, 저 시는 하늘을 노래한 시라든지 하는 등의 대상이 지적된다. 교통 사고, 전쟁, 혁명, 데모, 시장 풍경 등의 사회현실을 노래한 경우도 마찬가지이고, 또 이별, 희망, 소원 등의 관념을 대상으로 노래한 경우도 마찬가지였다.시가 시 밖의 객관 세계와의 달갑지 않은 주종관계主從關係, 예속 관계가 성립되면, 시 자체의 순수한 자주성이 없어지게 된다. 생각해 보라! 시가 ‘무엇’을 노래했다고 한다면, 그 ‘무엇’이라는 대상이 시에 앞서서 객관적으로 존재해야만 시가 존재할 수 있고, 그 ‘무엇’이라는 대상이 갖는 형태, 빛깔, 의미 등에 의하여 시의 내용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시는 그 무엇을 닮거나 흉내를 내게 되니, 시의 자주성은 객관 세계의 대상 앞에 완전히 무색하게 되고, 객관 세계의 대상에 예속하는 관계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불명예스러운 관계는 회화의 경우를 예로 들면 더욱 명백해진다. 자연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데 시종 충실하는 사실주의 회화는 자연이나 그 대용물인 모델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회화의 운명은 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예술을 ‘모방기술模倣技術’이라고 말하고, 시를 ‘자연의 모방’이라고 말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모방에 관한 논의는 플라톤의 <공화국>에서도 전개되었다. 몇 세기를 두고 그 위력을 변함없이 발휘해 온 이 고전적 명제와, 19세기의 근대적 리얼리즘을 우리는 맹목적으로 묵수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제 이 고전적 명제와, 19세기의 리얼리즘에 치명적인 일타를 가하고, 객관적 대상과의 주종 관계를 완전히 끊음으로써 시의 이미지의 미적 주권을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신이여, 모델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소서” 하고 열렬히 기도한 화가가 있었고, 또 “내 그림이 자연自然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자연이 내 그림을 모방했다”고 말한 화가가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화가들의 이러한 반고전적, 반자연적 발언 속에 대상을 거부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려는 강렬한 충동이 얼마나 꿈틀거리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으리라. 사실 20세기 전반의 유럽을 휩쓴 각종 모더니즘 예술 운동은 대상에서의 해방 운동이었으며, 이미지의 미적 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혈투였다고도 볼 수 있다. 시와 회화에 있어서, 대상과 거리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인상주의 이후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사물의 묘사에 충실했던 사실주의에 반하여, 인상주의는 대상 그 자체의 충실한 묘사보다는 대상에서 받은 인상과 분위기에 중점을 둠으로써 예술의 주관화․내면화의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상주의 회화도 객관적 대상에서 완전히 절연된 것은 아니었다. 인상주의 회화는 색채 자체가 풍기는 분위기를 중시한 것은 사실이나, 그 색채도 대상의 광선적光線的 반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야수파는 고갱과 고흐의 수법을 이어받아, 이것을 더욱 발전시켜, 마침내 대상과는 관계가 없는 색채 자체의 독자적 가치를 발견하였고, 그 직접적인 효과를 대담무쌍하게 표현했다. 그들이 적․흑․녹과 같은 색도 높은 원색을 좋아했던 것은 객관 세계의 속박에서 해방된 인간의 감정적 본능을 그것이 노출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대상을 무시하고 색채 자체의 가치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야수파가 현대 예술의 발전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또 한편, 큐비즘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세잔느의 영향을 받은 입체파立體派 화가들은 자연의 수많은 형태를 몇 개의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추상․변형시킴으로써, 대상 그것의 충실한 표현에 반기를 들었다. 이렇게 되면 이미지는 단순히 자연의 사물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고, 그 대상을 분석․해체하여 다시 구성하게 되는 과정을 밟게 되며, 그 결과 종국적으로는 대상과의 직접적 관계를 끊게 된다. 그러나 입체파의 회화에 있어서, 설령 대상을 샅샅이 분석하고 해체하여 재구성하는 심한 메타모르포즈가 있었다 할지라도 완전히 대상과의 관계를 끊은 것은 아니고, 대상의 본질을 추상적으로 추구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입체파의 회화에 있어서도 여전히 대상과의 관계가 있었고, 또 객관성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대상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이미지의 순수성을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추상주의와 초현실주의였다. 특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이론을 도입하여 그것을 배경으로 삼고, 무의식이라는 새로운 이미지의 영역을 개척하고, 그 기술방법으로서 오토마티즘을 발명한 초현실주의는 시를 내면세계로 전회시키고 말았다. 물론 초현실주의는 현실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꿈과 현실을 지양하는 변증법적 방법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이 무의식의 세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시의 새로운 영역으로 삼았다는 것은 현대시를 내면화하고, 이미지에서 객관적 대상을 끊어 버린 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외면세계와 내면세계

 

시는 인간의 심리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모든 시는 내면세계의 시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렇게 본다면, 이 세상에 있어서 모든 시는 내면세계의 시 아닌 것이 없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것은 내면세계와 외면세계의 근본적 차이를 모르는 데서 오는 그릇된 견해에 지나지 않다.내면세계와 외면세계에 관해서는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손쉬운 예로서 ‘꿈’과 ‘현실’과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된다. 우리는 수면 중 꿈 속에서 날개가 돋혀 새처럼 공중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날개가 있다는 것도 현실의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요, 더구나 새처럼 하늘을 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데, 이러한 현실과는 반대로 꿈 속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없다. 꿈은 현실의 모든 속박을, 모든 장벽을 완전히 허물어뜨리고 만다. 그러기에 꿈의 세계, 즉 내면세계는 외면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반대 세계임을 알게 될 것이다.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는 자기의 형이 상자 속에 있는 것을 꿈에 보았다는 대목이 있다. ‘상자’는 ‘금고金庫’를 연상하게 되므로, 이 경우의 꿈은 형이 절약가임을 의미하지만, 그러한 개념적 해석의 정오正誤 여부는 둘째로 하고, 사람이 상자 속에 들어 앉아 살고 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꿈 속에서는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어半人半魚의 여신, 인두人頭의 해사海蛇, 용, 봉황, 반인반마의 괴물, 새처럼 날아다니는 양의 다리와 뿔이 난 목신牧神, 가락국의 건국 신화 등도 모두 꿈의 세계를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다.외면세계에 있어서, 우리를 제약하는 두 가지 조건은 ‘공간’과 ‘시간’이다. 우리가 여행한다든지 누구와 만난다든지 할 때, 반드시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게 마련이다. 곳과 때, 어느 장소, 어느 때라는 이 두 조건을 벗어나서는 외면세계에 있어서의 생활은 불가능하다. 외면세계의 기본 구조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두 개의 질서로 형성되어 있다.우선 공간 질서부터 보기로 하자. 먼 사물은 작게 보이고, 가까운 사물은 크게 보인다. 이것이 상식화되어 있는 원근법이다. 외면세계에서는 동서남북의 방위가 결정되어 있다. 동이 서가 되고, 남이 북이 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내면세계에서는 이러한 원근법과 방위 감각이 적용되지 않는다. 내면세계에 있어서는 먼 사물이 가까운 사물보다 더 크게 보일 수도 있고, 동이 서로 뒤바뀔 수도 있으니까. 내면세계의 공간은 외면세계의 공간 질서를 완전히 붕괴시켜 버린다. 내면세계의 공간은 애너키즘 상태에 있다고 하겠다. 시간 질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외면세계의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라는 기계적인 일방적 방향으로 진행한다. 이것은 어길 수 없는 객관적․자연적 법칙이다. 그런데 내면세계에 있어서는 이러한 시간의 진행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래에서 과거로 역행할 수도 있고, 또 과거에서 현재를 거치지 않고 미래로 뛰어 넘어 직행할 수도 있다. 다방에서 애인과 커피를 마시다가, 그 커피 빛깔에서 문득 낙엽을 연상하게 된다. 그 낙엽은 몇 년 전 B라는 친구와 금강산에 관광 여행을 한 사실을 연상하게 되고, 또 그 낙엽의 빛은 초등학교에 다닐 때 교정에서 벗들과 싸우다 흘린 비혈鼻血을 연상하게 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심리적 연상은 시간의 역순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이러한 시간의 의식에서 의식의 흐름의 수법이 발생하는 것이다. 프루스트, 조이스, 포크너 등의 현대 심리주의 소설가들의 수법은 이러한 내면세계의 시간 질서에 근거를 두고 있음은 두말 할 필요조차 없다.외면세계와 내면세계의 이와 같은 차이는 시의 구조에도 커다란 변혁을 가져오게 한다. 시가 외면세계에 의존하고 있는 이상, 외면세계의 구조가 그대로 시에 반영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외면 세계의 속박을 끊고 내면세계로 옮기면, 외면세계의 합리적 구조를 벗어나게 되고, 따라서 비합리적인 내면세계의 구조를 반영하게 된다. 이와 같은 구조의 차이를 의식의 측면에서 본다면 ‘의식의 구조’ 와 ‘무의식의 구조’로 구분될 것이다. 외면세계의 대상에 의존했던 지금까지의 우리 시는 말하자면 의식의 구조의 산물이었지, 무의식의 구조의 산물은 아니었다. 물론 내면세계의 시라 할자라도 무의식과 의식, 꿈과 현실의 통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무의식이라는 광활한 영역이 의식의 기초 세계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구조의 아나키즘적 성격을 일단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에필로그

 

원시인은 태양을 톱니바퀴의 형태로 그렸다. 우리의 조상도 단군신화를 비롯한 많은 신화적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불교와 도교의 세계는 환상적이긴 하나 실재성이 있는 무진장의 이미지가 있는 줄로 안다. 우리는 섭섭하게도 ‘용’, ‘봉황鳳凰’ 등에 해당할 만한 상상적 동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꿈조차 없다. 우리는 원시인에 비해서 너무도 합리적인 세계에만 살고 있고, 또 원시인이 가졌던 것과 같은 건강한 꿈과 강렬한 상상력에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조건하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꿈과 무의식의 세계에 눈을 돌려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 주력해야 하겠다. 비단 과거의 이미지를 메타모르포즈하여 현대화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이미지의 창조에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현재 한국시의 한 경향이 내면화의 방향으로 전회하면서, 내면세계의 구조가 요구하는 방법을 확립하고, 순수 이미지의 창조에 노력하고 있음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사상계 14권 3호, 통권 157호, 1966. 3>

 

 

 

 

이 시론은 <사상계> 1966년 3월호에 발표된 시론으로서 한국 현대시에 '내면세계'라는 새로운 공간을 열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대상에서 해방된 '순수 이미지의 세계'라는 창조적 영역을 개척한 시론이다. 21세기의 한국 현대시에서 '하이퍼시' 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시론이라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 된다. 

