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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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모음

7월의 시

연안 燕安 2012. 7. 10. 23:31

트럭 / 하린


트럭, 하고 공기를 토하면
거대한 밤이 질주해온다 살다 보면 폭력적인 기계를 몰고
고속도로를 점령하고 싶은 밤은, 꼭 온다
너는 비행소년에서 비행청년으로 자라고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을 엔진으로 장착한다
방향지시등이 고장 난 삶에서
넌 애인에게 예민한 급소를 들킨다
건기 내내 굶주린 사자처럼 넌 너무 오래된 이빨을 숨겼다
천천히 혈관을 따라 불법제조한 분노가 주입되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혁명이 끓어오른다 식상한 표정으로
어머니가 시야를 흐린다
얘야, 넌 너무 착하단다 이제 그만 일하러 가야지
어머니가 걸어갈 때마다 등 뒤에선 사리(事理)가 뚝뚝 떨어진다,
B급 기름 같은 아버지와
길들여지지 않는 애인과 마이너스 통장을 보고도
그런 악몽을 견디다니
어머니는 트럭보다 무서운 기계다

아, 씹어 먹고 싶은, 으깨고 싶은
밤은, 꼭 온다
트럭, 하고 입을 벌리면 신호등이 녹색불로 바뀌고
불만을 가득 채운 가스통을 싣고 트럭들이 몰려온다
어제도 그제도 백 년 전에도
너는
나는 방치된 유전자다



해킹 / 오세영

광에 보관해 두었던 감자가
하나둘씩 사라지고 없다.
서너 개는 쏠린 채로 나뒹군다. 몇 개의 양파도……
천장에 구멍이 나 있다.
쥐들의 해킹,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필시 저 구멍은
방과 뜰과 골목으로 거미줄처럼
엮여 있으리.
담낭선근종(膽囊腺筋腫)이라는 병명을 몰라
마우스로
인터넷을 서핑해 본다.
한 마리 쥐가 이리저리
잽싸게 뛰어다닌다.
문득
초등학교 시절의 어느 소풍날
신 났던 보물찾기 놀이를 떠올려 본다.
아하, 이리저리
아무것이나 이득을 좇아 살아온
내 한생은 기실
그때 배운, 숨은 보물찾기에 다름이
아니었구나.
한 마리 쥐였구나.

시집『마른하늘에서 치는 박수소리』


미완성의 연애들 / 박종인


언제부터인가 그가 나를 읽기 시작했던 것 밑줄을 그으며 나를 줄줄 외우고 있었던 것 눈치 챈 페이지부터 나도 조금씩 그에게로 빠져나가고 있었던 것 누가 알까 맘을 덮어 버리려 할 때마다 자신을 활짝 펴내 맘을 차지할 궁리했던 것

나 역시 그 페이지를 넘기기 싫었던 것

우리는 서로에게 행복한 한 권의 책이 되고 싶었던 것, 밀고 당기며 목차를 정하고 달콤한 소제목을 달았지만 정작 제목은 달지 못해 전전긍긍했던 것 제본이 잘 못될까, 쪽수가 빠질까, 내용을 추가하고 각주를 붙이며 편집을 하는 동안, 탈자와 오자가 발견되고 내용이 부실한 책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


한 권의 책이 출판되기 위해 더 많은 퇴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연애가 사라져 버린 것

미완성의 책과 폐기된 책, 두어 권, 혹은 서너 권은 누구에게나 있는 그것.

<시와사상> 2012년 여름호


기념일/ 이장욱

식도에서 소장까지
기념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
우리는 꼭꼭 씹어먹는다.
위를 기념하고
쓸개를 기념하고
무엇이든 녹이는 침을 기념하고

오늘은 누군가의 기일이며
전쟁이 있었던 날,
창밖의 구름은 지난해의 농담을 닮았고

농담에는 피가 부족하다.

어제까지 어머니였던 이가
오늘은 생물이라고 할 수 없고
아이는 하루 종일 거짓말에만 흥미를 느끼고
식물들의 인내심은 놀라워.

이빨을 드러낼 수 있는 것들에게는 반드시
식도가 있고
외로움이 있을 것이다.
지구의 공전이 계속되자
지난해의 농담들이 사라졌다.

흰 떡 위에 수많은 이빨이 돋아나고
우리는 무엇이든 꼭꼭 씹어먹고
모두들 별의 속도를
천천히 이해했다.

