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미역국 끓는 소리 본문
일찍이 나를 지으시고 기르신, 이제는 팔순을 넘겨 괄괄하던 성질도 황소고집도 다 둥그래지신 우리의 황여사께서는 어린날의 엉뚱한 내게 늘 이러셨어요.
"에라이, 이놈아 밥풀로 새를 잡아라."
이 말씀의 본질은 이럴 거에요. '무언가를 행할 때는 그에 합당한 준비를 하고 행하라.' 글을 쓰는 김에 말을 참 진중히 다스려서 이쯤이지 어디 그렇게야 풀겠습니까.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릴 뻗어라'라 해도 또 그쯤일 말....시가 조금은 그런 편에 속하는 것들 아닐까요. 어쩌면 누울자리를 보고 다릴 뻗는 게 아니라, 누운 자리에 맞게 다리를 뻗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밥풀로 새를 잡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시의 본령이라 할 만 합니다. 본디 시란 아주 작은 것으로 세상의 큰 이치를 꿰는 것이라니까.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하실 분들이 계시겠지만, 불의 발화점은 아주 미약하기가 그지없지요. 작은 불씨 하나가 마침내 일렁거리며 커져서 그 근동을 집어 삼킬 때, 우리는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익숙한 표어를 저절로 떠올리게 마련이지 않은가요.
시는 그쯤일 거에요. 흔히 보아온 아주 작은 실생활의 이치를 그럴 듯한, 이미 있는 형상과 실재적 사안들을 이어붙여 그것이 꼭 그럴 양 존재할만한 어떤 사실로 인식하게 만드는 거죠. 순전한 내 생각임을 전제로 문성해는 비교적 젊은 편에 속하지만 시를 쓸 때만큼은 제법 늙은 이처럼 행세하는 시인입니다. 그가 다스려내는 언어와 질료들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의 시는 결코 우리가 아는 상상력의 틀을 넘어가지 않아요. 어디 먼 데서 낯설거나 이질적인 사물을 빌어오지도 않고요.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시적 세계를 손 안에 그러쥘 줄 알죠. 정말 괜찮은 시가 어떤 낯설고도 위대한 어떤 '촉발'에서 오는 양 그것을 찾으려 온 세상의 학식은 다 뒤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시는 바로 우리들의 옆, 어디 먼 데가 아닌 여기, 당신의 숨결과 나의 손톱에 낀 때에서 오는 것임을 그는 어렵지 않게 흔한 것들을 통해 보여줍니다. 어렵지 않고 흔한 것이니 그의 시는 쉽고 정확하지만, 또 그걸 훔쳐보면서 이 이런 것이구나! 할 때의 우린 막상 끄덕인 것임에도 별다른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하게 됩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거기에서 우려내는 시, 실은 그게 제일 어려운 시쓰기가 아닐까요. 우리가 현실 속에서 행하고 실천하는 철학을 고매한 철학자가 우아한 자세가 되어 움켜쥔 '실존'이니 '자아'느니 할 때 말이 돌연 각을 세우고 낯설어지는 것처럼 말이죠.