 

내면세계의 미학

 

                                                              문 덕 수 (시인, 예술원회원)

 

 

이미지의 시대

 

현대는 이미지의 시대라고 한다. '추상예술의 모험'의 저자인 미술 평론가 미셸 라공은 말의 시대가 있은 후 기술記述의 시대를 거쳐 우리는 오늘날 새로운 시대, 즉 이마쥬의 시대에 들어섰다고 말한 바 있다. 범람하는 텔레비전, 영화, 간판, 사진 등 우리 시대의 전반을 ‘이미지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시라는 특수 분야에 한정해서 보아도 현대는 이미지의 시대임이 분명하다. 시어에는 소리, 의미, 이미지의 세 국면이 고려되어야 하는데, 이 세 국면을 고려한다면 ‘소리의 시’와 ‘의미의 시’를 거쳐 ‘이미지의 시’에 도달한 것이다. 고대와 중세의 시는 소리의 시였다. 서정시를 의미하는 Lyric이 그리스의 악기 라이어(Lyre)에서 나왔다는 점을 생각하더라도 고대의 서정시가 악기의 음률에 맞추어 노래로 불리어졌다는 것은 명백하고, 또 중세의 서정시가 음유시인들에 의하여 음송되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근대의 시는 의미의 시였다. 근대 로만주의시가 풍부한 감정과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요구하여, 형식보다는 내용편중의 방향으로 줄달음쳤다. 그래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와 같은 철학시가 나왔고, 워즈워드를 위시한 근대 로만파 시인들의 작품에서 심원한 주정적․주관적 세계를 보게 된다
그러나 현대시는 이미지의 시이다. 시를 정의해서 이미지라고 하고, 시의 구조가 바로 이미지임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의 일이다. 이미지가 단지 ‘언어가 그리는 심적心的 회화’라든지, ‘유추’라든지 하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 새로운 이미지의 창조를 주장한 영미의 이미지즘 운동과,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운동은 이미지에 대한 현대적 관심의 적극적 표시라 하겠다. 그리고 1930년대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분석비평가들의 초점도 이미지의 분석에 두었던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술 운동과 비평 운동이 이미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현대적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줄 안다.
 
이미지의 미적 주권

 

그렇다면 이미지란 무엇인가? 즉, 우리가 탐구해 보려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이미지란 언어로서 그리는 심적 회화라고도 할 수 있고, 이미지를 그 구조상에서 본다면 유추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어로서 그리는 심적 회화라든지, ‘유추’라든지 하는 정도의 이미지는 20세기의 시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의 시에도 편재하고 있었던 것이므로, 그러한 개념정의를 새삼 문제로 삼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이미지즘 운동의 지도자였던 에즈라 파운드는 이미지를 정의하여, “일순에 시현示現하는 지적․정적 복합체”라고 하였고, 이미지즘 운동의 창시자인 T.E. 흄은 “아날로지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그 양자에 각각 뭔가를 부가하고 하나의 경이감을 부여하는 것을 찾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시에 있어서의 아날로지의 주된 작용은 흥분을 일으키는 일 점一點에 독자의 주의를 끌어 붙들고, 그리하여 불가능한 일도 이루어서 그 일 점一點을 일 행으로 바꾸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상의 말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미지스트들이 탐구한 이미지는 결코 단순한 심리회화도 아니요, 단순한 유추도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또 이 점에 이미지즘 운동의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으로 안다.
초현실주의도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이미지의 정의에 만족하지 않고, 초현실주의적 변증법에 입각한 이미지의 탐구에 전력을 기울였다. 초현실주의 이론의 지도자였던 앙드레 브르통이 어느 날 밤 잠들기 직전에 ‘유리창에 둘로 절단된 한 사나이’라는 충격적인 이미지를 보았는데, 이러한 ‘초현실적 이미지’는 브르통의 말대로 인간이 두 번 다시 생각해 낼 수 없는, 아편阿片이 보여주는 이미지와 같은 것이다. 브르통은 이미지의 창조에 있어서 ‘우연’이라든지, ‘전도체(conducteur)의 전위차電位差’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는 두 말의, 말하자면 우연한 접근에서만이 어떤 특수한 빛을 자아내게 하며, 이와 같은 이미지의 번쩍임에 대해서는 우리의 눈이 한없이 민감한 것이다. 이미지의 가치는 이와 같이 해서 획득한 불꽃의 미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두 전도체傳導體 사이의 전위차에서 생기는 작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미지의 번쩍임이라든지, 두 전도체 사이의 전위차라든지 하는 말이 조금도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상과 같은 이미지 정의는 브르통 이전에도 들어 본 적이 없었고, 또 브르통 이후에도 들어 본 일이 없다. 시사상詩史上에 있어서의 초현실주의의 참된 의의는 말하자면 초현실적 이미지의 탐구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현실주의 이론이 갖는 변증법적 우주론, 무의식의 영역의 발견과 중시, 상상력의 무한한 확대, 오토마티즘 등도 따지고 보면 초현실적 이미지의 탐구를 위한 방법이요, 배경적 이론에 지나지 않다.
나는 시사상詩史上에 있어서 오늘이야말로 이미지의 미적 주관시대라고 말하고 싶다. 이미지가 시에 있어서의 모든 미의 주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20세기의 모든 전위 예술 운동의 중심 과제가 이미지의 추구였다는 점과, 그러한 운동이 성취한 이미지의 순수한 가치면에서 볼 때 조금도 과장된 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
주권이라는 말은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주된 권리’라는 의미의 정치 용어이다. 우리가 국가주권이라고 말할 때 그것을 대내, 대외의 양면에서 보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적 주권美的主權’의 경우에도 그렇다. 시 자체의 내적 면에서 이미지를 본다면, 그것은 시의 구조의 핵심이며, 또 시의 본질 그 자체이며, 시가 갖는 모든 미감美感의 결정권을 의미한다. 그러나 시의 외적 면에서 본다면, 대상과 주제(주제는 시의 내부에도 있고 외부에도 있다)에 관련이 없는 순수한 자주성自主性을 의미한다. 나는 특히 후자를 강조하고 싶다. 말하자면, 이미지는 어떤 객관적 대상을 가질 필요가 없고, 또 반드시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질 필요도 없다고 본다. 엄격한 의미에서, ‘순수 이미지’란 객관적 대상도 없고, 개념으로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것만으로서 충분하고, 그 밖에 이미지가 지시하는 객관적 대상을 찾는다든지, 이미지가 내포하는 철학적․인생론적 관념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미지를 불순케 하는 심리적 과욕이라고 생각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이다.

 

대상에서의 해방

 

지금까지의 우리 시는 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상이 있는 시요, 대상의 존재에서만이 그 존재가 가능한 시였다. 그 대상이 자연이건 사회 현상이건, 또 순전히 관념이건 간에, 대상이 없는 시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소나무, 포플러, 장미, 하늘, 구름, 대지, 강물 등의 이미지가 나오면, 그것들은 곧 시 바깥에 있는 세계의 대상과 연상이 되고 결부된다. 그래서 이 시는 장미를 노래한 시라든지, 저 시는 하늘을 노래한 시라든지 하는 등의 대상이 지적된다. 교통 사고, 전쟁, 혁명, 데모, 시장 풍경 등의 사회현실을 노래한 경우도 마찬가지이고, 또 이별, 희망, 소원 등의 관념을 대상으로 노래한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시가 시 밖의 객관 세계와의 달갑지 않은 주종관계主從關係, 예속 관계가 성립되면, 시 자체의 순수한 자주성이 없어지게 된다. 생각해 보라! 시가 ‘무엇’을 노래했다고 한다면, 그 ‘무엇’이라는 대상이 시에 앞서서 객관적으로 존재해야만 시가 존재할 수 있고, 그 ‘무엇’이라는 대상이 갖는 형태, 빛깔, 의미 등에 의하여 시의 내용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시는 그 무엇을 닮거나 흉내를 내게 되니, 시의 자주성은 객관 세계의 대상 앞에 완전히 무색하게 되고, 객관 세계의 대상에 예속하는 관계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불명예스러운 관계는 회화의 경우를 예로 들면 더욱 명백해진다. 자연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데 시종 충실하는 사실주의 회화는 자연이나 그 대용물인 모델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회화의 운명은 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술을 ‘모방기술模倣技術’이라고 말하고, 시를 ‘자연의 모방’이라고 말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모방에 관한 논의는 플라톤의 <공화국>에서도 전개되었다. 몇 세기를 두고 그 위력을 변함없이 발휘해 온 이 고전적 명제와, 19세기의 근대적 리얼리즘을 우리는 맹목적으로 묵수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제 이 고전적 명제와, 19세기의 리얼리즘에 치명적인 일타를 가하고, 객관적 대상과의 주종 관계를 완전히 끊음으로써 시의 이미지의 미적 주권을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신이여, 모델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소서” 하고 열렬히 기도한 화가가 있었고, 또 “내 그림이 자연自然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자연이 내 그림을 모방했다”고 말한 화가가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화가들의 이러한 반고전적, 반자연적 발언 속에 대상을 거부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려는 강렬한 충동이 얼마나 꿈틀거리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으리라.
사실 20세기 전반의 유럽을 휩쓴 각종 모더니즘 예술 운동은 대상에서의 해방 운동이었으며, 이미지의 미적 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혈투였다고도 볼 수 있다. 시와 회화에 있어서, 대상과 거리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인상주의 이후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사물의 묘사에 충실했던 사실주의에 반하여, 인상주의는 대상 그 자체의 충실한 묘사보다는 대상에서 받은 인상과 분위기에 중점을 둠으로써 예술의 주관화․내면화의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상주의 회화도 객관적 대상에서 완전히 절연된 것은 아니었다. 인상주의 회화는 색채 자체가 풍기는 분위기를 중시한 것은 사실이나, 그 색채도 대상의 광선적光線的 반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야수파는 고갱과 고흐의 수법을 이어받아, 이것을 더욱 발전시켜, 마침내 대상과는 관계가 없는 색채 자체의 독자적 가치를 발견하였고, 그 직접적인 효과를 대담무쌍하게 표현했다. 그들이 적․흑․녹과 같은 색도 높은 원색을 좋아했던 것은 객관 세계의 속박에서 해방된 인간의 감정적 본능을 그것이 노출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대상을 무시하고 색채 자체의 가치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야수파가 현대 예술의 발전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한편, 큐비즘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세잔느의 영향을 받은 입체파立體派 화가들은 자연의 수많은 형태를 몇 개의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추상․변형시킴으로써, 대상 그것의 충실한 표현에 반기를 들었다. 이렇게 되면 이미지는 단순히 자연의 사물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고, 그 대상을 분석․해체하여 다시 구성하게 되는 과정을 밟게 되며, 그 결과 종국적으로는 대상과의 직접적 관계를 끊게 된다. 그러나 입체파의 회화에 있어서, 설령 대상을 샅샅이 분석하고 해체하여 재구성하는 심한 메타모르포즈가 있었다 할지라도 완전히 대상과의 관계를 끊은 것은 아니고, 대상의 본질을 추상적으로 추구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입체파의 회화에 있어서도 여전히 대상과의 관계가 있었고, 또 객관성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대상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이미지의 순수성을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추상주의와 초현실주의였다. 특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이론을 도입하여 그것을 배경으로 삼고, 무의식이라는 새로운 이미지의 영역을 개척하고, 그 기술방법으로서 오토마티즘을 발명한 초현실주의는 시를 내면세계로 전회시키고 말았다. 물론 초현실주의는 현실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꿈과 현실을 지양하는 변증법적 방법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이 무의식의 세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시의 새로운 영역으로 삼았다는 것은 현대시를 내면화하고, 이미지에서 객관적 대상을 끊어 버린 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외면세계와 내면세계