시집『생년월일』에서


그것을 후회하기 위하여 / 신용목

나는 후회가 많은 사람이지만
아침마다 눈을 뜬다, 가장 분명한 당위는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을 후회하기 위하여

나무들은 침묵으로 자신을 견딘다,

눈부신 높이의 부르튼 침묵 속에서

아무도
운명에 의견을 제출한 적 없다―내가 사는 곳에는 네 이름을 대신하는 기둥들이
푸른 지붕을 올리고,

흔들리는 창문으로 흔들리다 물드는 창문으로 물들다가 떨어지는 창문으로
떨어지는 잎들이

깨지는 창문으로
어른거리는 땅 속에 녹슨 유적처럼 환하게 박혀들 때,

엘리베이터는 자주 중세를 지나간다, 지하 1층에서 발굴되는 것들―아름다운 창문을 달고
툭, 꺼지는 조명처럼

나의 절망은 고대에 묻혀 있다
지하 2층

아무도 파보지 않는 깊이에

내가 사는 곳에는 새들의 지저귐이나 골목 어귀에서 나 대신 머리를 감싸 쥐고 쭈그려 앉은 젊은 남자

네가 보고 싶어서,
나는 4층에 산다 30억 년쯤 뒤의 지층에

나무는
깨진 그림자를 땅 속에 박아놓았다―뿌옇게 번지는 빛의 뿌리들

나는 후회가 많은 사람이지만 날마다 멀리 고층아파트 불빛을 바라본다
우리의 미래가 닿을 수 없는 시간을

<문장웹진> 2012년 7월호


피안(彼岸) / 이은림

저 집들, 언제 강을 건너
저렇게 무덤처럼 웅크리고 앉았나
아무도 몰래 건너 가버린 저 산들은
어떻게 다시 또 데려오나
젖은 길만 골라 가는 낡은 나룻배가
산과
나무들과 꽃들,
풀밭을 다 실어 나를 건가
남아있던 불빛마저 참방참방 뛰면서

저편으로 가는구나
환하다,
내가 없는 저쪽



선인장 입구 / 강정

“표적은 죽음으로써 긴장과 공포로부터 해방되지.
그것 때문이지, 그렇게 웃는 얼굴이 되는 건.”
—스즈키 세이준 감독, 영화 〈피스톨 오페라〉에서

상처를 천 년 정도 문지르면 꽃이 필까
이 몸이 만 년을 견디는 나무가 될까
그러나,
가시는 최초의 고백이거나
최후의 사정射精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입술이 천지를 헤매다
한낮 소나기로 지난밤의 지도를 바꾼다
우뚝 선 허공에 물기가 마른다
은박銀箔을 두른 태양이 애인의 머나먼 창문 앞에서 혼절한다
신기루 같은 기억의 방사선이
대기의 과녁으로 떠오르면
나는 백 개의 다른 이름으로 쪼개져
세계의 궁륭 깊숙이 칼침을 던진다
마지막 물기를 베어 물고
낱낱의 공기입자로 바스러지는 바람
매 순간의 절벽 앞에서
사랑은 더운 향기를 깨물고
온몸에 가시를 두르는 천형 아닌가
독 오른 신열이 한 줄로 꿰어내는 땅과 하늘 사이
숨어 있는 빛의 허물이 이 몸 안에서 눈뜰 때
뭇매 맞은 영혼들 데불고 천진한 원귀寃鬼를 두드려 깨우리
이곳은 대지의 마지막 문
제 몸과 사별하는 도마뱀과
만 년을 침묵하는 이구아나와
시체를 먹고 살찐 까마귀 떼도 정렬하라
최선의 종말로 최악의 이해를 얻는,
웃음이 가시로 뻗친 초록의 총구銃口 앞으로


작약 / 조정인

꽃을 소비한다, 콸콸

물 쓰듯 쓴다 농담처럼 휴지처럼 꽃을 풀어쓰고 그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식장엔 꽃들의 그을음이
툭툭 발에 차인다

어느 봄날 석양 근처였나, 빛이 피로 바뀌는

7천 럭스의 작약꽃밭이 불쑥 켜졌다, 고요의
밀집이었다 붉은 환등이었다 혹자는 빛의
번안이라 수학의 궁구라 했다

수혈과 누수, 수로작업이 동시에 진행되는 꽃밭으로
(∞)을 긴 그림자로 거느린 침묵이 다가섰다 연필을 귀에 꽂은
늙은 수학자의 걸음걸이로 무릎이 튀어나온 낡은
멜빵바지를 입은 그는

빛과 그늘의 희고 검은 도형들로 가득한 공구함을 들고
은발을 반짝이며
……

—작약은 매립지 반경 10킬로미터 일대를 환하게 비추었다

《현대문학》2012년 7월호




사과꽃망울 / 배진성

득음을 위한 독공이 한창이다

사과나무 속에서
고려청자 굽는 소리 들린다
조선백자 깨뜨리는 소리 들린다
수없이 많은 사금파리들이 쌓인다

사과나무 속에서
사과를 미리 빚어보고 구워보고 깎아본다

벚꽃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
성질 급한 봄꽃들이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와도
사과나무는
진득하니 사과나무 속에서 사과만을 만들고 있다

울컥, 울혈을 토해내고 있다




스테이플러 / 윤성택

기차는 속력을 내면서
무게의 심지를 박는다. 덜컹덜컹
스테이플러가 가라앉았다 떠오른다
입 벌린 어둠 속,
구부러진 철찜마냥 팔장을 낀 승객들
저마다 까칠한 영혼의 뒷면이다
한 생이 그냥 스쳐가고
기약없이 또 한 생이 넘겨지고
아득한 여백의 차창에
몇 겹씩 겹쳐지는 전생의 얼굴들

