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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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현대시학〉작품상
왼손의 그늘 (외 4편)
우대식
용서하라
용서하라
용서하시라
이 가을날 나의 사랑을
얼마 남지 않은 저 잔광의 빛으로
당신을 몰고 가는 일
그것이 내 연애법이다
그 몰입에 얼마나 당신이 괴로워했을 줄
모든 빛이 꺼지고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처럼
당신과 내가 어느 풀밭에 앉아 있다 하자
젓가락을 들어 당신은 내 입에 음식을 넣어준다
음식 밑에 바쳐진 당신의 왼손
그 아래로 그늘이 진다
왼손의 그늘,
지상에서 내 삶이란
당신이 만들어준 왼손의 그늘에서 놀다 가는 일
놀다가 가끔 당신이 그리워 우는 일
코스모스처럼 내 등을 툭 한번 쳐보다가
돌아가는 당신의 늦은 귀가
그림자가 사라질 때
나의 연애는
파탄의 골목길
용재 오닐의 비올라 소리 같은 깊고 슬픈
당신의 오랜 귀가
—《문예중앙》2012년 가을호
신폭(神瀑)에 들다
윈난성 신폭 아래
객잔에 들었다
숯불을 피우고 당신이 오기를 기다렸다
쿵쿵 발자국 소리가 들렸지만 먼 당신은
가끔 눈사태만 엽서처럼 보냈을 뿐
흔적이 없다
떡을 떼어 객잔의 창으로 흐르는 눈발에 섞어 먹었다
반야의 밤에 달이 떠오르면
야크의 젖통은 부풀어
신의 나라에서 온 것 같은 울음소리를 냈다
아무것도 나를 지우거나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붉은 숯불이 잦아든다
국경 아래 뜬 달이 조금씩 기울면서
그 아래를 걷는 당신의 모습이 보인 듯도 했다
환상 속의 당신
그대 어깨가 붉어진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무명도 무명의 다함도 없다는 설산 국경에서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당신을
기다리던 한 생(生)이 있다
—《문예중앙》2012년 가을호
시(詩)
시는 나를 일찍 떠난 내 어머니였으며
왜소했던 내 아버지의 그림자였으며
쓸쓸한 내 성기를 쓰다듬어 주던 늙은 창녀였으며
머리에 흐르던 고름을 짜주던 시골 보건소 선생이었다
시는
마당가에 날리는 재[灰]였으며
길을 잃고 강물 따라 흐르는 밀짚모자였다
폭풍전야, 풀을 뜯는 개였으며
탱자나무 가시 아래 모인 새이기도 하였다
늘 피가 모자라 어지러워하던
한 소년이 주먹을 힘껏 모았다 피면
가늘고 푸르게 떨리는 정맥
그곳에 시가 파랗게 질려 있었다
—《미네르바》2012년 겨울호
아버지의 발자국
꾹꾹 눈 쌓인 산소를 밟으며
무슨 대답을 해야 합니까
무엇을 물어도 답할 수 없습니다
어린 날 만종 驛 어느메 즈음에서
당신과 함께 걷던 먼 들판을 기억합니다
그 들판에 눈도 내리고 저녁놀도 지곤 하였습니다
오늘 당신과 나의 거래(去來)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가고 무엇이 왔습니까
아마도 번뇌 같은 것이겠지요
그물과 같이 던져진 그것
눈이 시린 하늘을
새가 날아오를 때
당신과 나의 거래는 원만히 성사된 것이지요
이제 다시 만종 驛 즈음에서 서성입니다
기사 식당에 들어가 혼자 밥을 먹고
다시 길을 걷습니다
풀리지 않는 답
이것이 저의 대답입니다
아버지의 발자국이 흐려졌습니다
—《시와 미학》2012년 가을호
겨울날의 모든 저녁은 슬프다
지옥을 유예하는 꿈을 꾸었다
내가 원한다면 다음 생애를 이어가며
지옥을 영원히 유예할 수 있다는 꿈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영원 너머 한 번은 그곳에 가야 한다는
괴로움에 몸을 떨었다
지상의 소시민이
이렇듯 큰 생각을 하며
지옥 아래 마을을 떠돈다는 사실이
조금은 쓸쓸했다
추운 겨울 저녁
들기름 바른 김을
숯불에 굽던
옛집으로 돌아가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눕고 싶다
오한 속에서 만나는
지옥의 야차와 일대의 싸움을 끝내고
오랜 잠을 자고 싶다
겨울날의 모든 저녁은 슬프다
봉당에 켜진 알전구처럼
겨울날의 모든 저녁이 나를 기다렸다
—《유심》201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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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대식 / 1965년 강원 원주 출생. 숭실대 국문과 졸업. 아주대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시집『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단검』『설산 국경』. 산문집『죽은 시인들의 사회』. 현재 평택 진위고등학교 교사, 숭실대 국문과 겸임교수.
▮ 작품상 심사평 중에서(발췌)
특히 매회 수상자에서 비껴간 우대식의 시가 이번 수상 대상자로 심사위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우리 시의 흐름이 지닌 어떤 영악스러운 계산성에 그가 그동안 편승하지 않고 묵묵히 극복해가고 있는 자세 때문이었을 것이다. (...) 나는 그의 어눌한 연애가 갖는 그만의 파탄의 골목길을 훔쳐보는 것을 좋아한다. <왼손의 그늘>! 그것이 보이기까지 그가 걸어온 길이 바로 파탄의 골목길이다. 그 삶의 환유를 우리는 소중하게 읽어야 한다. — 정진규
우대식의 시에는 살아온 자기 생의 상처가 있고, 고뇌하는 자기 생의 사유가 담겨 있다. 언어로 그린 간결한 이미지의 데생 같은 우대식의 「시詩」는 지금까지 살아온 시인의 가파른 삶의 궤적을 나타내 보인다. 자기 삶과 시와의 대비가 간결하고 극명하게 드러나 있는 이 같은 우대식의 진일보한 화법은 시로서의 높은 성취를 보여준다. — 김종해
그의 시 가운데 「왼손의 그늘」에서 그 떨림은 사뭇 독특한 반향을 일으킨다. ‘지상’의 화자가 ‘놀다 가는’, 그러다가 ‘당신이 그리워’ 울 수밖에 없는 ‘당신이 만들어준 왼손의 그늘’은 황량한 만큼 아름답고 아름다운 만큼 황량한 역설의 미학을 드리운다. — 오태환
시가 만들어주는 <왼손의 그늘>에서 놀다 가는 일이 얼마나 쓸쓸하고 애틋한지 그는 늘 돌아가려는 곳이 있어 보인다. 그곳이 고향 같기도 하고 애인의 품속 같기도 하고 그가 추구하는 시의 아름다움이 완결되는 곳 같기도 하다. — 조말선
—《현대시학》2013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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