 

시는 인간의 심리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모든 시는 내면세계의 시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렇게 본다면, 이 세상에 있어서 모든 시는 내면세계의 시 아닌 것이 없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것은 내면세계와 외면세계의 근본적 차이를 모르는 데서 오는 그릇된 견해에 지나지 않다.
내면세계와 외면세계에 관해서는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손쉬운 예로서 ‘꿈’과 ‘현실’과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된다. 우리는 수면 중 꿈 속에서 날개가 돋혀 새처럼 공중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날개가 있다는 것도 현실의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요, 더구나 새처럼 하늘을 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데, 이러한 현실과는 반대로 꿈 속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없다. 꿈은 현실의 모든 속박을, 모든 장벽을 완전히 허물어뜨리고 만다. 그러기에 꿈의 세계, 즉 내면세계는 외면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반대 세계임을 알게 될 것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는 자기의 형이 상자 속에 있는 것을 꿈에 보았다는 대목이 있다. ‘상자’는 ‘금고金庫’를 연상하게 되므로, 이 경우의 꿈은 형이 절약가임을 의미하지만, 그러한 개념적 해석의 정오正誤 여부는 둘째로 하고, 사람이 상자 속에 들어 앉아 살고 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꿈 속에서는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어半人半魚의 여신, 인두人頭의 해사海蛇, 용, 봉황, 반인반마의 괴물, 새처럼 날아다니는 양의 다리와 뿔이 난 목신牧神, 가락국의 건국 신화 등도 모두 꿈의 세계를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다.
외면세계에 있어서, 우리를 제약하는 두 가지 조건은 ‘공간’과 ‘시간’이다. 우리가 여행한다든지 누구와 만난다든지 할 때, 반드시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게 마련이다. 곳과 때, 어느 장소, 어느 때라는 이 두 조건을 벗어나서는 외면세계에 있어서의 생활은 불가능하다. 외면세계의 기본 구조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두 개의 질서로 형성되어 있다.
우선 공간 질서부터 보기로 하자. 먼 사물은 작게 보이고, 가까운 사물은 크게 보인다. 이것이 상식화되어 있는 원근법이다. 외면세계에서는 동서남북의 방위가 결정되어 있다. 동이 서가 되고, 남이 북이 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내면세계에서는 이러한 원근법과 방위 감각이 적용되지 않는다. 내면세계에 있어서는 먼 사물이 가까운 사물보다 더 크게 보일 수도 있고, 동이 서로 뒤바뀔 수도 있으니까. 내면세계의 공간은 외면세계의 공간 질서를 완전히 붕괴시켜 버린다. 내면세계의 공간은 애너키즘 상태에 있다고 하겠다.
시간 질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외면세계의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라는 기계적인 일방적 방향으로 진행한다. 이것은 어길 수 없는 객관적․자연적 법칙이다. 그런데 내면세계에 있어서는 이러한 시간의 진행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래에서 과거로 역행할 수도 있고, 또 과거에서 현재를 거치지 않고 미래로 뛰어 넘어 직행할 수도 있다. 다방에서 애인과 커피를 마시다가, 그 커피 빛깔에서 문득 낙엽을 연상하게 된다. 그 낙엽은 몇 년 전 B라는 친구와 금강산에 관광 여행을 한 사실을 연상하게 되고, 또 그 낙엽의 빛은 초등학교에 다닐 때 교정에서 벗들과 싸우다 흘린 비혈鼻血을 연상하게 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심리적 연상은 시간의 역순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이러한 시간의 의식에서 의식의 흐름의 수법이 발생하는 것이다. 프루스트, 조이스, 포크너 등의 현대 심리주의 소설가들의 수법은 이러한 내면세계의 시간 질서에 근거를 두고 있음은 두말 할 필요조차 없다.
외면세계와 내면세계의 이와 같은 차이는 시의 구조에도 커다란 변혁을 가져오게 한다. 시가 외면세계에 의존하고 있는 이상, 외면세계의 구조가 그대로 시에 반영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외면 세계의 속박을 끊고 내면세계로 옮기면, 외면세계의 합리적 구조를 벗어나게 되고, 따라서 비합리적인 내면세계의 구조를 반영하게 된다. 이와 같은 구조의 차이를 의식의 측면에서 본다면 ‘의식의 구조’ 와 ‘무의식의 구조’로 구분될 것이다. 외면세계의 대상에 의존했던 지금까지의 우리 시는 말하자면 의식의 구조의 산물이었지, 무의식의 구조의 산물은 아니었다. 물론 내면세계의 시라 할자라도 무의식과 의식, 꿈과 현실의 통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무의식이라는 광활한 영역이 의식의 기초 세계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구조의 아나키즘적 성격을 일단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에필로그

 

원시인은 태양을 톱니바퀴의 형태로 그렸다. 우리의 조상도 단군신화를 비롯한 많은 신화적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불교와 도교의 세계는 환상적이긴 하나 실재성이 있는 무진장의 이미지가 있는 줄로 안다. 우리는 섭섭하게도 ‘용’, ‘봉황鳳凰’ 등에 해당할 만한 상상적 동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꿈조차 없다. 우리는 원시인에 비해서 너무도 합리적인 세계에만 살고 있고, 또 원시인이 가졌던 것과 같은 건강한 꿈과 강렬한 상상력에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조건하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꿈과 무의식의 세계에 눈을 돌려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 주력해야 하겠다. 비단 과거의 이미지를 메타모르포즈하여 현대화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이미지의 창조에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현재 한국시의 한 경향이 내면화의 방향으로 전회하면서, 내면세계의 구조가 요구하는 방법을 확립하고, 순수 이미지의 창조에 노력하고 있음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사상계 14권 3호, 통권 157호, 1966. 3>

   [이슈의 숲길]   

 

          종이 하이퍼텍스트와 전자 하이퍼텍스트

 


                                                      

                                                               문 덕 수(시인, 예술원회원) 

 

다음의 글은  '하이퍼택스트 지향의 동인지' 대담( 월간『시문학』4월호, 2008년 )에 붙이고 있는 문덕수시인의 ‘종이 하이퍼텍스트와 전자 하이퍼텍스트’이다.

 

종이 위에 쓴 하이퍼텍스트와 인터넷이나 TV 모니터에 비친 하이퍼텍스트(전자 하이퍼텍스트)는 원리 면에서는 본질적으로 같으나, 일단 구별해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터넷이나 TV 화면의 세계를 가상공간(假想空間)이라고 말합니다. 흔히 사이버 세계 또는 ‘버추얼’(virtual) 세계라고도 말합니다. 하이퍼텍스트는 이 버추얼세계에서 결합되는 이미지, 텍스트, 음성이 합성된 네트워크를 말합니다.

 

(1)종이 위에 글자로 씌어진 시의 언어는 버추얼화(virtual化)된 언어라고 합니다. 흔히 버추얼 리얼리티(virtual reality)를 ‘가상현실’이라고 번역합니다만, 종이에 씌어진 시의 언어도 버추얼 리얼리티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원을 산책하다가 미끈하게 잘 성장한 적송 소나무를 보고, 그것을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마음속에 떠올린다고 가정합시다. 이것은 분명히 ‘기억’입니다만, ‘기억’이라고 해도 좋고, ‘회상’이라고 해도 좋고, ‘재생(再生) 이미지’라고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또 소나무가 아닌 산수유꽃이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어쨌든, 소나무나 산수유꽃은 언어화(기호화) 하여 기억해 둔 것을 다시 상상하여 떠올린 것입니다. 시인은 언어화 하여 기억해 둔 이러한 여러 가지 자원을 소재로 하여 시작품을 쓰고 있음은 이미 여러분들께서 잘 알고 있고, 또 늘 경험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기억해 낸 ‘소나무’나 ‘산수유꽃’은 어제 공원이나 길가에서 보고 인식한 그대로의 소나무나 산수유꽃이 아니라, 즉 실재(實在)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그것을 의식 속에 대리해서 떠올려 나타내는 이미지이거나(이때의 이미지를 철학에서는 表象 representation이라고도 합니다.) 가상현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즉 현실이 소멸된 이미지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흔히 심상(image)라고 말하지요. 심상은 현실에 있는 사물의 모습 그대로라고(즉 사물 자체) 할 수 없으나, 그 사물을 가리키는 어떤 관련성은 있습니다. 대상에 관련되는 사실을 가리키는 성질을 ‘지향성’이라고 하고, 지향성이 가리키는 바깥의 대상을 지향대상(指向對象, referent)이라고 합니다. 시는 언어예술이면서도 언어를 넘어선다고 하는 주장(문덕수 지음 『오늘의 詩作法』, 시문학사, 2004)도 언어가 가지는 지향대상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한 것입니다. 둘째, 기억해 둔 언어기호를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끄집어내어 되풀이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끄집어내어 되풀이할 때마다 언어기호가 가지는 법칙에 따라서 조금 다르게 현세화(顯勢化) 또는 현실화하는 것입니다. 소나무나 산수유꽃이라는 사물이 언어에 잠세된 모양(潛勢態라고도 함)으로 그것의 원래 지위를 바꾸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언어의 잠세태로 전위(轉位)하는 것인데, 이것을 언어의 버추얼화(化)라고도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한다면 인터넷이나 TV 등의 IT기기가 탄생되기 이전에 이미 언어 자체에도 버추얼화의 성질이 있었다고 보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상(李箱)의 시나, 60년대 시집 『선.공간』(문덕수 지음, 성문각, 1966)의 수록 작품을 하이퍼텍스트 시의 남상이나 선구작(오남구 시인이 이상옥과의 대담에서 문덕수의 시를 하이퍼텍스트의 선구작으로 거론함.)으로 거론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언어의 이러한 버추얼 기능에서 가능한 것이라고 봅니다.