철컥거리는 기차는 멈추지 않는다
촘촘한 침목을 박으며
레일이 뻗어간다


2012년《현대문학》신인추천 당선작

파수(破水) / 김영미

일찍이 나는 물의 파수꾼

운동화를 적시며 여름이 오고 있었다
우리들의 여름은 지킬 게 많았다
지킬 게 많다는 건 어길 게 많다는 것
계절은 지겹도록 오래될 텐데
우리들의 여름은 처음처럼 위험했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풀장에 다이빙하고 싶어
수박을 던지면 젖살 같은 과육이 흩어졌다
어기면서 지킬 것들을 만들어가는
우리들은 매번 덜 익은 계절
물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화장법을 배우며
눈물을 다듬었다

경계할수록 너는 더 빠르게 흘러갔다


모래내 9길 / 김영미

너는 문제가 어렵다고 했다
나는 네가 더 어렵다고 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독서신문에 찍힌 학교의 주소를 본다
모래내 9길 내가 지금 앉아 있는 곳
모래내 그 길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내 곁을
혹은 내 앞을 지나갔을까
길 위에서 흩어져버린 모래알들
창밖으로 경의선 열차가 지나갔다
백 년 전에도 서 있던 축구 골대처럼
나는 이끼 빛으로 녹슬어
내 기억은 어느 밤 저 열차를 탔던가

죽음을 예감해도 즐겁지 않은 저녁이 있다
나는 막 출발하려는 기차처럼 기침을 시작했다

너보다 더 어려운 무엇은 없었다


낙양고분박물관 / 김화순

지하에 깊이 묻혀있을 시간들
적당한 불빛 아래 죽음으로부터 불려나온 황실 여인
저 여자의 육체가 한때 한 나라의 왕을 후렸을까
삭은 옷매무새에 아름다움과 음란함 마저 전시되어 있다
과학은 그녀의 뱃속에서 아기의 흔적을 읽어내고
이천 년 전 먹은 위 속의 참외씨도 찾아냈다
한 나라의 거룩한 징조를 알려주던 청동 대야는
성묘객이 내민 지전을 받고 쟁쟁쟁쟁,
청동빛 녹슨 기억 뱉어내고 있다
낙양성 십리 하에 사라진 영웅호걸들
모두 이곳에 누워있다
유보된 죽음을 응시하는 저 거리가
이 세상 꽃 피고 지는 사이일까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는 복원된 기억 어디쯤
나의 미래도 흐르고 있는가
순장된 시간이 나날이 새로움을 낳는
공간과 시간이 무한히 축소된 거대한 관
밖으로 나오자
아득한 시야 너머 짙푸른 초록들
와락, 빨려든다

시집 <시간의 푸른 독> 2012년 천년의시작


재구성되는 저녁 / 이정란

빛들이 다시 빛이 되기 위하여
재구성되는 저녁 분위기에 동참한다

기다렸다는 듯
새들이 공기 알갱이 속에서 새어나와 날개를 찾아 단다
소리로 재해석된 일조량에 바코드가 찍히고
파쇄된 햇살조각들은
일찍 문 닫은 갤러리 유리문 앞에서 없는 귓바퀴를 만지고 있다

나는 직립을 버리고 길 준비를 한다
당신 눈에 보이는 서 있는 사람들은 허상이며
당신 발을 끌고 다니는 그림자를 잘 솎아내야
달의 명도가 높아질 것이다

방금 뒤집힌 모래시계 안에서 사막이 깊어지고 있다
사막은 이 저녁에 닿기 위해 건너야 했던
나와 당신 밀고 당김의 시간 부스러기

그 속으로 손을 찔러 넣으면 따뜻하고 말랑한
심장이 만져진다, 이 저녁에 닿게 한 오아시스의 원천

새들이 날개를 떼어버리고 내일의 공기 속으로 들어간다
날개를 받아 파란 달을 만들어 공중에 띄운다
하늘이 희미해지는 사이, 그림자를 비틀어 고문했던 순간들을 회상한다

<미네르바>2010년 겨울호


시간의 천국 / 김길나

이곳, 시계포의 시간들을 아나키즘이 장악중이다
시간의 질서가 어긋난 공간에서 시간은 따로따로 혼자씩 제멋대로 돌아간다
현재가 부재중인 이 시계포에는 고장 난 오늘이 걸려 있다
수많은 시계들이 한결같이 현 시간을 지워버렸다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좋은 이 시계포에는 벌써 시간의천국 이란 입간판이 나붙었다
시간의천국에서는 어제와 내일이 나란히 붙어 있다
과거에서 온 정오 곁에서 미래에서 온 밤이 11시를 알린다
계절들은 한자리에 혼재한다
아직도 과거를 운행 중인 시계가 지나간 계절을 펼쳐놓을 때
자전속도가 빨라진 시간에 앞당겨온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를 언뜻 건너다본다
이곳 시계들은 여전히 각각 다른 시간을 보여주고 있다
서로 다른 시간으로 가는 생체시계를 각자 펄떡이는 심장에 달고
이 시계포의 고객들이 시계와 시계 사이, 자유 만발한 꽃길을 오가는 동안,
시계포의 출입문이 닫혀졌다
현재의 출구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시간을 시간의천국이 장악중이다


