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홍 붉게 흐드러진 4월 어느 날 뒷산에서
밥그릇은 언제나 가득하다
몇 달 전부터 밥을 먹지 않는다.
이빨이 마른 사료를 씹을 만큼 탄탄하지 못한가 보다
두 달 전부터 마른 사료 대신 연어 통조림을 놓았다
혓바닥으로 한두 번 핥고 지나간다.
뼈가 드러난 살가죽이 애처롭다.
발걸음이 걸음마 같다.
몇 년 전 녀석이 갑자기 사라졌던 때가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친다
>재회
작고 여린 몸, 갓난아기처럼 온순하지만
오므렸던 발톱을 세우면
사나운 야성을 드러내던 녀석
산기슭 축사를
자신의 집으로 믿고 살다가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영역을 넘어오자
그만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한 달 동안 안타까운 시간만 흘러갔다
어느 날, 저무는 산속 어스름한 오솔길에서
실낱같은 울음소리를 들었다
가시덤불 속에서 작은 몸이 비틀거리며 걸어나왔다
울컥, 치미는 눈물
버림받은 슬픔을 삭이려고 어딘가를 헤맸을
깡마른 몸이 다시 내 품안에 안겼다
산기슭 숲에선 밤마다
야성을 찾아 헤매는 울음소리가 들린다.
영산홍 붉게 흐드러진 어느 날
13년 쌓았던 돌담이 무너져 내린 축사에 녀석이 누워 있다.
삼 개월 나돌다가 옛집에 돌아와 이틀 밤을 보낸 뒤
초라한 몰골로 떠났다.
입과 눈 위에선 누런 똥파리 떼와 하얀 구더기들이 꾸물거리고 있다
생명은 언제나 죽음 위에서 꽃핀다
늦봄의 하늘이 텅 비어 있다.
녀석이 묻힌 공원의 가장자리에 해당화가 한 송이 피어 있다.
>피빛 사월
핏빛 출렁이는 늦은 봄날
쓰러진 몰골이 썩은 나무토막처럼 초라하다
지긋한 응시와 깊은 침묵 속에서
흘러간 짧은 인연을 파묻다
메말라 굳어진 땅에
무겁게 삽질하는 맥 빠진 손 위로
붉게 물든 봄날이
꽃상여처럼 떠나가고 있다.
야성의 울음소리 들리지 않는 산기슭
짙은 어둠에 묻힌 채
비바람만 적막하게 훌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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