 

(2)그런데, 문제는 예상하는 만큼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가령 “작난감 신부에게 내가 바늘을 주면 작난감 신부는 아무것이나 막 찌른다”(이상, 「I WED A TOY BRIDE」의 2)의 경우, “작난감신부”는 생명이 없는 작난감이므로 ‘찌르는 현실적 동작’은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가상세계에는 얼마든지 가능한 동작입니다. “白紙 위에 한 줄기 鐵路가 깔려 있다”(이상,「距離」)의 경우에도,‘백지’(白紙)라는 언어화된 세계가 있고(즉 버추얼화된 언어가 있고), 다시 그 ‘백지 위에 깔려 있는 철로’라는, 버추얼 세계에서만 가능한 이미지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백지 위에 깔려 있는 철로’라는 언어 기호를 그대로 한꺼번에 기억한 단일한 의미 체험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의 시나, 그 후의 이 계열의 실험시는 모두 이와 같이 이중(二重)의 버추얼화한 현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즉 버추얼화가 겹쳐 있는 복합적 특성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3)컴퓨터에서는 입력 때 이미지, 문자, 소리(음성) 등이 모두 이진법(二進法:0,1)이나 화소(畵素) 인공기호(컴퓨터 언어)로 바뀌게 되고, 출력시에는 화상, 언어, 음성이 합성되어 다시 ‘자연기호’로 바뀌어 화면(모니터)에 나타나게 됩니다. 자연기호로 바뀌게 된다고 했지만, 지향대상(즉 사물), 언어, 음성 등을 다시 인공적으로 만들어내는데, 이러한 변화를 기호의 ‘시뮬레이션’(simulation)이라고 합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세계나 사물, 어느 곳에도 볼 수 없는 인간의 얼굴, 누가 지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이야기나 음성 등을 마음대로 합성하여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컴퓨터의 공간 안에서 컴퓨터 언어로 전위(轉位)되고 합성되어, 그 인공기호로 다시 시청자가 시청할 수 있는 현실세계로 시뮬레이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컴퓨터라는 버추얼세계의 원리입니다.

 

컴퓨터의 인공언어(이진법과 화소 등)가 합성해서 만들어내는 이러한 버추얼 리얼리티(가상현실)의 원리는 시쓰는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시사(示唆)를 던져줍니다. 그것은 교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원고지 위에 우리가 쓰는 언어기호에도 이러한 버추얼 리얼리티의 원리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컴퓨터의 인공언어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은 지향대상(작품의 바깥에 있는 현실의 어떤 세계나 사물)을 시뮬레이트해서, 즉 허구적으로 구성해서 우리에게 보고 듣게 해주는 것과 같이, 우리가 쓰는 언어도 컴퓨터의 인공언어처럼 가상현실을 창조하고, 그리고 그 ‘가상현실’은 흔히 우리는 ‘이미지’라고 부르고 있는 그런 세계를 우리에게 체험하도록 해 줍니다.

 

물론 디지털 기술에 의해서 인공언어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컴퓨터의 인공언어(인공기호)가 형성한 커뮤니케이션 공간을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電腦空間. 컴퓨터의 네트워크로 맺어진 가상세계)라고 말한다는 것은 여러분들께서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사이버스페이스 안에서 의미세계가 어떻게 변용되고 있는가를, 그 변용의 여러 가지 방법을 안다는 것은, 그대로 종이 위에 쓰는 하이퍼텍스트 시 쓰기에 직결되는 것입니다. 디지털 기술에 의한 컴퓨터 공간에서의 의미 변용에는 ‘인터페이스’(interface:화면의 ‘접촉면’을 의미하나, 특히 유서(user)가 직접 접촉하는 면을 의미함), ‘인터랙티비티’(interactivity:쌍방향 대화 또는 상호작용성), 그리고 여기서 화제가 되고 있는 ‘하이퍼텍스트’(hypertext) 등 여러 가지 의미 변용의 방법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시급한 ‘하이퍼텍스트’의 문제부터 보기로 하겠습니다.

 

(4)대담 중에는 ‘hypertext’라는 말은 넬슨(Theodore Nelson)의 조어라든지, 또 시쓰기의 방법 면에서 ‘건너뛰기’등의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모두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하이퍼텍스트는 컴퓨터의 사이버 공간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종이 위에 쓰는 언어기호(한국어, 일본어, 영어 등)에서도 그 성립이 가능한 사실을 먼저 지적해 둡니다. 이 사실은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시집의 부록인 「한국시의 동서남북」(문덕수 시집 『꽃먼지 속의 비둘기』에 수록, 2007)에도 예시를 들어 설명되어 있습니다. 컴퓨터에서 하이퍼텍스트는 ‘여러 가지 텍스트를 서로 관련시켜 하나의 데이터로 다루는 복합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텍스트의 특정 부분으로부터 다른 별개의 텍스트를 관련시킬 수도 있습니다. 컴퓨터에서는, 컴퓨터 화면과 유서(user)의 메시지를 접속시키는 ‘시프터’(shifter)라는 이동장치가 있음은 여러분들께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장치를 이용하여 어떤 한 시행(詩行)이나 센텐스의 임의의 부분에 다른 어구나 시행 또는 텍스트가 연결되어(링크되어), 복수의 텍스트가 상호간에 복잡한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됩니다. 기존의 시 텍스트나 산문 텍스트는 그 문맥이 선조적(線條的), 일방적 순서로 진행됩니다만, 이동장치인 시프트를 이용함으로써 사용자가 맥락을 자기 시점에서 자유롭게 접속하여 전환하게 됩니다. 시간적, 선조적, 앞뒤의 순서로 진행되는 한 맥락이, 중간에서 전혀 다른 맥락이 가지처럼 붙어서 갈라지고, 다시 그 가지에서 또다른 맥락의 가지로 갈라져, 이리하여 맥락을 달리하는 많은 복수의 텍스트가 얽혀 하나의 커다란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됩니다.

 

①여자의눈은北極에서邂逅하였다.②北極은초겨울이다.③여자의눈에는白夜가나타났다.  ― 이상, 「興行物天使」에서

 

“여자의 눈은 北極에서 邂逅하였다”의 1문 다음에, “北極은 초겨울이다”의 2문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2문은 1문의 “北極”이라는 맥락의 한 부분에서 갈라져나간 또다른 맥락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3문은 1문의 “여자의 눈”이라는 주어에 링크됨으로써 원래 문맥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보입니다.(엄밀한 의미에서 제2문도 맥락에서 완전히 일탈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1문의 “여자, 여자의 눈, 북극, 해후” 등의 부분에서 갈라져 또 다른 맥락의 텍스트가 증식되어 하나의 복잡한 네트워크가 형성되면 ‘하이퍼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①내 귀 속으로 한 새가 검불을 물어나르듯 종일 소리를 물어다 나르고 ②나는 것을 못견뎌 하는 소리를 지를 듯 말 듯 ③어머니! 이제 고압선에 옹크리고 있는 새만 보아도 무섭습니다. ― 양준호 「바다.1」 전문

 

편의상 ③문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①문의 “소리”와 ②문의 “소리”를 맥락이 갈라진 실례로 볼 수 있을 것 같고, ①문의 “새”와 ③문의 “새”도 역시 같은 현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이퍼텍스트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할까요. 맥락을 의미하는 ‘컨텍스트’(context)의 어원은 하나의 텍스트와 함께 있는 또 다른 하나의 텍스트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마치 나방이 같지?/시궁창에 처넣어진 거야”(초현실주의 문학,예술 시리즈 (3) 『오브제』, p.43)와 같은, 일종 선문답 같은 예도 하이퍼텍스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문덕수, “종이 하이퍼텍스트와 전자 하이퍼텍스트”, 월간『시문학』4월호, 2008년 4월]

 

 

  

 

         한국시의 동서남북 <Ⅱ>

             ― 서정, 관념, 사물, 기호, 주지의 바닥

                                문덕수 (시인, 예술원 회원)   심상(沈相運: 시인.문학평론가): 저는 이 대화에서 질문하면서 얘기를 유도하는 입장이 되겠습니다. 선생님의 몇 번째 시집입니까?심산(心汕: 文德守의 아호) <문덕수시전집>(시문학사, 2006) 이후의 작품집이지요. 시집 미수록으로 전집 말미에 추가한 몇 편도 포함되어 있어요.심상: 병원에서의 큰 수술 이후 건강도 안 좋은데, 땀 흘리면서 일 하시는 모습이 저희들의 귀감입니다. 선생님께서 최근 한국시의 전방위적 모습이라고 할까, 시의 방방곡곡을 조감하려고 한 것으로 압니다. 그런 플랜에서 쓴 논문이 「한국시의 동서남북」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논문은 한국시단에 대한 일부 왜곡이나 편견을 수정하고, 어떤 당위성(當爲性)이 있는 바람직한 방향을 추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여기서 제시한 한국시의 동서남북에 대한 합리적․당위적 근거라고 할까, 바닥을 다진 논리를 좀더 명확히 알고 싶습니다. 