슈퍼맨의 꿈/ 김경선

하늘대학 항공과 졸업생, 그는 추락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약발이 다 떨어진 슈퍼맨 4년째 악몽에 시달린다 휘날리던 망토는 가시나무에 걸려 궤도 이탈, 배터리는 바닥이다 또 한 차례 사막의 모래바람이 몰려온다 무릎이 푹푹 빠진다 삼각팬티 한 장이 전부인 슈퍼맨, 단봉낙타 등에 빨대를 꽂아 연명한다

모래물결무늬 속에 바다가 숨어 있다 죽은 물고기가 하늘로 튀어오른다 감금 당한 바다가 사라지던 날 키 큰 선인장이 앞치마를 두르고 이젠 안 속아 붉은 눈으로 사막의 중심을 쏘아본다 미라가 사막을 벌컥벌컥 삼켜버릴 거야 한때 슈퍼맨을 지지하던 낙타가 짙은 안개를 변명처럼 게워낸다 붉은 여우도 길의 꼬리를 놓쳤다 사막을 폭식한 슈퍼맨이 달그락달그락 라면을 끓여 먹는다 퉁퉁 불은 달은 오래도록 차갑게 식었다

천하무적 슈퍼맨 모래언덕에 빠졌다 푸드득 조개무늬가 순식간에 날아간다 숨어있던 나뭇잎 무늬도 팔랑팔랑 사라진다 모래바람 소리가 밤새 낙타의 등에 쌓인다 사막에서 건너온 뙤약볕, 미라의 몸에 균열이 생긴다 수북한 모래봉분 속으로 실종된 꿈이 덤덤하게 걸어 들어간다

무덤이 하나 더 늘었다 이제 아무도 슈퍼맨을 믿지 않는다 정보지 구인란을 훑어보는 슈퍼맨 몸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져 나온다 쿵! 침대 밑으로 백수건달 사내가 굴러 떨어진다

시집 <미스 물고기> 2012년 Bookin


맑은 날 / 심창만

마당에 병든 누에를 던졌다
죽기도 전에 새들이 날아와 물고 갔다
누님은 새털처럼 가벼운 나를 업고 빨래를 널었다
하염없이 빛나던 누님의 목덜미
창백한 우물이 소리 없이 흔들렸다
더 가벼워지면 나는
어디에 던져질까

시집<무인등대에서 휘파람> 2012년 푸른사상 시선 17



이자의 거리 / 맹문재

이자의 추락으로 즉사한 한 가장의 사건을
텔레비전에서 특집으로 다루었다
이자학과 대학교수며 이자 전문가며 이자 실무자들이
방송에 출연해 긴급 토론을 벌였다
어떻게 하면 이자의 추락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지
이자의 파편을 막을 수 있는지
부상당한 경우는 어떤 비상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논의가 분분했다
간판같이 내걸린 거리의 이자는
언제 추락할지 몰랐다
바람이 불거나 눈비가 오는 날
확률이 더 높다는 연구 발표가 있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이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텔레비전의 특집 방송 날에도
거리로 몰려들었다

바위 / 문태준

풀리지 않는 생각이 하나 있다
새의 붉은 부리가 쪼다 오래전에 그만두었다
입담이 좋았던 외할머니도 이 앞에선 말문이 막혔다고 한다
나뭇짐을 내다 팔아 밥을 벌던 아버지도 이것을 지지 못했다고 한다
어느덧 나도 사랑을 사귀고 식탁을 새로 들이고 아이를 얻고 술에는 흥이 일고
이 미궁의 내부로부터 태어난 지 마흔 해가 훌쩍 넘었다
내가 초로를 바라볼 때는 물론
내가 눈감을 그날에도 이것은 뒷산이 마을에게 그러하듯이 나를 굽어볼 것이다
나는 끝내 풀지 못한 생각을 들고 다시 캄캄한 내부로 들어갈 것이다
입술도 귀도 사라지고 이처럼 묵중하게만 묵중하게만 앉아 있을 것이다
집 바깥으로 내쫓김을 당해 한밤 외길에 홀로 눈물 울게 된 아이와도 같이
그리고 다시 이 세계에 새벽이슬처럼 생겨난다면 이것을 또 밀고 당기며 한 마리 새가 되고,
외할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고, 마흔 몇 해가 되고……
시간은 강물이 멀리 넘어가듯이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다


길 위의 식사 / 이재무

사발에 담긴 둥글고 따뜻한 밥 아니라
비닐 속에 든 각 진 찬밥이다
둘러앉아 도란도란 함께 먹는 밥 아니라
가축이 사료를 삼키듯
선 채로 혼자서 허겁지겁 먹는 밥이다
고수레도 아닌데 길 위에 밥알 흘리기도 하며 먹는 밥이다
반찬 없이 국물 없이 목메게 먹는 밥이다
울컥, 몸 안쪽에서 비릿한 설움 치밀어 올라오는 밥이다
피가 도는 밥이 아니라 으스스, 몸에 한기가 드는 밥이다