미역국 끓는 소리
문성해
방에 누워 부엌에서 미역국 끓는 소리를 듣는다
비릿한 미역줄기들이 커튼처럼
우리 집 창틀에 매달리는 걸 본다 그 속에
미역줄기 같은 머리를 감고 죽은 앵두집 아이도 보인다
그 아이의 심하게 접힌 다리가 이상하게도 펴져 있었다
저수지에 빠져 죽은 그 아이
그곳에선 앉은뱅이 다리가 쉽게 풀리더라고
부러진 의자들도 수초처럼 물결에 흔들리며 서 있다고
그곳에선 모든 것이 펄펄 끓는 춤이더라고
방안에서 듣는 미역국 끓는 소리는
다급하게 누군가 우리 집 지붕을 열려고 들썩거리는 소리 같다
장롱 속 이불들이 들썩거리고
옷장 속 개어진 옷들이 천천히 일어서고
저수지 아래 가라앉은 내 노래가
서서히 비등점을 향해 끓어오를 때
시집 <자라> 창비사
돌이켜보건대 <자라>가 세상에 나올 무렵, 시인은 젖먹이를 기르는 새댁이었을 거에요. 그의 시집 <자라> 곳곳에는 육아기의 파편들이 제법 여기저기 있기도 하구요. 그네 부부 안팎이 모두 글로만 먹고 살자던 전업작가였으니 아마도 살림에 궁끼가 적잖이 돌았을 겁니다. 출산 직후의 수유기 즈음에 쓰인 시로 보이는 이 시는 '미역국 끓'이는 소리를 부엌쪽에서 들으며 쓴 것처럼 읽힙니다. 산모에게 미역국을 먹는 일은 지겹고도 온당하며 또 의무 같은 일이었을 테구요. 그런 시절을 그녀는 시쓰기를 통해 자신을 달래고 있습니다. "방에 누워 미역국 끓는 소리를" 시로 쓰고 있는 거지요. 이때 시인의 자세가 아이를 향해 열려있거나 신생아의 이미지를 제어하는 것은 그녀의 시가 아기를 향해 나아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초보들은 당연히 미역국을 끓이는 이유의 보편타당함을 역설하기 위해서, 혹은 자기 한탄 내지는 부지불식 간에 자기도 모르게 주변환경을 주워섬기는 우를 범하지만, 시인은 이미 아마추어가 아니니 그런 실수를 저지르진 않습니다. 단지 미역국의 미끄러운 이미지와 미역의 흐느적거리는 것을 자기식으로 당겨 쓸 일을 예비하면 그만인 거죠. 정해진 방향쪽의 필요한 것들을 꺼내와 이미지화 하고 표현하는 겁니다.
이제 미역은 끓는 솥단지에서 머무르지 않고 시인의 눈을 빌어 닮은 이미지를 찾아 나섭니다. "커튼처럼/ 우리 집 창틀에 매달리는 걸 본다" 가 그것입니다.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우리들처럼 미역의 닮은 꼴을 커튼에서 발견하려고 몸부림치지 않는 것이지요. 누가 봐도 커튼은 미역줄기 같으니까? 아닐 거에요. 시인은 그쯤이라야 솥단지 안의 미역이 현실의 어떤 비릿하고 흐느적이던 한때를 향해 승압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거죠. 경험이 그런 것을 알게 했을 겁니다.
안다는 것은 사실 그냥 오지는 않아요. 얼마나 많이 오래 썼는가, 이런 상황에서의 숱한 시행착오를 수정하며 오늘에 이르렀을까를 여러분은 인정하고 끄덕이지 않으면 안 될 겁니다. 이것이 즉발적인 현현이든 계산된 등장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머리 속에 떠오른 심미적 현상을 눈앞의 실재적 현상으로 사실감있게 치환한다는 것은 연금술의 기초가 되니까요. 잊지 말이야 합니다. 이것은 영원한 시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이치에요.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시쓰기를 연습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데 그 과정에서의 오류가 눈에 띌까요. 누가 무슨 충고를 건넨들 또 알아들을 수 있기나 할까요.