기호, 대상, 주체

심산: 나는<오늘의 시작법>(개정판, 2004) 서문에서 “시는 언어예술이면서 언어를 넘어선다”고 했습니다만, 이 말은 언어예술임을 긍정하면서 부정한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런 모순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시는 ‘언어(기호) 체계’이나 텍스트 바깥의 현실이나 그 사물과 관련된 지향대상을 갖는다는 점에서 기호를 넘어섭니다. 시는 쓰는 사람인 ‘주체’, 뭔가를 전달하기 위해 표현하는 ‘대상’(사물), 표현매체인 ‘기호’의 세 요소가 있습니다. 이 세 요소를 연결하면 ‘시의 삼각도’ 같은 것이 형성됩니다. ‘기호’, ‘대상’, ‘주체’라는 각 변이 분명하게 표시된다면 물론 ‘원형’이라도 무방합니다. 각 변을 ↔ 으로 표시한 것은, 각 변이 고정된 의미가 아니고 각 변(기호, 주체, 대상)의 상호영향을 교환하면서 어떤 의미를 실현한다는 점을 말한 것입니다.심상: 이해가 됩니다만, 몇 가지 문제점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시의 ‘독자’는 없어도 괜찮은가, 또 ‘대상’(사물)이라고 한 것은 ‘이미지’나 ‘표상’(表象, representation)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물 자체’(物自体)를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또 대상의 문화적․사회적 맥락은 어떻게 되는지?심산: 독자, 출판, 기타 사회적․문화적 맥락 등, 이른바 ‘시적 상황’까지 고려하면 삼각도는 훨씬 복잡해집니다. 그리고 시도 커뮤니케이션의 일종이라고 보면 발신자, 수신자, 메시지, 미디어 등을 넣은 커뮤니케이션의 도형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대상’(사물)은 물 자체와 그것의 표상 즉 이미지를 다 포함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대상의 기호이면서 그 기호를 넘어서서, 텍스트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까지의 관계를 암시합니다. 그렇게 해서 보면, “시는 주체에 의해 창조된, 기호를 넘어서는 기호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심상: “시는 주체에 의해 씌어진, 언어예술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예술”과 같은 정의가 아닙니까. 줄여서 “기호를 넘어서는 기호체계”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기호’(sign)라는 말에서 소쉬르를, ‘사물’(또는 물)이라는 말에서는 존 로크와 같은 사람을 연상하게 되어, 문제가 현학적 미로로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심산: 그런 느낌도 듭니다. 어쨌든 한국시가 도달한 전방위적인 오늘의 국면을 망라한 시론이라고 할까, 이론이라고 할까 그 전개를 위한 스타트라인 쯤으로 생각하면 됩니다.심상: 선생님께서는 오늘의 ‘한국시의 동서남북’으로 1)전통적 서정시, 2)관념시, 3)물리시, 4)실험시, 5)주지시 등으로 유형화하여 제시한 바 있는데, 이러한 지형도와 앞서 말한 시의 ‘삼각도’와는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심산: 한국시의 동서남북은 여러 가지 기준(사상, 종교, 현실인식의 차이 등) 중에서 시의 ‘방법’을 잣대로 하여 오늘의 한국시를 전반적으로 반성해서 작성해 본 지형도이나, 이 지형도 바탕에는 “기호, 대상, 주체”라는 요소가 내재되어 있습니다.심상: 내재되어 있다는 말씀은 시의 다섯 계열을 ‘기호, 대상, 주체’의 각 부분으로 배치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서정과 관념

 심산: 기계적․공식적 분배의 가능성을 시사한 것은 아닙니다. 이 점, 오해해선 안 됩니다. 어쨌든 ‘1)전통적 서정시, 2)관념시’는 어느 쪽이냐 하면 ‘주체’의 주관 쪽에 더 많이 그 무게가 실립니다. ‘서정’(抒情)은 보통 ‘감정을 펴서 나타냄’의 뜻이지만, 여기서는 ‘감정’과 ‘정서’를 합친 뜻의 ‘정서’라는 의미로 보겠습니다. ‘정서’도 물론 시의 대상입니다만(“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김소월), 그러나 사물(事物)이나 물과는 전혀 다르고, 굳이 말한다면 일종의 ‘분위기’(atmosphere)인 것 같습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이는 ‘분위기’와 ‘분위기적인 것’으로 구별해서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슈미츠(Hermann Schmitz)나 뵈메(Gernot Bohme)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이들은 ‘분위기’와 분위기적인 것 즉 ‘준물체’(準物体)로 구별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밝고 시원한 분위기’라든지, ‘침울하고 찌무룩한 분위기’라든지, ‘긴장된 분위기’와 같은 말들을 많이 씁니다. ‘찌무룩함’, ‘우울함’, ‘답답함’과 같은 감정은 모두 분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움, 사랑, 고독, 불안, 슬픔, 기쁨과 같은 감정도 분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정동적(情動的)인 것이어서 그 실재가 없고, 단지 어떤 사물인 대상과 그것을 지각하는 주체 사이의 중간적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뵈메는 “분위기의 특징은 확실히 준객관적(準客觀的)인 위치에 있으며, 동시에 또 주관적인 현실이라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그런데 슈미츠는 ‘바람(), 시선(視線), 소리, 어둠, 밤, 추위, 차가움’ 등을 준물체(準物体)라고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준물체란 반쯤은 물과 같은 중간적 물체이다. 준물체란 물이 되기 위해서는 뭔가가 결락되어 있다. 즉 실체성이 없고, 시간에 대한 내구성(耐久性)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슈미츠가 말하는 이러한 준물체를 뵈메는 ‘분위기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분위기적인 것’은 감각으로서 그 실체를 지각할 수 있는 사물로 보고자 합니다. 시에서는 그렇게 보아도 괜찮습니다.심상: “바람, 시선, 소리, 어둠, 밤, 추위, 차가움” 등의 준물체는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대상이므로 ‘물’에 넣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앞에서 열거한 ‘분위기’의 카테고리에 속한 것들을 모두 정동적 정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따라서 사물이 아닌 이 분위기, 다분히 주체의 주관적 현실로 볼 수 있는 이 ‘분위기’야말로 서정시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또 민족의 전통과 관련된 분위기야말로 ‘전통적 서정시’의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분위기는 또는 분위기적인 것이라고 하지만, 타자를 움직이게 하는 강력한 에너지가 잠재하고 있음도 무시할 수 없겠습니다. 그것을 ‘심리적 에너지’라고 해도........심산: 그렇습니다.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전통적 서정시는, 미학에서 말하는 ‘분위기’를 바탕으로 한 시의 유형입니다. 나는 그렇게 보고 싶습니다. 이 분위기 즉 여러 가지 정서는 사물과 주체 사이의 중간적인 존재이지만, 사물 쪽에서 본 엄밀한 중간물이라기보다는 주체 쪽에서 본 중간물입니다. 즉 주체의 주관적 현상이라고 봅니다.심상: 서정시의 바탕이나 근거에 대한 중요한 이슈를 지적해 주신 것 같습니다. 늘 궁금했던 문제입니다. 그런데 ‘중간적인 것’이란 뭔가 실체성이 없는 것도 같고, ‘대상, 기호, 주체’에 비하여 존재성이나 존재능력도 약한 것 같습니다.심산: 그래도 존재 기반은 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내가 부정적인 어조로 말한 것도 존재기반이 약하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서정과 관념은 어디까지나 주체의 정서요, 주체의 관념 아닙니까. 주체의 존재를 기반으로 해서 서정시, 관념시 등이 장르로서의 그 정당성을 갖는 것 같습니다. 사랑, 연민, 동정 등은 휴머니즘의 근거가 되고, 소외자의 인권이나 평등을 기본으로 한 이데올로기 형성의 근거가 됩니다. 그런데 서정시도 여러 갈래입니다. 소월 미당의 계열이나 샤머니즘(박재릉), 인륜의 보편성, 리비도의 추구, 센티멘털리즘의 뿌리 찾기(박용래, 박재삼), 자연과 심령(心靈)의 교류, 전통적 설화 찾기, 내관력(內觀力)의 중시 등을 우선 들 수 있습니다.심상: 관념의 바탕이 궁금해지네요.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관념’(觀念)은 ‘이데아’(idea)의 역어입니다. 원래 불교 용어로서는 ‘관상염불’(觀想念佛)의 준말이 ‘관념’(觀念) 아닙니까. ‘이데아’에는 ‘본다’는 감각적 의미가 어원에 있으나, 플라톤은 ‘사물의 본질적 존재’(사물의 모법적인 존재)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인간에게서 떼어 독립적인 것으로 본 것입니다. 뒤에 기독교에 도입되어 신(神)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만, 데카르트는 이러한 전통적인 용법과는 달리 “인간의 마음속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심산: 말씀한 대로, 관념은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지각이 아닌, 감각과는 관계가 없는 심적 존재(心的存在)라는 근대적 의미로 굳어져 내려온 것으로 압니다. 심지어 인간의 정신은, 외부에 있는 ‘물’이 아니라 마음 속에 있는 ‘관념’만을 지각할 수 있다는 편견(?)까지 형성된 것입니다. 사물은 지각의 직접적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대리하여 나타내는 ‘관념’만이 지각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견해를 ‘지각표상설’(知覺表象說)이라고 합니다.심상: 데카르트의 근대적 의미는 존 로크(1632-1704)에게로도 계승되었습니까? 이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심산: 관념론이나 사물론에서 로크를 빼고서는 얘기가 안 되지요. 로크는 관념에 대하여 사람의 마음 속에 나타나는 기호(sign)나 표상(表象, representation)이라고 말합니다. 기호나 표상이 사물을 대신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마음(mind)이나 정신을 제외하면 사물은 나타나지 않으므로 지각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의 외부에는, 이러한 관념을 마음 속에 생기게 하는 ‘물’이나 ‘물체’가 있다고 말합니다. 지각하는 마음의 바깥에, 즉 관념 외에, 물이나 물체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여러 가지 문제를 내포하고 그 뒤의 학자들의 견해도 분분해졌습니다만, 전문적인 학설보다는 상식에 가까운 시론의 입장에서 논의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심상: 아포리아의 미로로 들어가기보다는 시론적 입장, 시론적 입장보다는 상식적 입장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첫째 ‘관념’이 사물과 같은 대상이 아니라는 점, 둘째 관념은 대상과 주체 사이의, 이른바 정서와 비슷한 ‘중간물’이라는 점임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대상과 주체 사이의 중간물이라고 말했지만, 선생님의 지론에서는 추측컨대 오히려 그 무게는 ‘주체’ 쪽에 실리는 것으로 보입니다만….심산: 그렇습니다. ‘관념’은 대상(사물)도 아니고 주체도 아닌 중간물이면서 주체에 비중이 실린 대상인 것 같습니다. 사물에 대한 직접적 감각이나 디지털적 기호(또는 이미지)를 중시하는 오늘의 시의 방향에서 볼 때, 관념은 분명히 정서와 동류(同類)의 것으로 간주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탈관념’(脫觀念)을 외치고 있으나, 사물의 실재(實在)나 실체(實体)와는 동떨어진, 관념만의 관념, 기존 관념에의 안주(安住), 관념 유희 등에 대해서는 안티한 입장을 취합니다. 어디까지나 사물의 지각을 토대로 한 자기 나름의 독창적인 관념형성까지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요. 즉 오리지널한, 유니크한 관념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요. 편의상 관념의 목록을 한번 작성해 봅시다. 1)민주주의, 민중주의, 사회주의, 페미니즘, 민족주의 등의 이데오로기, 기독교, 불교 등의 종교사상, 2)전통, 윤리, 풍속, 인권, 평등, 자유, 도덕 등의 사회생활과 과련된 사상, 3)사랑, 이별, 그리움, 고민, 고독, 불안, 기쁨, 슬픔 등 정서와 관련된 사상, 4)정당, 단체, 국가, 가정 등 사회제도에 관련된 사상……. 이 중의 3)은 이미 말한 ‘분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의 모든 종류의 관념을 다 배제한다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관념도 현실적 사실이나 사물의 실재나 실체의 자각을 바탕으로 인식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감도 안 나고 허위일 때도 많습니다. 선동적인 포퓰리즘이나 민중주의, 걸핏하면 내세우는 분단, 통일 등의 구호도 어떤 사실을 바탕으로 하지 않을 때, 허구성이 주는 심리 조작의 폐해가 큽니다.심상: 관념시가 우리에게 준 부정은 생경하고 조잡한 카프계부터가 아닙니까.심산: 그렇습니다. 그 피해가 큽니다. 고은, 신경림 등에 이르러 시성(詩性)은 어느 정도 회복되었습니다만, 격한 메시지는 여전히 문제인 것 같습니다. 한용운, 이육사, 윤동주, 유치환, 김수영의 계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함동선(咸東鮮)은 관념시의 한 온건 모델로 볼 수 있겠지요. ‘분단’이나 ‘통일’이나 우리 끼리를 노래하면 무조건 ‘좋은 시’라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되지요. 이밖에 기독교, 삶의 체험적 관념, 불교, 에콜로지, 존재론적 자의식, 체험적인 관념 등의 여러 갈래가 보입니다. 