-제27회 소월시문학상 수상작


나이 들어가는 딸에게 / 황연진

열차 타고 벚꽃구경 가자는 말이냐
아서라, 이제 나이 드니 먼 길이 싫다
그러께 겨울 대구 네 이모 집 갈 때
끝도 없이 내리는 흰 눈을 보지 않았더냐
저 눈발이 언제 끝날꼬,
밤새 속이 시려 혼났느니라
지난 가을 설악산에 다녀 올 때도
웬 색색의 낙엽들이 그리 천지에 피었다 깔리는지
불그락 푸르락 세상 울음이 언제 다 그칠꼬,
나는 맘이 섦더라
너희들하고 제주도 여행 갔을 땐
돌아가도 돌아가도 시퍼런 바닷물이 밀려오지 않더냐?
어예 건너지도 못할 이승의 물이 저리 많은고 싶어
나는 눈물 났었다
네 말대로 진해 벚꽃은 속으로 밖으로
제 하얀 살송이를 벌려 얼마나 자지러지게 웃고 있겠느냐?
그 환한 낯 보고 일일이 미소 지어 주기 버거워
가슴은 또 얼마나 애잔해지겠느냐,
너는 아직도 젊은가 보다
피고 지고 끝 간 데 없이 흐르는 것들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힘에 겨운지
저 아파트 현관 앞에 피는 복숭아나무를
에미는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본다
터지는 꽃망울들 새록새록 흐린 눈으로 익히기에는
한 그루 뜰의 꽃나무도 벅차기만 하구나

시집 <달콤한 지구> 2012년 지혜

비의 문양 / 윤의섭


빗방울이 떨어질 때까지의 경로에 대해선 알려진 바 없다
최단거리를 달려왔을지라도 평생을 산 것이다
일설에는 바람의 길을 따라왔을 거라고 한다
해류를 타고 흐르는 산란인 듯
어디에 안착한다 정해졌더라도 생식할 가망 없는 무정란인 듯
구름의 영역 너머로 들어선 빗방울은 추락하지 않는 달을 본다
스스로의 길을 따라 휘도는 성운을 본다
귓전을 가르는 바람소리 속에서도 궁륭 가득 흐르는 神律을 들으며
빗방울이 어떻게 미쳐갔는지에 대해선 알려진 바 없다
살점을 떼어내며 살생의 속도로 치달리는 운명이란
길을 잃고 천공 한가운데서 산화하거나
영문도 모른 채 유리창에 머리를 짓찧고 흘러내리거나
하늘길 지나오면서는 같은 구름의 종족과 몸을 섞기도 했다
나란히 떠나왔던 친구는 어느 나무 밑동에 뿌려져 이미 잠들었다
발을 디디고서야 빗방울은 최초로 신음한다
이 기나긴 침묵으로 흐린 하늘 가득하다
구름으로부터 그어진 무수한 여정으로 흐린 하늘 슬프다
오직 고요의 춤만이 허락된 비행으로 흐린 하늘 눈부시다
지상을 적시며 빗방울은 비로소 몸을 묻는다
천구를 가로질러온 경로다


버찌, 혹은 몰락 / 조정인

바람의 수식을 선율로 바꾸는 자의 손가락이 빠르게 스쳤다
이마가 서늘했다 악보 한 장 몸속 찬 물 같은 어딘가로
깊숙이 떨어졌다

젖은 악보를 짚어가다 열매를 열애로 오독했다 잎사귀 사이
버찌가 얼굴을 붉혔다 봄날은 그렇게 번졌다

거뭇거뭇 낭자(狼藉)한, 봄날의 혈흔을 밟으며 나무 아래를 간다
사랑은 스스로 혹독하여 스스로 단두대를 세운다

종내 나는 당신께 옮아가 다 털릴 것이다 소거될 것이다
당신에게로 가서 무수히 죽을 것이다 이것은 사랑의 희미한 기원
당신의 과원은 어디 있나, 그곳에 당신은 계신가

<작가와 사회> 2012년 봄호





우울의 왕 / 유홍준


저수지는 우울해 저수지는 우울하고 답답해서 물안개를 피워 올리고 수양버들을 드리워

궁뎅이가 착 달라붙는
추리닝을 입고

엉덩이와 팔꿈치를 있는 대로 흔들며 빠른 걸음으로 저수지를 도는 사람은 흥, 다이어트 좋아하시네! 알고 보니 저이는 약을 먹는 환자
머릿속에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몇 개가 산다네

돌지 마라 돌지 마 돌지 마라 돌지 마

저수지에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은 왼종일
담뱃불을 붙이고 온몸에 비늘 달린 것을 기다린다네

저수지는 우울해서 둘레를 만들고
저수지는 우울해서 깊이를 만들었네

저수지는 둑에 홀로 앉아
수면을 바라보는 저 노인은 이마에 물결무늬 주름을 드리운 우울의 왕이라네

<시와 세계> 2012년 여름호


하얀 접시에 올라온 하얀 가자미 한 마리 / 김승희

나는
‘나는’ 이라든가 ‘내가’ 라든가 하는
말을 잊어야만 한다고
또한 ‘나의’라든가 ‘내’라든가 하는 말도 다 버려야만 한다고
바다처럼 푸른 식탁보가 깔린
작은 나무식탁 앞에서
하얀 접시에 올라온 하얀 가자미 토막들을 보면서
문득 생각나는 것이다