시는 물에 빠져 자신의 머리를 감고 죽은 "앵두집 아이"를 떠올리며 진행됩니다. 역시 미역의 이미지가 직,간접으로 아이의 주변을 둘러싸는 군요. 이래야 돌연한 추체험을 시적 흐름의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요. 물속의 이미지는 끓는 미역국에서 1차적으로 환기되고, 미역 자체의 흐느적임을 통해, 물에 빠져 죽은 앉은뱅이 아이의 이미지를 통해 거듭 환기되며 마지막의 화자가 속한 세계마저 물속으로 당겨놓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죽은 아이의 등장이 돌연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미 미역의 이미지와 물속의 이미지 등으로 아이의 등장 자체를 예비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겁니다. 시에 의하면 몰속은 또 그런 곳이 되기도 합니다. 죽은 아이의 펴지지 않던 다리가 펴지고 물속에 가라앉은 부러진 다리의 의자 마저 흔들리며 태연히 서 있는 곳. 나아가 '펄펄 끓는다'는 이미지를 한 번 더 밀어가서 물풀의 흐느적임을 춤으로까지 밀어가는 공간입니다. 죽음을 통해 재생, 혹은 신생으로 밀어가는 '물속'이라는 공간은 물이 가진 상징 때문에 당연하고도 타당한 끄덕임을 갖게 만듭니다. 시적 공간의 축조입니다
마지막 연은 수미상관의 구조를 향해 진행됩니다. 처음부터 쓰인 여러 소재들을 한데 묶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단순한 묶음에 그치지 않고 시를 마무리하기 전에 다시 한번 활용하기도 하죠. 시인은 자신이 누워있는 방을 닫힌 공간으로 제한하지 않고 미역국 끓이는 소리의 이미지를 변주해 "다급하게 누군가 우리 집 지붕을 열려고 들썩거리는 소리"라고 상정하기에 이릅니다. 물속에 빠진 아이를 건져올리려는 손길을 연상시키는 이 이미지를 통해 시인은 지나간 2연을 다시 한번 추스른 뒤 자신의 일어서서 움직이는 살림들에게도 신생의 이미지를 덧씌웁니다. 이로써 마지막 행 "저수지 아래 가라앉은 내 노래"는 단순한 닫힌 결말을 벗어나 물속에 빠져 죽은 아이와 누워있는 화자 자신을 수렴하는 구조를 갖기에 이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등점을 향해 미역국이 끓습니다. 그것은 국이면서 죽은 아이를 달래는 비원이기도 하고 오래 전에 부르던, 저수지 바닥에 가라앉아(기포로 부글거리고 있을) 자신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방에 누워서 듣는 단순한 미역국 끓는 소리(밥풀)에서 시인은 마을 밖의 저수지와 비린 또 다른 생과 자신의 어떤 상처를 다함께 끌어안음으로써 삶의 보편(새)적 관점으로 열어놓는 겁니다. 독자에게 함께 하자고 제안하는 것이죠.
우리들의 대부분의 시는 그저 시에 부속한 공간에서 시작하고 그 공간에서 그칩니다. 시적 공간을 축조하려 애쓰거나, 유기적인 이미지 활용을 위해 힘을 쏟기는 하지만, 언어의 환기력을 활용하는 대신 이미지의 연결부에 수식(꾸밈)을 첨가하는 것으로 보정하려 합니다. 이때 대부분의 꾸밈은 이미지의 수려함을 갉거나, 정작 중심부를 흐릿하게 만드는 단초가 되곤 합니다. 시적 의미들 역시 보편적 생의 비의를 건드리기는 하지만 대체로 그것을 새로운 관점으로 확대 재생산하거나 열린 결말로 치환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합니다. 정말 배워야 하는 것은 말을 다스리고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말을 부추켜서 애초의 활달한 말의 힘을 역이용 하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말을 타고 몰아 구경꾼을 동반한 채 작자가 이르는 곳까지 동행시키는 일입니다.
- 붙임: 이 글은 비평이 아니다. 무엇이 시를 시답게 하는지, 무엇을 시로 쓰는지, 우리는 정작 어떠한지를 되묻기 위한, 여기 머무르는 이들을 향해 쓰는 일종의 목적이 포함된 잡글이다. 그러니 글의 빈 데가 많은 질낮은 글이 될 것이다. 낮은 글의 수준을 탓하시는 것은 좋으나 부디 자신의 시쓰기에서 참고할 것이 있는지를 살펴주시기를 바란다. 조금이라도 그런 부분이 있다면 삼가 욕도 살로 붙을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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