물 또는 사물

 심상: 선생님께서는 ‘물’이라고 했다간 또 ‘사물’이라고도 합니다. ‘물’()은 감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유형체이며, ‘사물’(事物)이란 ‘일과 물건’이라고 사전에 정의하고 있습니다만, 혼용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심산: ‘물’은 라틴어 ‘rēs’의 역어입니다만, 영어(thing)․프랑스어(chose), 라틴어는 ‘물과 일’의 두 가지를 다 나타내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rēs’를 ‘물’이라고 하거나 ‘사물’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봅니다. ‘물리시’라는 말의 ‘물리’(物理)를 제외하고는, 앞으로는 ‘사물’이라는 말을 주로 쓰겠습니다. 사물이란 ‘의식의 대상이 되는 실재적 사물’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한국시에서 ‘사물’이 도입되고, 사물을 중시한 때는 1930년대 이후인 것 같습니다. 이미지즘이나 모더니즘에서 사물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가령 로월(Amy Lowell)이 주재한 <이미지스트 시인선집>(Some Imagist Poets: An Anthology, 1915)에서 말하는 이미지즘 강령 6항 중에는, ‘명확한 이미지’, ‘정확한 사물의 언어’이라는 말들이 보이며, 이러한 이미지즘의 강령이 김기림을 통해 한국에 도입된 때가 30년대입니다. 이미지즘의 선구자가 정지용(鄭芝溶)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의 도입과 수용은 매우 불완전하고 수동적이었습니다. 어떤 것이 정확한 사물의 언어인가에 대해서는 거의 의심을 가지지 않은 듯합니다. 이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도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벌써 유리창에 날벌레떼처럼 매달리고 미끄러지고 엉키고 또그르 궁글고 홈이 지고 한다”(정지용의 「비」의 한 대목)와 같은 시가 바로 ‘사물’이라는 정도의 이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심상: 정지용의 시사적(詩史的) 의의는 매우 큽니다. 물리시는 모두 정지용 계열이지요. 그건 그렇고 물이나 사물에 대해 좀 더 바닥으로 다가가면 좋겠습니다. 

사물의 성질

심산: T.E. 흄이 말한 “건조한 견고성”(dry hardness), 앞에서 인용한 “정확한 사물의 언어”라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사물’의 성질이 무엇인가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오늘의 우리 시의 한 방향이 ‘물리시’(또는 물질시)인데, 그 물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 막연히 ‘꽃’이나 ‘구름’이나 ‘바위’ 같은 사물을 제시하여 ‘사물운운…’하는 것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심상: 앞에서 존 로크를 거론했는데, 사물론에서는 그를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반왕(反王) 폭동에 연좌되어 네덜란드로 망명한 로크는 그곳에서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인간지성론>(1689)에서 말하고 있는 사물과 관련된 관념은 우리에게 굉장한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심산: 아는 대로 조금 언급하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정신’이나 ‘의식’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은, 현전(現前)한 사물의 기호나 표상을 지각할 수 있으며, 이것을 두고 ‘관념’이라고 합니다. 이 점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관념은 사물에 대한 경험이 그 근원입니다. 경험에는 ‘감각’(sensation)과 ‘반성’(reflection)의 두 가지가 있는데, 반성은 경험한 것을 되짚어 생각해 보는 활동이며, 경험 중에서도 색․성․향․미 같은 인식은 감각적 경험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감각적 관념이지요. 다른 관념과 마찬가지로 마음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바깥에는 ‘물’(thing) 내지 ‘물체’(body)가 존재한다고 로크는 말합니다. 그런데 마음의 바깥에 존재하는 사물은, 앞에서 말한 관념을 마음 속에서 생성케 하는 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마음 안에서 지각하거나 사고하게 하는 직접적 대상은 관념이며, 이 관념을 마음 속에서 생성케 하는 능력이 있음을 말하면서, 그 능력을 로크는 사물의 ‘성질’(quality)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직관이 아닌 분석적 고찰이지요. 우리 시의 이해를 위해 매우 중요한 부분이므로 좀 설명해 봅시다. 그 성질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1)물체의 고성(固性)을 가진 여러 가지 부분인 양, 형, 수, 위치, 그리고 운동 또는 정지(靜止)2)물체 안에 있는, 그것을 감각할 수 없는 1차성질에 의하여, 어떤 특유한 방식으로 우리의 어떤 한 감관(感官)에 작용하며, 그것에 의해 다양한 색․성․향․미 등의 여러 가지 관념을 우리 마음 속에 생성케 하는 능력(可感的 성질)3)물체 내에 있으며, 그 1차성질의 특정된 구에 의해 타 물체의 양, 형, 조직, 운동을 변화시켜, 종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감관에 작용하는 능력. 예를 들면 ‘불’은 쇠나 납을 녹이는 힘을 가진다.1)은 ‘1차성질’, 2)는 ‘2차성질’, 3)은 ‘능력’이라고 합니다. 데카르트는 물체의 본질을 연장(延長 extension)이라고 했으나, 로크는 고성(固性 solidity)이라고 말합니다. ‘고성’이란 다른 사물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 그 물의 고유한 단단한 성질입니다만, 금세기초 영국의 이미지즘 시인 T.E. 흄이 주장한 ‘건조한 견고성’(dryhardness)은 바로 로크의 고성(固性)에 기초해서 말한 것이 아닌가도 생각합니다. 낭만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그의 고전주의의 중요한 특성입니다. 바로 사물의 고성(固性)을 기초로 해서 ‘건조한 견고성’이라는 이론이 타당성 있는 설 자리를 얻게 됩니다. T.E.흄은 그의 논문에서 사물의 고성에 관한 철학적 이론을 굳이 소개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만큼, 영국의 지()의 역사는 그런 이론적 업적이 전제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러운 일입니다. 2차성질은 “색․성․향․미”(色․聲․香․味) 같은 여러 가지 관념을, 인간의 마음 안에 생성케 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반야바라밀다심경>에 나오는 ‘색․성․향․미․촉․법’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서 서양철학과 불교가 만나게 되는군요. 로크의 이론의 깊이를 실감하게 됩니다. 불교 쪽의 이론의 깊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로크의 2차성질에 관한 이론(1차성질도 그렇습니다만)은 불교와 관련된 흥미 있는 사실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심상: 로크의 사물의 제2성질이 불교의 육근(六根), 육식(六識), 육경(六境)과 관련된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창발론(創發論)을 주장하는 승계호(承啓浩, 미국 텍사스대 교수,2007년 6월 1일, 서울 금융회관에서 강연)는 사물이 갖는 원소결합은 자기 조직화의 내부적 원리에 의해서 집단적 존재자로 형성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로크의 고성(固性)에 대한 해석에도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불교와 관련되는 이야기가 또 있는지, 계속해 주십시오.심산: 예를 들면 ‘꽃병’은 시의 대상이 됩니다만, 불교 특히 아비다르마(阿毘達磨 abhidharma) 불교에서는 대상이 안 됩니다. 아비다르마 불교에서 말한 인식의 대상은 색(시각 대상), 성(청각 대상), 향(후각 대상), 미(미각 대상), 촉(촉각 대상) 등입니다. 대상이 되는 색․성… 등은 각각 존재의 최소단위로서의 원자(原子)와 같은 극미(極微)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개의 극미는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틈새[隙間]을 가진 것이 모인 집합적 다수의 극미이거나, 혹은 틈새가 없는 많은 극미의 집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꽃병은 가존재(假存在)로서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도자기나 유리 같은 병이나 직물이나 가옥과 같이 파괴될 때 그 관념이 소멸되는 것, 또는 물, 불 등과 같이 사고(思考)에 의해 색과 같은 것으로 환원될 때, 그 관념이 소멸되는 것은 대상이 될 수 없는 ‘가존재’(假存在 世俗有)로 보는 것입니다. 색․성․향․미․촉 같은 것은 더 이상 파괴되거나 사고에 의해 더 이상 분석되지 않는 것으로서 ‘진실한 존재’(勝義有)이며, 따라서 지각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유식론(唯識論)에서는 객관적 대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만, 위의 아비다르마 불교에서의 이론은 불교적 인식론의 한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또 한 가지 비교거리는 ‘인과설’과, 다른 또 한 가지는 ‘지각표상설’(知覺表象說)입니다. 여기서 장황하게 말할 겨를이 없습니다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물은 기호나 표상으로서 마음 속에 나타나는 ‘관념’이라는 견해가 이른바 지각표상설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로크의 이론은 ‘지각표상설’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물을 대신한 기호나 표상을 관념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관념 형성의 근거는 주체의 마음 바깥에 있는 ‘물’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관념과 물의 성질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에서도 인과설의 주장이 있습니다. 인과설의 당연한 귀결로서, 진실한 대상은 지각의 원인이며, 그 지각에 사물이 자기의 상()을 인도(引渡)해 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심상: 불교의 인식론과 서양 철학에서의 관념론과의 관련성은 퍽 흥미 있게 들립니다. 앞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시에서 모든 관념은 어떤 형태든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문덕수 「나의 쓰기」, <문덕수 전집>). 이것을 ‘슈퍼비니언스(supervenience)의 원리’라고 말했습니다. 넓은 의미의 ‘물리주의’(physicalism)라고 할까, “수반의 이론”이라고 할까, 그런 시론상의 원칙을 천명했습니다. 이 원리는 김재권 교수(미국 브라운 대)가 주장한 수반(隨伴)의 원리를 토대한 명제가 아닙니까.심산: 그렇습니다. 세계적 석학인 김재권 교수의 학설입니다. 하종호 교수(고려대)가 옮긴 그의'물리계 안에서의 마음'('Mind in a Physical World')(철학과 현실사, 1999), <물리주의(Physicalism)>(아카넷, 2007)이란 저서가 한국에서 이미 출간된 바 있습니다. 철학은 시론의 중요국면의 이론을 제공해 줍니다. 