이 은은하고 도도한 광채 어린, 이 접시는 속삭인다
흰 살 가자미의 토막, 껍질, 지느러미, 빼낸 창자,
형제자매, 부모, 고향…… 그런 것을 다 복원해낼 수 있는가,
유언도 없이 잡혀 와 토막 난 가자미 한 마리,
내가 주어가 될 수 없다는 것
나의 소유격도 결국은 다 파도 거품처럼 무의미하다는 것
그렇다면 여기서는 접시가 주어란 말인가?
실향의 접시가, 도마, 푸른 칼자루가 주어란 말인가?
오른쪽으로 두 눈이 쏠려 있는 가자미
껍질을 다 벗기우고 하얀 살만 토막으로 접시 위에 올라와 있다
희망의 현실적 근거가 한도 없지 않은가?
희망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닌가?
갈 데까지 다 간 마음……
접시에 대한 좌절, 몸부림, 굴종이 오고
이 시대에 누가 장편소설, 대하소설을 쓰는가?
있는 것은 몽타주, 토막토막 단상밖에는,
이 은은하고도 도도한 광채
접시 하나가 세계 전체와 맞먹는 것일 수도
그런데 살짝 이가 빠진, 저도 막 금 간 접시 위의 토막,
외부는 언제나 파괴적인 힘으로
개개에게 관여한다
이 하얀 보이지 않게 막 금 간 접시 앞에 놓인 나이프와 포크
앞의 신경증
그런 식으로 그날 별이 칼집 난 내 가슴에 소록이 들어왔다




말뚝 / 강연호

말뚝은 죽은 나무지만
죽은 나무는 죽어서도 버티어 서 있다 그 고집이 아프다
어찌 보면 말뚝이야말로 죽어서 사는 나무 아닌가
말뚝의 힘은 고집에 있다 그 고집은 가령
말뚝이라는 낱말의 모양새나 소리에도 무뚝뚝하게 묻어 있다
쉽게 뽑히거나 꺾이는 말뚝을 말뚝이라 할 수는 없다
그것이 그나마 말뚝의 고집을 달래는 방식일 것이다
물론 죽은 나무는 죽은 나무이므로
말뚝에서 새순이 트고 줄기가 벋고 잎이 무성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디 말뚝으로 박혔다면
왕년의 시간을 돌아보아도 좋을 것이다
다만 그때 다른 길이 있었다고는 말하지 말자
세상의 모든 세월이 그믐으로 가듯
세상의 모든 길이 결국 외길이었음을
새기지도 말자, 제 주위를 빙빙 돌았을 뿐이지만
덜렁 뽑히거나 꺾일 게 아니라
외곬의 고집으로 퉁명스럽게 버티다가
버티다가 마침내는 아예 땅속으로 머리끝까지 처박혀 버리는 것
그것이 말뚝의 최후이자 죽어서 영원히 사는 처음일 것이다


클립의 날 / 강윤미

오늘은 클립의 날
케이크에 초를 꽂고
생일을 축하해
스물두 살의 나와 스물세 살의 나를
이어주는 오늘은 클립의 날

바람에 클립을 끼우면
빨래가 마르고
머리에 꽃핀을 꽂은 구름은
비를 토해내지
클럽에는 가지 못하고
경로당 앞에서 머뭇거리긴 멋쩍은 사내들이
공원으로 흘러들지
알록달록 단풍잎, 단풍잎

작고 예쁜 클립에 마음을 빼앗긴 여학생들
서랍 모퉁이에서 꺼낸 일기장에
혼인신고서, 출생신고서, 사망신고서까지 한번에
끼울 수도 있지 마음에 안 들면 살짝 빼기도 하면서
눈물 콧물을 단추처럼 닫아놓기도 하지
배꼽과 배꼽을 연결할 수도 있지
애인은 팔짱으로 묶어둘수록 멀어지는 법
이 방의 불빛과 밤하늘의 별빛을 어둠으로 이으면
밤은 밤의 뜻으로 빛나고

누군가 떨어뜨린 클립을 줍는 순간
튤립 같던 엄마는
어느새 시들어 벽에 걸리지
나는 나만 아는 비밀로 고독해지지

<딩아돌하> 2012년 봄호



몇 개의 재발견 / 박승일


부리로 받아 적고 날개로 지운다 공중은 함께 나눠 쓰는 그들만의 공간, 썼다 지웠다 판에 박힌 학습, 만 번의 비행을 거듭하고 있다
몸속 어딘가에 복제된 세계지도, 한 번도 써먹은 적 없었으므로 길을 잃어 본 적 없다

늑대
고독을 짜깁는 기술자, 한 음절의 울음으로 초승달의 여백을 채웠던 시절도 있었다 오래전 인간의 유전자를 훔쳐 진화했던 탓에 대개 멸종된 종족
보름달이 뜨면 본성을 되찾는 무리다 술에 취해 우짖는 사람의 눈매를 닮았다


바람
산과 바다 구름 사이의 의견충돌이다 해소되기까지 몰려다니는 까닭에 부침이 심하고 변덕스럽다
때때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했을 때는 분분한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입자를 분석해 보면 지구 곳곳의 표정을 검색할 수 있다

