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명

가훈

연안 燕安 2011. 2. 12. 20:21

 

         眞空妙有  一切唯心造

         진공묘유 일체유심조

 

 

 

진공묘유를 직역하면 "참된 빈자리에서 묘리가 있다"가 된다.

즉 자신을 비운자리, 자신을 버린 그 자리에서 묘하게 참된 자신을 찾을 수 있다.

나에 대한 집착의 꺼풀을 벗어던지면 우주와 한 몸이 된 나, 즉 참된 나를 발견하게 된다.

마음에 감정과 망상, 집착과 욕심이 없는 순수하고 깨끗한 상태, 즉 본래의 성품인 참 마음을 진공이라 하는데

보고 듣고 사고하는 작용이 텅 빈 가운데 오묘하게 있다고 하여 이를 진공묘유라 한다.

진공묘유는 진실로 비운 마음의 작용이다.

비웠다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비움의 작용이 있는 것,

이 작용은 이성적 인식, 즉 사유와 이성을 통하여 얻어지는 개념적, 논리적 인식을 의미한다.

 

진공묘유가 지혜로운 사고를 준다면, 비우지 못한 집착의 마음은 어리석은 번뇌만을 준다.

사랑, 슬픔, 기쁨, 애착 등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사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 욕망을 버린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욕망이 생명체의 본질이며 삶의 원동력인데,

욕망을 버린다는 것은 삶의 의욕을 상실하는 것인지 모른다.

욕망도 삶의 허무를 메꾸는 한 방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삶이 욕망의 전차라는 것을 인식하고 인정한다는 것이 비움의 첫걸음이 아닐까?

 

일체유심조란 마음이 모든 것을 다 만들고 이룬다는 뜻이다.

일체유심조는 진공묘유로 이루어 지는 것이다.

느낌과 생각과 의도와 인식 등의 작용을 모두 통틀어서 마음이라고 한다.

느끼고 생각하여 말과 행동을 의도적으로 좋거나 나쁘게 하면,

결과는 말과 행동에 따라서 그대로 좋거나 나쁘게 일어나게 된다. 이것을 일체유심조라 한다.

또한 원효대사께서 해골바가지의 물을 먹고 더럽다고 토하다가,

마음에 따라 느낌이 변하는 것을 깨달은 것도 일체유심조의 표본이다. 

 

진공묘유는 지혜의 샘이고 일체유심조는 지혜의 개울이라고 할 수 있다.

 

 

<말뜻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화엄경의 핵심사상을 이루는 말로 "세상사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뜻이다.

슬프고 짜증나는 일도, 한 생각 돌이키면 편안해 지는 법이다.

그러나 이 법구(法句)에는 논리적 결함도 있는 듯이 보인다.

우리 마음이 저 뜰앞의 소나무를 만들거나 하늘의 흰구름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마음이 만들었다"는 표현은 지나친 과장이 아닐까.

분명히 우리들 마음이 이 세상의 객관대상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대상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마음에 달려 있다.

불교에서는 마음의 본체인 식(識)을 떠나서는  어떠한 실재(實在)도 없다고 하며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는 비유를 든다.

같은 것을 동시에 바라보는 데에도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물을 보면, 누구나 마신다든지, 발을 담그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낙엽 지는 호숫가에서 첫사랑을 속삭였던 이는 물만 보면 다정하고 아름다운 감정이 솟구친다.

즉 물이라는 객관적 형태를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천차만별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물에 대한 객관적이고 교과서적인 해석은 존재할 수 없다. 물은 결국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만약 지금 견딜 수 없는 고통과 미움에 시달리는 이가 있다면, 옛 기억을 떠올려 보자.

죽을 것만 같았던 고통의 시간들이 지금 와서 생각하면 모두 부질없는 번뇌와 망상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지금의 현실도 언젠가는 추억이 될 따름이다.

문제는 고통이 아니라,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상념의 차이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도 마찬가지다.