물리시의 방향

심산: 우리가 말하는 ‘사물시’ 또는 ‘물리시’라는 것은 영미 쪽에서 말하는 ‘피지컬 포에트리’(physical poetry)와 관련됩니다. 사물시라고 하건 ‘물리시’라고 하건 ‘물질시’라고 하건 어느 것이든 상관 없겠습니다만 나는 ‘물리시’로 부르고 싶습니다. 일찍이 존 크로우 랜슴이 말한 것 같이 관념이 아니라 사물을 다루는 시가 물리시입니다.심상: 관념시도 영미 쪽의 ‘플라토닉 포에트리’(Platonic poetry)와 관련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물을 다룬다”라고 말씀하시는데, 다룬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걸 좀 분명히 하면 좋겠습니다.심산: 사물을 다루는 한국시의 경우, 현재 세 가지 경향이 보입니다. 앞에 든 사물의 1차성질(양, 형, 수, 위치, 운동 또는 정지 등), 2차성질(색․성․향․미․촉 등), 그리고 ‘능력’ 등과 대응해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사생시(寫生詩)지요. 이 방면의 물리시의 시조는 정지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윤성, 김종길을 비롯한 50년대의 김광림과 전봉건, 오탁번의 <오탁번시전집>이 보여주는 사물의 극미세계가 있습니다. 첫째, “사금파리로 날을/ 얇게 세워/ 거침없이 달려오다가”(박명용의 「보길도 2」)는 로크가 말한 1차성질이며, “가을 아침 잘 익은 사과를 깨물면”(심상운의 「사과」)은 사물과 타자와의 관계라는 점에서 로크가 말한 사물의 능력에 해당될 것 같습니다. 둘째는 사물에서 기존의 관념이나 의미를 배출하려고 하는 경향입니다. 오규원, 조영서가 그렇습니다. 셋째는 사물이 관념을 비유나 상징으로 거느리는 경향입니다. 이 쪽 경향의 시들이 제일 많습니다.심상: 흔히 ‘발가벗은 언어’, ‘날 이미지’, ‘언어 이전의 사물’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고 있는데, 그런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요?심산: ‘언어 이전의 사물’이 어떤 것인지, 나로서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불교의 이론에서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직접 지각한 대상에 대하여 “이것은 장미꽃이다”, “이것은 고층빌딩이다”라고 언표하면 이것을 개념적 사유로 보는 것 같습니다. 한편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합니다만 언표할 수 없는, 즉 대상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타자와도 공통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이것을 ‘자상’(自相 )이라고 부르고, 한편 “이것은 장미꽃이다”, “이것은 고층빌딩이다”와 같은 언표된 지각의 대상은 개념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동종(同種)의 다른 표상과 공통성을 가지므로, 이를 ‘공상’(共相 )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상(自相:독자상)이 말하자면 ‘언어 이전의 사물’에 해당한다고 봅니다만, 일단 언어로 표현되면 공상(共相)이 됩니다.심상: 불교 연구가들이 말하는 ‘자상’(自相)이라는 것은 ‘언어 이전의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일종의 논거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심산: 글쎄. 최근 미국의 철학자인 퍼스(1839~1914)의 기호론에서 재미 있는 대목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퍼스는 존재의 보편적 카테고리로서 1차성, 2차성, 3차성으로 나눕니다. 이중의 1차성(firstness)은, 그 자체로서 다른 어떤 것도 참조하지 않고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사물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지각되기 이전의 감각적 성질(qualities of feeling)은 이와 같은 모양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길가 울타리의 빨간 장미꽃을 보고, ‘장미꽃’이라고 언표하기 이전의 있는 그대로의 물리적 모습을 존재 카테고리의 ‘일차성’이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불교의 자상(自相)과 비슷한 이론이지요.심상: 그런 방향으로의 접근을 강조한 것이겠지요.심산: 그렇게 보는 것이 바람직하겠네요. ‘언어 이전의 사물’에 대해서는 나도 논문에서 구약의 창세기 이야기를 논거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천지창조에 6일간이 걸리고 아담이 명명하기 이전의 며칠간, 이름 없는 사물로 존재했던 시기가 있었지요. 

기호와 실험

 심상: 기호와 실험시 쪽으로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말하자면 ‘언어 실험’에 의한 아방가르드 시운동 쪽이 되겠습니다. 우리 시의 실험적 모험은 이미지즘이나 쉬르리얼리즘의 도입에서부터이고, 언어 기호의 반통사론적(反統辭論的) 실험의 바닥에는 일반적으로 프로이트나 융의 ‘무의식’이 있는 것을 전제로 한 논의였습니다. 통사론에서 이탈한 기호의 운동을, 무의식의 레벨에서 논의하는 것이라면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만….심산: 지적한 대로이나 이 부분은 우리 시론의 최대 취약 부분이기도 합니다. 프로이트는 알면서, 기호학이나 기호론자인 소쉬르나 퍼스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한국의 아방가르드시나 실험시의 이론이 항상 겉돌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소쉬르의 기호학은 사물의 본질을 사물 자체에 찾는 실체론(實体論)을 ‘관계론’(關係論)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혁명입니다. 기호학이나 기호론이 시쓰기에 미친 영향을 몇 가지로 요약해 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시의 실험적 모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기초론이 될 것입니다.첫째, 시의 대상이나 주체에 집착했던 태도를 떼어내어, 대상과 주체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게 됩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계’란 무엇입니까. 대상과 주체와의 사이에 있는 매개적 존재를 의미합니다. 즉 기호입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과 소쩍새와의 관계(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미당), 다시 말하면 사물의 생성에 있어서 사물 상호간의 ‘인과’와 같은 것이 아니라, 대상과 주체 사이에 있는 기호나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소쉬르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는 관점에서 언어학을 구성했는데, 그 의미작용이 다름 아닌 기호(sign)의 작용이 아닙니까. 소쉬르가 말하는 의미하는 것(시그니피앙)과 의미되어지는 것(시그니피에)이라는 두 가지의 관계에 의해서 된 것이 바로 언어기호입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관계의 시스템에서 구성된 것입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은 사물의 실체나 사물을 인식하는 주체의 존재보다는 ‘관계의 존재’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실체보다는 그 관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일반화되어 구조주의 언어학이 발생했습니다. 실체에 대한 인식이 실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시점(視點)― 시점도 관계 형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의 변화에 따라 사물의 실체도 바뀌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론은 대상과 주체 사이의 ‘매개적 존재’(기호)를 강조하게 됩니다. 시론에서 사물이나 주체보다는 그 사이의 매재(媒材) 즉 기호를 중시하게 된 것은, 시에 있어서 언어실험이나 실험적 모험을 촉진하고, 그러한 혁명적 작업의 정당성을 설명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것입니다. 둘째 언어기호나 기호는 실체를 가지지 않습니다. 앞에서 소쉬르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를 언급했습니다만, 언어기호의 이러한 관계도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언어기호 자체도 형식(形式)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의 방법론을 중시하는 시의 형식주의 이론의 근거도 바로 관계론에 의해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이미 상식화된 예입니다만, 산의 소나무를 보고 “저것이 소나무다”라고 언표해도, 산에 있는 소나무 전체를 추상적으로 지시하고, 그 의미가 어느 한 그루의 소나무에 부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소나무’라는 기호는 소나무A, 소나무B, 소나무C를 다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어학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호가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언어가 인간의 경험을 버철화(virtual化)한다는 사실의 근거입니다. 어떤 사태나 사물을 언어화하여 기억한다고 가정합시다. 자기의 경험을 언어화하여 기억해 두어서 필요한 때에 이 언어기억을 끄집어내어 반복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언어는 잠세태(潛勢態)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버철화입니다. 심상운 씨는 이와 유사한 토픽을 다른 각도에서 ‘모듈(module)론’으로 말한적이 있지요. 사진이나 도상과 같은 것이 잠세되어 있다가, 필요한 때에 반복해서 끄집어내어 의미 경험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쓰기에서, 우리의 경험을 언어화한다는 것은, 즉 버철화한다는 것이 되며, 우리의 모든 경험을 기호의 잠세태로 전위(轉位)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컴퓨터 언어라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인터넷 언어 또는 디지털 언어지요. 우리는 컴퓨터의 모니터에서 이미지나 텍스트나 음성을 보고 듣습니다만, 이러한 것들은 컴퓨터에 입력되면 일단 이진법(0과 1), 또는 화소(畵素)와 같은 인공기호로 바뀌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입력된 모든 기호는 대상과의 관계(‘참조관계’라고도 합니다)를 끊고, 외부 사물과의 지표적(指標的)인 연결(쓰는 이나 말하는 이)도 절단되어 변형 가능성이라는 잠세적 상태로 바뀌게 됩니다. 즉 버철화합니다. 버철화된 정보는 컴퓨터 화면에서 화소나 문자나 음소로서 다시 인공적으로 합성되며, 외부의 대상과는 간접적으로 관계를 갖는 기호(자연기호)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입력에서부터 출력에 이르는 기호의 이러한 합성이나 변화의 과정은 현실의 소멸을 기반으로 하는 것입니다. 기호의 이러한 버철화 과정은 언어 실험이나 모험의 가능성을 정당화 하는 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 즉 하이퍼텍스트

 심상: 저의 모듈론과 버철화와의 관계는 언젠가 다시 논의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압니다. 이야기를 계속하시죠.심산: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일까 합니다. 셋째입니다. 컴퓨터에서는 ‘시프터’를 통하여 메시지의 문맥을 자기의 시점으로 마음대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문맥을 자기의 시점으로 얼마든지 전환할 수 있음은 이른바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이 원리는 오늘날 선조적(線條的)인 구조의 통사론을 깨는 언어기호의 다양한 혁명적인 실험을 밑받침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언어모험의 남상인 이상(李箱)에게서 봅시다. 