나비
허공에서 피는 꽃, 꽃의 영혼이다 절반의 웃음과 울음으로 건네는 사무치는 인사법이다 향기를 보고 깔깔대는 꼬마 천사의 손뼉, 하느님의 작은 날개다
보고 있으면 눈이 다 해질 것 같은 다큐멘터리, 봄날의 폭설이다

연필
몸밖으로 나온 혀다 검은 피로 진술한다 상상력이 부족할 때면 종종, 몇 잔의 커피를 필요로 하나 짧아지거나 부러지면 칼에게도 베이는 것이 필연적이다
또르르 굴려보면 모두가 시험에 든 지금이 딱 그렇다

<詩로 여는 세상> 2012년 봄호



아주 도덕적인 자의 5분 / 서효인

그는 다시 걷는 일에 골몰한다
도덕을 지키기 위하여

멍청한 짐승의 내장을 빠져나오다 몇 명의 여성과 몸이 닿았다 정중하게 사과하고 싶었으나 여성들은 걷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노력하는 모습은 도덕적이다 그는 노력이 부족해 몸을 맞대었고 냄새가 나지 않았을까 걱정하지만, 걱정하는 마음은 비윤리적이다 그것은 멍청한 짐승의 냄새였고 짐승에게는 도덕이 없다

지갑을 꺼내려 오른손으로 본인의 엉덩이를 만진다 엉덩이를 만지는 것은 도덕적이다 자신의 몸은 자신이 사랑하여야 하고 지갑은 없고 깊은 구멍에는 바람만이 가득하다 쪼그린 자세로 개찰구를 빠져나와 주위를 살피지만, 두리번거리는 일은 윤리적이다 그것은 당혹스러운 찰나였고 순식간에 지갑을 빼내가는 짐승은 없다

생각이 없는 동물처럼 몸을 둥글게 하고 계단을 탄다 계단을 움직이기 위하여 쓰이는 전기를 생각한다 절약은 악행이고 모든 계단은 악마의 아들이다 걷는 일에 다시 노력을 기울이며 앞일을 가늠한다 생각하는 일 자체는 지극히 윤리적이고 생각만으로 발기가 될 수도, 도로 죽을 수도 있다 사람에게는 정신이 있다

계단의 끝에는 전단을 뿌리는 늙은 여자가 있다 계단의 중간에는 구걸하는 남자가 있다 계단의 처음에는 그의 정신이 있다 그의 모든 주머니에서는 사람 아닌 것들이 꺽꺽 울고 있고 눈물은 짐승의 버릇이다 그는 울음 속에서 자신을 증명할 수 없고 그것은 비윤리적이다 손에 들린 전단지 속, 맥주는 착하게 담겨 있다

그는 전단지 버릴 곳을 찾는다
도덕을 지키기 위하여

나비도 무겁다 / 박지웅

가구들이 트럭에 올라앉아 몸을 맞춘다
여기저기 끼어드는 불편들이 불편하다

거울은 담에 비스듬히 기대어
처음으로 제 살던 집을 보고 있다
집도 거울을 보고 있다
난생처음 보는 몰골이 뒤숭숭하다

여자는 거울 속으로 들어가서
부지런히 무언가를 안고 나온다
아이가 거울에서 지구를 들고 나온다
방에 굴러다니던 지구는 불편했다

지구를 트럭에 실을 수는 없는 일
필요한 것은 지구가 아니라 방 두 칸
플라스틱 수거통에 지구를 버린다
지구가 지구로 낙하한다
텅, 아이는 울고, 지구는 플라스틱이었다

놀란 라일락이 꽃을 놓친다
낙하한 꽃잎 몇 장은 거울 속으로 날린다
버려진 지구 위로 거짓말처럼
나비, 난다 플라스틱 바다 가볍게 날아
적도 스치나 싶더니 순식간에 담벼락 넘어와
거울에 박힌다, 나비도 무겁다

거울과 집은 여전히 마주보고 있다
그 사이에 물끄러미 입구가 서 있다
짐이 되는 짐들은 모두 버려야 한다
아이는 여전히 거울 속에서 울고 있다

여자는 거울을
거울은 아이를 안고 트럭에 오른다
트럭이 지구에서 멀어지고 있다
해가 동쪽으로 지고 있다

<현대시> 2012년 5월호


나무들의 사춘기 / 마경덕

사춘기 나무들은 예민하다
감성의 성장통이 시작되는 시기,
납작한 가슴이 불룩해지고 몽상도 늘어난다
아직 연둣빛 유아기의 감정이 남아있는 것은
모든 나무들의 공통점,
봄볕에 다시 동안童顔으로 태어나
해마다 사춘기는 되풀이 된다
머리에 꽃핀을 꽂는 것은 몽상이 늘었다는 증거
변덕스런 날씨가 반항을 부추기고
하루에도 몇 장씩 허공의 페이지가 넘어가는 사춘기
봄바람만큼 가벼운 감성은
금세 장식품을 떼어내고 연둣빛 감정을 제거한다
이때부터 공간을 확보하고 사생활을 기록하는 나무들
허공에 적힌 Y, 또는 X
그들의 기호記號를 알아듣는 건 새들 뿐이다
나무의 언어를 차용한 새들은 언제나 나무의 편을 든다
허락 없이 가지를 치는 것은
사춘기 딸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과 같다
몇 장의 비밀이 지워지는 순간, 울며불며 하루를 보낼 것이다
뼈가 유연한 이때 체형은 결정되는 것
그늘로 영역을 확장하는 그들에게
다리가 짧은 것은 치명적이다
주변 나무들과 키를 맞추지 못하면 내처 앓아야한다
벚나무가 재빨리 꽃을 버리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버찌가 익을 무렵 까칠했던 바람도 수그러들겠지만
나무들의 사춘기는 언제나 잠복중이다

-미발표작


T자 꼭지 / 마경덕

좌판에 쌓인 노지露地 수박들
엉덩이에 흙을 묻히고 T자 꼭지를 달고 있다
당도糖度를 보장하는 저 표시는

이쪽과 저쪽으로 이어진 길이 끊기고
단숨에 인연을 끝냈다는 것

한자리에 눌러 앉았다가
무거운 엉덩이를 털고 일어선 수박들
생을 포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농부의 단호한 결심일까
한 번의 가위질에 물길이 오가던 수로水路는 사라지고
목이 타는 수박들
몸에 가득 채웠던 단물은 제 것이 아니었다

T자 수박 한 통을 사는 것은
수박의 남은 생애까지 다 사는 것
수박을 잃은 빈 넝쿨은 돌돌 말려 버려질 것이다

길바닥에 부려진 천애 고아들,
잘린 배꼽 땡볕에 말라간다

-미발표작

시간의 방목장 / 마경덕

3시, 7시, 2시 15분…
누가 이곳에 시간을 방목했을까
시간의 바깥이 고요하다
자유로운 저 세상 밖의 시간들
왜 늦었느냐고 닦달하는 사람도 없다

각기 보폭이 다른 침묵들, 낮과 밤이 뒤섞인
시침과 분침을 껴입은 무질서가 평화롭다
일생 이렇게 편한 때가 있었나
어제와 내일도 까맣게 잊고
종일 잠만 자도 좋은 시절은 세상을 알기도 전에 끝이 났다

횡단보도 앞
속도들이 다리를 뻗고 누웠다
고장 난 신호등에 길이 막혀도 태연한 대명시계점
저 묵언默言을 깨워 값을 지불하는 순간
끝없는 동그라미에 갇혀
죽을 때까지 고된 노역勞役을 치러야한다

소리에 귀가 늙은 사내가
시계를 팔뚝에 묶는 순간, 시간의 노예가 태어났다
세 개의 바늘이 놓친 걸음 허겁지겁 따라간다

-미발표작



각시투구꽃을 생각함 / 문성해

시 한 줄 쓰려고
저녁을 일찍 먹고 설거지를 하고
설치는 아이들을 닦달하여 잠자리로 보내고
시 한 줄 쓰려고
아파트 베란다에 붙어 우는 늦여름 매미와
찌르레기 소리를 멀리 쫓아내 버리고
시 한 줄 쓰려고
먼 남녘의 고향집 전화도 대충 끊고
그 곳 일가붙이의 참담한 소식도 떨궈 내고
시 한 줄 쓰려고
바닥을 치는 통장 잔고와

세금독촉장들도 머리에서 짐짓 물리치고
시 한 줄 쓰려고
오늘 아침 문득 생각난 각시투구꽃의 모양이
새초롬하고 정갈한 각시 같다는 것과
맹독성인 이 꽃을 진통제로 사용했다는 보고서를 떠올리고
시 한 줄 쓰려고
난데없이 우리 집 창으로 뛰쳐 들어온 섬서구메뚜기 한 마리가
어쩌면 시가 될 순 없을까 구차한 생각을 하다가
그 틈을 타고 쳐들어온
윗집의 뽕짝 노래를 저주하다가
또 뛰쳐 올라간 나를 그 집 노부부가 있는 대로 저주할 것이란 생각을 하다가
어느 먼 산 중턱에서 홀로 흔들리고 있을
각시투구꽃의 밤을 생각한다
그 수많은 곡절과 무서움과 고요함을 차곡차곡 재우고 또 재워
기어코 한 방울의 맹독을 완성하고 있을


열병식 / 심언주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징징징징징징징징징징징징징징징징징징징징
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포구에
허수아비들을
줄 세울 수 있다.
모자를 씌울 수 있다.
손에손에 총대를 메게 할 수 있다.
호루라길 불어 조용히 시켜 놓고
모조리 같은 높이로 뛰어오르게 할 수 있다.
공중에서 멈추게 할 수 있다.

너는 바다의 꼭짓점을 끌고 오른다.
바다를 확장시킨다.
오에서
어까지
튀어 오르는 물방울들의 물기를 말려가며
집어등처럼 매달려
우화를 꿈꾼다.

네가 사라진 자리에
윤곽만 남은 세모와 네모.
나는 허공에 빈집을 지어 놓고
혼자서 몰래 그곳을 드나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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