線上의 一點 A

線上의 一點 B

線上의 一點 C

A+B+C=A

A+B+C=B

A+B+C=C

 이상의 「선에 관한 각서」의 한 대목인데, 통사론을 파괴한 하이퍼텍스트와 유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線上’은 통사론적 구문의 선조성(線條性)을 암시하는 것 같고, 일(一點)의 ‘A,B,C’는 선조적으로 연결된 텍스트의 임의(任意)의 세 지점들인데(A+B+C=A와 같은 갈), 이 지점에 링크가 되어 별개의 텍스트로 갈라져 연결되어 마침내 복잡한 네트워크 관계가 형성됩니다. 기호 모험의 시는 이상(李箱)에서부터 조향(趙鄕), 김춘수의 실험, 나의 초기 시집 <선․공간> 등으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심상운 씨의 최근작도 이 계열이지요. 심형의 시 「오토바이가 달린다」(시문학, 2007. 6)를 예로 들어봅시다. 이 텍스트의 구조에서는 “푸른 오토바이가 바그다드 한복판을 달린다”(1연), “빨간 오토바이가 여름바다 위를 달린다”(2연), “하얀 오토바이가 산맥을 넘어 도시 위를 달린다”(3연)의 세 화소(話素)가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모두 현실에서는 실현이 가능하지 않는, 즉 버철화되어 있습니다.(제1화소는 현실성이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일종의 사이버 스페이스에서의 사건이지요. 이런 경우도 나는 하이퍼텍스트로 보고 싶습니다. ‘오토바이가 달린다’라는 화소에서 주어가 되는 지점 “오토바이”에 집중되어 문맥이 주체(시인)의 시선에 따라 갈려서 푸른, 빨간, 하얀 오토바이로 전환되고, 달리는 장소가(바그다드, 바다, 산맥을 넘어 도시) 전환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프터에 의하여 유서(user)의 행위가 문맥을 전환시킨 일종의 상호행위(interactivity)를 연상하게 하는 장면입니다. 이 텍스트의 끝의 “그때 그는 손에서 리모콘을 아주 놓아버린 것이다”라는 대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인터넷에 접속하여 유서가 자기 시점으로 문맥을 전환하여 커뮤니케이션 행위를 하고 있는 상황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 텍스트에서는 ‘오토바이’는 유서의 상호행위가 접속된 지점입니다만, 가령 “푸른 오토바이가 달린다/ 푸른 소리를 사방에 뿌리며” 대목을 예로 들면 “달린다”, “푸른 소리”, “사방”, “뿌리며” 등의 지점에서의 접선과 전환도 가능합니다. 이러한 하이퍼텍스트의 시는 현대시의 한 혁명적 방향임이 분명하고 기존의 구문(構文)을 부정한 문맥 분산화의 모든 실험도 비로소 정당성의 근거를 얻게 됩니다.심상: 시에서 기존의 ‘구문파괴’가 과연 가능할까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좀더 설명해 주십시오. 실험시의 텍스트에 제 시가 언급된 것을 의미 깊게 생각합니다.심산: 소쉬르가 말한 파라디금(pardigme)과 생타금(syntagme)의 시스템을 먼저 말해야 되겠네요. 이것은 물론 주요한 기호 시스템이고, 이 특성의 본질은 ‘반복’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파라디금을 ‘범열’(範列)로, 생티금을 ‘연사’(連辭)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반복 가능의 시스템인 파라디금은 세로 방향을 취하고, 생태금은 가로 방향(수평 방향)을 취합니다. 세로의 방향과 가로의 방향으로 기호관계가 규칙적으로 형성되어 나타나는 언어가 파롤(parole)입니다. 파라디금과 생태금의 관계로 생성되는 언어인 파롤은 단지 시공화(時空化)되지 않는 잠재적인 언어체계인 랑그(langue)와는 구별됩니다. “푸른, 오토바이, 달린다” 등, 각기 분산된 기호들은 의미가 실현되지 않는, 즉 파라디금과 생태금의 결합규칙에 의하여 생성된 언어 즉 파롤이 아닙니다. “푸른 오토바이가 달린다”라는 구문에서, 비로소 이 시 자체는 가상(假想)의 세계이긴 하나 랑그들이 결합되어 시간과 공간(가상적인) 속에서 파롤로 현실화하는 것입니다. 문법에서 말하는 시 텍스도 파라디금과 생태금의 관계 결합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얘기가 길어졌으므로 결론을 서두르겠습니다. 기호가 실현된다든지, 시 텍스가 구현되는 것은 잠재적인 시스템의 상태에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현실로 이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터넷이나 가상 공간에서의 기호 실현은 파라디금과 생태금의 확장이라고 할까. 어쨌든 그러한 규칙의 파괴 같은 실험을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경우 기호를 중시하는 현대시는 ‘하이퍼텍스트’로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김춘수의 무의미시는 기존의 통사관계 내에서의 실험이어서 결국 좌절된 것으로 보입니다. 통사론도 깨지 못하고, 또 하이퍼텍스트의 이해 부족에서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주지시

 심상: 결국 구문론의 원리를 깨는데서 현대시의 아방가르드적 방향이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것은 그렇고, 주지시(主知詩) 쪽으로 화제를 옮기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우리 시의 주지주의적 남상을 김기림의 <기상도>(1936)에서부터 김현승, 송욱, 박진환 등으로 계승된다고 말하는데,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까?심산: 그렇습니다. 시에서 “완결을 확정할 수 있는 시의 모델”은 없다고 하더라도 주지시야말로 우리가 나가야 할 좌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론 ‘물리시’, ‘기호시’(흔히 말하는 탈관념시, 디카詩 등을 포함)의 실험은 매우 중요합니다. 결코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렇고, 주지시는 앞에서 말한 서정, 관념, 사물, 기호 등을 각각 분리시켜서 일방적으로 한쪽으로만 비대화시켜 나가는 것보다는 서정․관념․사물․기호 등이 이룩한 각각의 특성, 독자성, 실험적인 여러 가치를 어떤 관계원리에 의해서 통합한 그러한 포괄성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구상에서 일단 ‘주지시’(主知詩)라고 명명해 봅니다.심상: 영국의 형이상시(形而上詩, metaphysical poetry)와도 어떤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요.심산: 영국의 형이상시에 대해서는 나의 저서 군데군데에서 언급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 중언부언하고 싶지 않습니다. 영국의 형이상시의 특성은 형이상적 존재의 인식, ‘사상과 감각의 통합’ 같은 특성을 들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가치를 무시하거나 놓치지 않고 통합하려고 하면 그런 것이 다 내려다보이는, 그리고 사정(射程)에 다 들어오는 높은 시점(視點)이 필요합니다. ‘이천시물’(以天視物)이라고나 할까, 그런 고지(高地) 말입니다. 높이도 한계가 있겠지만, 나는 그 시점을 형이상적 존재의 시점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기독교나 불교의 시점을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최고의 실재가 가진 시점도 있을 것입니다. 낮고 좁은 공간의 시야는 편견과 한계가 있습니다. 주지시는 무엇보다도 낮고 좁은 한 지역으로 편협된 공간의 한계성을 초월할 수 있는 ‘형이상적 시점’의 확고한 설정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형이상시의 방향이나 방법이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상이나 요소의 감정적, 지역적 분열에 편승한 편협이나 일방통행 같은 것은 안 될 것입니다. 일종의 이상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통합관계의 큰 원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현재의 우리나라의 시의 흐름은 좁고 편협된 서정과 관념 일변도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편협하고 위험한가는 광복 후 오늘날까지 우리가 살아온 역사를 되돌아보아도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의 역사에는 지성(知性)이나 지식이 많이 결락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선박이 폭풍을 만나 한쪽으로 기우러지는 것 같은 그런 한심스러운 유행현상을 목격하게 됩니다. 감정이나 관념이 선동의 바람을 타고 전염병처럼 온 사회를 뒤덮는 현상도 보게 됩니다. 소월이나 미당의 시가 우리 사회나 한 시대의 감수성 전체를 사로잡는 것을 자연적인 현상으로만 볼 수 있겠습니까. 역사의 마스크를 쓴 관념주의만의 횡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점에서 건전하고 통합적인 감수성(sensibility)의 향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위적 차원에서나 현실적 차원에서 제기되는 이러한 근원적 요청과 그 방법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사상과 감각의 통합’이라는 것도 일종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감수성의 입장에서만 보지 말고, 사물이나 역사의 참된 지각이라는 차원에서도 보아야 하겠지요. 주체, 대상, 기호의 미적 조화와 통합, 이상과 현실과의 조절, 사이버와 실재 빛 아날로그와 디지털과의 관계 정립도 서둘러야 할 것입니다. 새타이어, 아이러니, 역설, 야유, 인유(引喩), 유머 등 그 방법도 다양합니다. 앞에서 김기림(金起林)을 주지시의 남상으로 보았습니다만, 그의 장시 <기상도>는 미숙하긴 하나 주지적 방법의 보고로 보입니다. 그 뒤의 김현승의 형이상적 존재 인식, 송욱의 비판과 풍자, 김남조, 홍윤숙의 형이상성(두 분이 모두 가톨릭입니다), 박진환의 풍자와 해학 등이 있습니다만 지금은 이것들이 모두 분열된 채 제 각각입니다. 장시(long poem)의 시도도 주지시의 주요한 장르로 추가해야 되겠지요. 우리는 몇몇 시인들에게서 기대를 가져봅니다.심상: 선생님이 구상하는 주지시의 얘기는 잘 들었습니다. 시인들에게는 높은 ‘형이상적 시점의 설정’이 절실하다는 말씀은 감동적으로 들립니다. 공자의 “인에 사는 것은 아름답다”(里仁爲美)라든지, 안연이 죽자 “아하, 하늘이 나를 망쳤구나”(噫天喪予) 등의 시점도 주지적 관점이라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불교의 공관(空觀)이나 열반, 자유에의 의지 등도 높은 시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점 설정도 어렵지만, 통합원리의 발견, 구성방법의 정립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선생님의 주지시 구상은 동양적 지성의 도입이라는 점에서 영국의 주지시와는 다른 것 같습니다. 보다 한국적 역사나 현실의 반성에서 탄생한 주지(主知)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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